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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를 욕보이다 : 미의 역사와 현대예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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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구기호601/단885ㅁ;2017
  • 저자명아서 단토 지음, 김한영 옮김
  • 출판사바다출판사
  • 출판년도2017년 7월
  • ISBN9788955619201
  • 가격25,000원

상세정보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때가 왔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의 〈샘〉이후,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등장했다. 저자는 〈브릴로 상자〉를 만나 ‘무엇이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평생 화두로 삼게 된다. 이 책은 미국의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현대 예술철학을 집약한 3부작 중 마지막 권으로, 2001년 미국 철학회 연례모임에서 있었던 강연 ‘미에 대한 반란’을 바탕으로 한 저작이다. 단토의 3부작에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 현대예술작품의 존재론이고 『예술의 종말 이후』가 현대예술철학사라면, 『미를 욕보이다』는 현대예술계에서 의심받고 배척당한 미의 역사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예술에 대한 핵심 개념은 ‘구현된 의미’에 있다. 〈브릴로 상자〉는 예술작품이지만 슈퍼마켓 수세미 포장 상자는 아니다. 뒤샹의 〈샘〉에서 소변기 자체의 디자인적 아름다움이 외재하듯, 〈브릴로 상자〉의 디자인적 아름다움은 부차적인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내재적 미’는 그가 새롭게 명명한 미학적 가능성으로, 마티스의 〈푸른 누드〉 등의 사례를 분석ㆍ탐구했다. 저자는 이러한 20세기 예술철학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옹호하지만, 여전히 ‘미는 행복의 약속’이며 우리 삶에 필수적이란 믿음도 지지한다.


책소개

아서 단토의 현대예술철학 3부장 중 마지막 권

아름답지 않은 것, 추하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도 예술일 수 있다면 이제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미, 왕좌에서 물러나다

이 책은 단토가 2001년 미국철학회 연례모임에서 ‘미에 대한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세 차례의 카루스 강연을 바탕으로, 현대예술에서 미의 문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저작이다.

미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명된 이래로 오랫동안 예술과 동일시되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위대한 미학의 시대’에 예술과 미, 미와 선(도덕)의 관계는 공고해졌고, 아름다운 예술에 의한 정신의 고양은 문명의 우수성으로 예찬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란 야만을 목격하며, 일군의 예술가들은 예술과 미, 도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성 견해에 반감을 품었다. 미 때문에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위선적 사회를 향해 공공연히 도덕적 혐오를 표현했고, 급기야 ‘미를 암살하려는’ 욕망을 선언했다. 예술가는 부도덕한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예술이란 그 자체로 역겨울 뿐이다!

