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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이응노미술관

객원연구원


이응노 탄생 120주년 특별전

《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2023. 11. 28(화) ~ 2024. 03. 3(일)

이응노미술관 :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7










11월 27일 10:30 대전광역시 서구   '이응노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 현대 미술관과 이응노 미술관의 협력 기획 전시 《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의 프레스 뷰와 기자 간담회를  갖고 주요 전시작품을 소개하였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다수의 작품은 체르누스키 파리 시립 아시아 미술관의 대여 협조를 받았으며 국립 현대미술관, 아라리오 뮤지엄, 프랑스 퐁피두 센터, 체르누스키 파리 시립 아시아 미술관 등을 비롯한 국내외 유명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가 소장해 온 이응노 작품이 작품 60여점, 아카이브 90여점 총 150여 점(국·내외 미공개 작품 및 아카이브 포함)대거 전시되었다.



인사말하는 이응노미술관 김경연책임연구원


이응노미술관 김경연책임연구원은  '이응노 화백이 유학을 떠나기 전후를 기점으로 한국 전통을 드러낸 작품과 유럽 영향을 받은 작품을 고루 배치했으며 국내외 미공개 작품을 다수 선보여 알려지지 않았던 이 화백의 새로운 면모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미술관을 대표하여 인사말을 했다. 김경연책임연구원은 이응노미술관의 소장품 외에 다수를 대여 전시하였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는데 '퐁피두미술관에 메일로 이응노작품 전시를 위한 대여 요청을 했는데 두 달 후 손 편지로 승낙의 답신을 보내왔고 매우 기뻤다고 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소장 기관들과 개인 소장자들이 적극 협조해 주었다.'고 후일담과 함께 답해 주었다.


국립현대 미술관 한정인학예연구사는 '이번 이응노 탄생 120주년 특별전은 국립현대 미술관과 이응노 미술관의 협력 기획 전시이며 최근 한국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은 한국 미술에 관한 관심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따뜻한 관심을 바란다.'는 인사말을 하였다.



이번에 전시된 60 여점의 출품 작품들은 대다수 국내 미공개 작품이라는 점 외에도 이응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고르게 보여주도록 선정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며 1958년 유럽 이주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 까닭에 각 전시실을 둘러보며 이응노의 한국적 뿌리와 유럽에서 받은 자극이 어떻게 충돌하고 융합하여 독자적인 작품으로 탄생하였는 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응노 미술관 김지윤학예연구사의 작품 설명은 4개의 전시 실을 차례로 이동하면서 대표작과 이 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들을 설명하였다.


1전시실(충돌과 융합)은 이응노가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1959년 이후 그린 작품들 가운데 걸작들만을 모아서 구성되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닌 관람객들을 만나며 이응노의 작품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응노의 작품 속에서 한국미술과 유럽미술은 어떻게 충돌하고 창조적으로 변화했는지를 추적하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국제전의 중심에 놓인 키워드는 ‘융합’(Convergence)이다. ‘융합’은 70여 년에 걸친 이응노의 창작활동을 관통하는 단어이다. 이응노 자신은 이를 ‘충돌’(interférence)이라고 했다. 충돌(Collision)은 이응노가 설립한 파리동양미술학교 학생들의 전시회 타이틀이기도 했으며 이는 “자신만의 창의적 언어를 발견”하며 “궁극적으로 동양과 서양 예술이 함께 질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곧 모든 창의적 언어들이 대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비약시킨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용어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이응노의 작품세계는 동양과 서양, 식민지와 제국주의 등 사회·문화적으로 서로 길항하는 요소들의 충돌과 이에 따른 끊임없는 재해석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술 내적으로도 문인화와 민화, 감상화와 장식화 등 한국미술사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상호교차했다. 이번 국제전은 이렇듯 이응노가 여러 경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조한 융합의 세계를 보여준다.   




<구성>, 1970년대 후반, 종이에 과슈, 80×98cm, 이응노미술관 소장


1970년대부터 이응노는 프랑스 국립 태피스트리 제작소, 세브르 국립도자공장 등과 같은 국립기관들과 협력하여 태피스트리, 도자기 등을 제작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그가 새로운 회화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응노는 대전, 전주 등에서 ‘개척사’라는 이름의 일종의 인테리어 사업을 했기 때문에 디자인적인 요소가 낯설지는 않았다. 또 아들 이융세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 이응노는 멕시코 등 남아메리카 미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1970년대 후반의 〈구성〉은 이러한 작가의 변화를 드러낸다. 원색과 평면적인 배경 구성,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도형들은 수묵화가 이응노의 또 다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세 명의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날개를 지닌 형상은 이응노의 작품에서 ‘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 자신과 부인, 그리고 아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 도상은 한자 ‘좋을 호(好)’에서 발전하였다. 원색이 주는 밝고 화사한 느낌이 가족의 따뜻함을 훌륭하게 시각화하고 있다. 