단토가 ‘반항적 전위예술’이라고 부르는 이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랭보의 전통에서 ‘미에 욕설을 퍼붓고’, 뒤샹의 충고대로 더 이상 ‘망막의 전율’을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아름다움 대신 의도적으로 추하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 외설적이고 익살스러운 것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구더기가 들끓는 소 머리를 오늘날 엄연히 예술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계몽주의 시기의 미학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반항적인 전위예술이 얼마나 완벽히 승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4년 단토가 〈예술계〉를 발표하여 ‘예술의 정의’ 논쟁을 촉발할 무렵, 예술은 또 다른 반미학 혁명을 맞이했다. 팝아트와 플럭서스 운동, 개념미술은 삶과 예술의 간극을 메우고, 순수예술과 통속예술의 차이를 지워나갔다. 이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춤이 되고, 침묵도 음악일 수 있었다. 단순히 포옹을 하거나 전등을 켜고 끄는 것도 예술로 인정받았다. 과거에 사람들이 예술 개념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들은 말소되었고,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이 혁명의 그늘에서 미는 예술과 예술철학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이제 미는 “단지 경멸을 불러오고, 나이 지긋한 그 노부인은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외설적이라서가 아니라 아름답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섹스와 폭력을 그리는 것은 괜찮지만 아름다운 것을 그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전통적 미학에 등을 돌리고 ‘쿨’해지기로 한 반항적 전위예술의 결심, 고상한 취미의 세계에서 유희적 악취미의 세계로의 이 전환이, 20세기 예술철학에게는 ‘건강한 움직임’이자 ‘엄청난 진일보’였다고 단토는 긍정한다. 반항적인 전위예술은 미가 예술 개념의 전부가 아니며, 아름답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일 수 있고, 미가 있든 없든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예술철학은 지리멸렬했던 미학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예술이 우리 삶에 지니는 의미를 다시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의 종말 그리고 ‘구현된 의미’로서의 예술작품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은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 즉 예술에 대한 정의가 시급해진다. 예술을 단순히 ‘미의 창조’ ‘모방적 재현‘으로 간주하는 옛 정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이전의 미학 담론에서 예술 개념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예술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미래의 예술이 어떤 새로운 작품을 낳을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도 마침내 예술을 철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단토의 ‘예술의 종말’ 개념이다. ‘예술의 종말’이 아도르노에게는 예술의 쇠퇴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고, 헤겔에게는 정신이 더 이상 감각에 호소할 필요가 없어지는 최고 단계로의 고양이었다면, 단토에게는 예술의 다원주의가 확립된 후 마침내 역사를 초월한 예술철학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물음에 더 이상 예술의 역사가 전복시킬 수 없는 답을 내리는 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핵심 개념은 ‘구현된 의미’다. 단토는 예술작품을 하나의 자기완결적 구조로 보거나 사회문화적 산물로 보기보다는, 먼저 작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항상 작품에 비언어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 생각이 무엇인가에 있다. 우리는 작품이 구성된 방식에 기초해 작품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지적 산물로, 그 예술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석을 통해 파악되며,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의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단토는 칸트 미학에는 이러한 의미 개념이 결여되어 있으며, 헤겔의 미학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취미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구현된 의미’라는 개념의 이해를 위해, 단토의 예술철학에 줄곧 영감을 주었던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왜 예술작품이고, 그것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슈퍼마켓의 수세미 포장상자는 왜 예술작품이 아닌가? 전통적 미학은 왜 하나는 예술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아닌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둘 다 똑같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브릴로 상자〉에 예술작품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그 의미라고 단토는 말한다. 이때 브릴로 상자 자체의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는 외재적(부차적)이다. 소변기의 아름다움이 뒤샹의 〈샘〉에 외재하듯 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그 작품의 의미, 생각, 내용의 일부로서 내재적(필수적)인 경우들이 있다. 단토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 로버트 머더웰의 〈스페인 공화국에 바치는 애가〉, 마야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등의 사례를 분석하며 ‘내재적 미’라고 자신이 명명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단토는 반항적인 전위예술이 예술의 정의에서 미를 폐위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미 자체를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포함해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예술에서 미가 전멸한다고 해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에는 다른 보완적 가치들이 많이 있으며, 미는 세계의 예술문화에서 부수적인 속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에는 다른 미학적 성질들과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는 진과 선처럼 하나의 보편적 인간 가치이기도 한 유일한 미학적 성질이다. 선이 전멸한다면 인간적 삶이 불가능해지듯이, 미가 전멸한다면 견딜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단토는 미가 우리에게 충만한 삶의 의미를 정의해주는 가치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없는 미를 보려 하다 - 내재적 미와 외재적 미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내재적 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르네상스의 원리에 따르면 그림은 세계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었다. 즉 그림은 세계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투명성을 포기했고, 그저 대상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볼 만한 대상이 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피카소의 〈마졸리〉 같은 추상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 아름다움은 이제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미화 때문이 아니라(그림만 봐서는 피카소의 아내 졸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워야 했다. 그렇게 현대예술비평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먼저 단토는 마티스의 1913년작 〈푸른 누드〉를 예로 든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아름답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마티스에게 모델의 피부색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는 조급하게 ‘당연히 살색’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림에서는 파란색이었다. 투명성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왜 실제로는 살색인 것을 파란색으로 그렸을까? 왜 실제로는 아름다웠을 것을 소름끼치게 그렸을까?“ 로저 프라이는 처음에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그림도 우리가 충분한 미학 교육을 받으면 조만간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단토는 미는 ”파란색만큼이나 명백하다. 눈앞에 있다면 그것을 보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푸른 누드〉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는 단지 그림의 힘과 역동성에 감탄하는 마음을 표현할 뿐이다. “우리에게 즐거운 그림보다는 힘찬 그림을 보여주겠다는, 우리의 주의를 인물이 아닌 그림에 돌리겠다는, 혹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 그림의 힘을 통해 여성미의 힘을 표현하겠다는 마티스의 결단에 경탄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푸른 누드〉는 시각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진실하기에 훌륭한 작품이다.

같은 시기 마르셀 뒤샹은 일련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을 통해 “일상생활의 물건을 취해…… 그 물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 작품들의 예술미를 올바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흄이 지적했듯이 많은 추론과 논의라는 우리의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작품이 ‘생각 더하기 객체(대상)’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을 활용해 그 생각을 확인하고, 그 생각이 작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파악하고, 심미적 미가 작품의 의미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단토는 작품의 의미와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미, 즉 헤겔식으로 ‘정신에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미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재적 미’다.

워싱턴 DC 국립몰기념공원에 있는 마야 린의 1982년작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그때까지의 틀을 깬 파격적인 작품이다. 양팔을 벌리고 선 두 개의 기다란 수직 벽면에 베트남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 병사 약 5만 8000명의 모든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방문객은 반지르르한 검은색 화강암에 새겨진 고인들의 이름과 함께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모네의 멋진 수련 그림들에서 잔잔한 연못 수면에 하늘이 비치듯, 이 기념비 앞에서 서면 비록 죽음 자체는 영원하지만 마치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공동체에서 어우러지는 듯하다. 〈기념비〉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하든, 그 아름다움은 ‘생각’과 관련해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기념비〉가 아름답다고 경험되는 것은 그 작품의 ‘생각’과 관계가 있다. 그 생각은 작품의 의미에 속해 있고, 그 아름다움 역시 작품의 의미에 내재한다. 자연미가 외재적이라면, 훌륭한 작품의 예술미는 내재적이다. 내재적 미는 뒤샹이 비난한 ‘망막의 전율’을 뛰어넘어 우리를 더 풍부한 미적 경험으로 이끈다. 


세계는 아름다울 가치가 있는가? - 미와 정치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전해에 있었던 ‘로드니 킹 구타사건’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선정함으로써 ‘예술의 정치화’라는 이슈를 부각시켰다. 비엔날레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인종, 계급, 성 불평등에 반대 의사를 피력했고, 관람자에게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메시지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전통적 예술관을 지닌 일부 관람객들에게는 낯설고 불쾌하고 추해 보였다. (가까운 예로, 마네의 〈올랭피아〉를 빌려 정치를 풍자한 이구영의 〈더러운 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생각해보라.)