<군상>, 1983, 종이에 수묵, 97.1×67.6cm, 체르누스키 파리 시립 아시아 미술관(Musée Cernuschi, Asian Arts Museum of Paris) 소장



1980년대 이응노의 그림 속에는 수많은 인간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친 사람, 온 몸을 힘껏 열어 젖인 사람, 높이 뛰어오는 사람,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는 사람들 등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모여 어느새 화면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이들 무리는 마치 파도와도 같은 리듬으로 요동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군상〉시리즈는 이응노의 마지막 변모이자 백조의 노래처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가 속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연상한다는 점이다. 한국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지만, 유럽사람들은 반핵운동이나 반전(反戰) 시위를 그린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축제를 연상한다. 사실 이응노가 1980년대 직전까지 그렸던 작품들의 주제가 ‘춤’이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의 작품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응노의 〈군상〉에는 기쁨의 노래가 담겨 있고 보는 이들에게 웅장함을 선사한다. 



2전시실(서쪽에서 부는 바람 : 유럽, 1959-1989)은 1989년 이응노가 서거 직전에 그린 작품 〈군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이응노가 막 유럽에 도착한 1959년 작품에 이르도록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이응노의 스케치 6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데, 작품화되기 이전의 스케치들은 생생하고 날 것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3전시실(동쪽에서 부는 바람 : 아시아, 1930년대-1959년)은 이응노가 유럽으로 이주하기 이전의 작품들로 구성했다. 1930년대 이응노가 즐겨 그렸던 대나무와 난초 그림, 1936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 후에 그린 실경산수화, 해방 이후 1950년대의 대표적인 인물화 등이 골고루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가 습득했던 동아시아의 미술 전통은 유럽에서 이응노가 활동하는 데 끊임없이 자양분을 제공한다.




〈지게꾼〉, 1950년대 초반, 종이에 수묵담채, 27×33cm, 한국 개인 소장




이응노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이미 1950년대 평범한 삶 속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린 〈영차영차〉, 〈굴뚝청소부〉, 〈지게꾼들〉 같은 작품 속에 뚜렷하게 담겨 있다. 굵고 투박한 선과 대범하게 칠한 배경의 색채가 어우러지면서 마치 스냅사진처럼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느낌이다. 



<정원〉, 1950년대 후반, 종이에 먹, 색, 132×68cm, 이응노미술관 소장


4전시실(동양미술학교, 1960년대 – 현재)은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운영한 동양미술학교와 관련된 작품 및 아카이브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이응노가 40여 년 동안 운영했던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소개하고 있으며. 교육자로서 이응노가 유럽 제자들에게 보여준 자세와 예술철학은 동양화가로서의 소명의식을 보여준다. 



동양 미술 학교에서 실기 교육과 체본에 관해 설명하는 김지윤 학예사



4 전시실은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운영한 동양 미술 학교와 관련된 작품 및 아카이브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응노는 1962년 경부터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동양화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수업 과정은 유럽 최초의 동양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1965년부터는 체르누스키 미술관에서도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양미술학교’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체르누스키 미술관과 자신이 설립한 고려 화랑에서 제자들의 작품 전시회도 열었다. 동양미술학교는 최근까지 꾸준하게 진행되면서 3,000명이 넘는 다양한 국적의 제자를 육성하였다.


동양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설립은 이응노가 해방 직후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다. 1945년 서울 남산의 ‘고암화숙’, 1956년 서울 신교동의 ‘고암미술연구소’에서 이미 이응노는 젊은 동양 화가들을 키우고 있었다. 직접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이라는 교재를 출간할 정도로 미술 교육에 강한 집념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유럽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파리의 동양미술학교에서는 동양의 회화와 서예에 호기심을 가진 일반인들도 있었지만 건축가, 조각가, 도예가 등 이미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던 예술인들이 고암에게 동양화와 서예의 철학과 기법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제자들을 대하는 교육자로서 그의 태도에는 동양 화가로서 소명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동양화에 대한 이응노의 열정은 제자들에게도 전해졌고 이들은 동서양 미술의 융합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창조하였다. 스승 이응노를 기리는 제자들의 모임은 현재에도 이어지며 이응노가 유럽에 남긴 족적을 기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온라인 전시는  이응노미술관 공식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전시 작품 상세 설명 등 제공하며

4전시실 영상실에서는 이응노 화백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 <이응노, 그림 같은 아이> 다큐멘터리 공개한다.


작성: 김순기 companion@dalj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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