단토는 미와 예술적 우수성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뛰어난 예술작품이라도 추하게 보일 수 있으며, 추한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추함이 아름답게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술이 추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심미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단토는 그 사례의 하나로 로버트 머더웰의 〈스페인 공화국에 바치는 애가〉를 든다. 하연 바탕 위에 큼지막한 검은 점과 띠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이 추상화에서 단토는 프랑코 독재기 파괴된 고통의 풍경 속에 서 있는 형체 없는 인물들을 상상한다. 끔찍한 역사 속 정치적 죽음들을 인상적인 형태와 색, 리듬과 비율로 표현한 이 작품은 사전지식 없이 첫눈에 보기에도 아름답다. 하지만 단토는 〈애가〉가 예술적으로 훌륭한 것은 단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예술적으로 올바르게 표현되었기에, 즉 미가 작품의 의미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머더웰의 〈애가〉는 일종의 죽음에 대한 시각적 묵념, 영원한 도덕적 기억이다. 1980년대 에이즈가 유행했을 때 동성애자들은 장례식을 일종의 퍼포먼스 공연처럼 치렀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뉴욕 시 곳곳에는 즉흥으로 향초, 꽃, 시를 적은 쪽지 등이 놓이는 성소들이 출현했다. 개인과 사회의 아픈 사건을 아름다움과 결합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슬픔을 평온한 비애로 승화시키고 상실감을 공동체 전체와 나누는 것이 애가의 기능이다. 예술과 사회를 적대관계에 놓고, 아름다운 예술은 적과의 동침이라고 보는 반항적인 전위예술 쪽에서 보자면, 위로는 예술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과 상실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머더웰의 〈애가〉는 미에 위로의 효과가 있음을, 따라서 우리는 미를 포기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역시 가까운 예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많은 예술작품과 위안부 소녀상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결코 불가피하지 않은 고통을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철학적 관조가 아니라 분노하고 행동할 때이기 때문이다. 서정적 추상화가였던 필립 거스턴은 베트남 전쟁의 광기 속에서 자문했다. 왜 나쁜 세상을 위해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하는가?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계속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집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모든 것에 좌절과 분노를 느끼고 그런 뒤 작업실에 들어가 빨간색과 파란색을 배합하는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세계는 아름다울 자격이 없으므로, 예술이 있어야 한다면 아름답지 않아야 한다. 예술도 인간의 삶처럼 거칠고 노골적이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화를 하는 사람은 점령군에게 부역하는 자다. 그렇게 거스턴은 미적 순수성을 버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안과 일치하는 예술, 핏빛 가득한 우화적 풍자화로 나아갔다. 

머더웰과 거스턴의 예처럼, 같은 현실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미에 대한 태도는 상반될 수 있다. 책의 말미에서 단토가 말하듯, 이제 “미는 예술에서는 선택이며, 필요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미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그런 인생에 미는 필수조건이다.” 〈애가〉가 주는 위로에서 알 수 있듯, “미는 인간에게 너무 중요한 속성이라 삶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취미뿐 아니라 삶 자체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미가 예술에서 예전과 같은 중요성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은 정치와 함께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이 평등할 때, 여러 인종들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 때, 불의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예술가들이 분노하며 세상에 내놓는 정치적 작품들은 그만 제작될 것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 미와 숭고

미 이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미학적 특질들 중 첫손에 꼽힐 수 있는 것이 ‘숭고’다. 바넷 뉴먼이 1948년에 그린 〈하나임 I〉은 숭고를 미의 대척점에 놓은 상징적 작품이다(일반인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 중 하나로 더 유명하지만). 뉴먼은 예술의 역사를 ‘미적 성질과 완전한 형식에 집착하여 정신의 고양을 추구하는 전통적 예술’ 대 ‘형식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 미를 파괴하려는 충동을 지닌 새로운 예술’의 미학적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간단히 말해, 후자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지하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숭고란 무엇인가? 1888년 파리에서 고갱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작품을 보고 기절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어떤 예술작품을 보고 넋이 나갈 정도로 아찔하고 압도되어,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은 작품이 완전하다는 취미판단에서 흡족해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미적 경험이다. 숭고를 경험하고 나면 우아함과 균형 같은 아름다움은 갑자기 하찮고 부족해 보인다.

칸트는 감탄과 경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숭고라고 정의하면서,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라는 두 가지 예를 들었다. 칸트는 숭고의 개념이 인간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문화나 지식과는 무관하다고 믿었다. “숭고는 단지 생각만 해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초월하는 어떤 마음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숭고한 작품의 일차적 특징은 거대한 크기다.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 같은 장려한 예술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자신의 왜소한 한계를 절감하며 경외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뉴먼의 대작들을 도록으로 봐서는 숭고를 느끼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숭고를 경험하려면 그의 거대한 그림 앞에 직접 가까이 서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숭고는 크기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흔히 뉴먼의 〈하나임 I〉을 회화 자체를 표현한 작품, 즉 ‘회화에 대한 회화’라고 평한다. 하지만 단토에 의하면 이 그림은 더 야심차다. 이제까지 신을 묘사한 수많은 그림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신의 형상일까? 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 비추어볼 때, 숭고한 신의 형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에게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실물 같지 않은 그림은 모순형용이었던 르네상스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은 실물 같은 그림이 아닌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나임 I〉은 신의 단일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림으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어떤 것에 관한 추상화다. 그것은 그림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상을 금하는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정신적 실체를 표현했기에 현대예술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다. 

단토는 르네상스가 인간을 발견했다면, 추상표현주의는 인간을 재발견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인간의 무엇인가? 숭고를 표현한 또 다른 작품 〈인간, 영웅적이고 숭고한〉에 대해서 뉴먼은 “인간은 자기인식과 관련하여 숭고할 수 있고, 또 숭고하다”라고 말했다. 미술관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그 거대한 그림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크기를, 우리가 거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마치 하이데거의 ‘현존재’(거기 있음) 개념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있을 때와 달리 위축되지 않는다. 칸트가 말한 별이 총총한 하늘과 우리 안의 도덕법칙은 늘 감탄과 경외를 자아내지만,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한다는 사실에 비하면 이내 빛을 잃고 초라해진다. 단토는 아무것도 없는 한밤중에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햇살 가득한 풍경이 나타나는 것 같은 ‘의식의 경이’ 앞에서는 아름다움이 곧 숭고이며, 숭고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숭고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숭고와 미는 ‘정신에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며’ 하나가 된다.


지은이 | 아서 단토 (Arthur C. Danto)

미국의 예술철학자. 세계적인 현대예술 비평가이자, 전위예술의 옹호자, 특히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4년생으로, 웨인주립대학교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컬럼비아대학교 철학교수를 지냈으며, 은퇴 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84년부터 2009년까지 『네이션』지의 예술평론가로 활약했으며, 『철학저널』 『아트포럼』 등의 편집을 맡았고, 미국철학회장과 미국미학회장을 역임했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무엇이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으며, 같은 해 발표한 논문 〈예술계〉로 ‘예술의 정의’ 논쟁을 촉발했다. 그의 선구적 문제 제기는 예술을 어떤 미학적·형식적 특징이 아니라 예술계 종사자들의 사회적 합의로 규정하는 ‘예술제도론’으로 이어졌다. 

단토는 1960년대부터 다양하게 분출하기 시작한 새로운 예술을 옹호하면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논쟁적인 선언을 했다. 현대예술은 더 이상 전통적 미학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모방이론으로 대표되는 서양예술의 한 역사는 종말을 고했고, 이제 예술은 역사이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은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제약이 모두 사라졌으며 이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곧 새로운 예술의 시작, 현대예술의 해방 선언이었다. 

2013년 10월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단토는 수많은 평론과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1990년 미국도서평론가협회 평론 부문을 수상한 『만남과 성찰』을 비롯해 『일상적인 것의 변용』 『예술의 종말 이후』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 『경계와의 유희』 『미래의 마돈나』 『앤디 워홀』 『무엇이 예술인가』 등이 있다.


옮긴이 | 김한영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전업 번역을 하며 예술과 문학의 곁자리를 지키고 있다. 옮긴 책으로 『미를 욕보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빈 서판』, 『언어본능』, 『갈리아 전쟁기』, 『나라 없는 사람』, 『끌리는 박물관』 등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목차

서문 11

감사의 말 31

서론 : 브릴로 상자의 미학 35


1 미 그리고 예술의 철학적 정의 59

2 반항적인 전위예술 95

3 미 그리고 미화 133

4 내재적 미와 외재적 미 167

5 미와 정치 205

6 예술을 생각하는 세 가지 방법 241

7 미와 숭고 273


옮긴이 해제 304

옮긴이의 말 330

찾아보기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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