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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e Dore : 영혼의 화가 귀스타브 도레

  • 청구기호653.26/한18G
  • 저자명한길책박물관 기획; 강성원 글
  • 출판사한길아트
  • 출판년도2012년 6월
  • ISBN9788991636712
  • 가격40,000원

상세정보

19세기 프랑스의 삽화가이자 판화가인 귀스타브 도레의 화집이다. 잡지나 소설에 수록된 그의 그림들은 정밀한 묘사로 기괴하면서 황홀하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삽화분야에 새로운 양식을 부여하였다. 책을 통해 현대 일러스트를 발전시킨 도레의 작품세계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책소개


“도레는 항상 부자들의 예술가이기보다는 

민중의 예술가이기를 원했다. 

그는 목판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방향감각에서 그는 천재적이었다.”

- 에드먼드 올리에


구스타프 도레

Gustave Dore, 1832~83

사회적 현실과 요구를 담은 대중 예술문화가 싹트다

18세기 파리, 현대문화의 징후들은 도시 구석구석, 거리 어디에서든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형성되고 있던 시민사회의 일상문화, 비로소 싹트기 시작한 대중문화이자 좁게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과 요구들을 담은 예술문화가 대두했다. 보들레르는 이것을 ‘현대성의 문화’로 규정했다. 중세문화를 동경하던 낭만주의자나 전원과 목가를 꿈꾸는 시인, 혹은 19세기의 모든 진보적 예술 유파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아 삶과 예술의 미래를 새롭게 전망해보는 것도 이 무렵 문화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변화에 대한 여론과 정보를 전달하고 의견을 나누거나 논평하는 것, 혹은 이를 풍자하거나 즐기고 기록하는 유일한 수단은 당시로서는 인쇄매체뿐이었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장거리 이동과 소통도 편리해지기 시작했지만, 19세기 후반에 사진과 영화 등 새로운 기록매체들이 발명되기 전까지 소통과 기록, 정서적 공감과 오락적 교감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출판매체였다. 인쇄기술이 발전하면서 출판은 점차 훨씬 폭넓은 대상을 확보했다. 지금으로 보면 여전히 매우 한정된 독자층이나, 잡지를 비롯해 대중 언론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내용도 그만큼 대중성을 띠어갔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와 아카데미에 한정되던 필요성을 넘어 여러 가지 목적으로 다양한 책들이 이전보다 자유롭게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출판의 산업화와 대중화에 발맞춰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이 삽화다. 빠른 속도로 독자층을 넓혀나가는 출판과 인쇄문화에 있어 삽화는 대중을 위한 언어요 예술로, 소통의 꽃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종교계의 성상화에 이어 성인 이야기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온 삽화는 기억과 찬미의 교감, 장식을 통한 미디어로 기능했다. 하지만 18~19세기에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혁명, 급변하는 사회상이 뱉어낸 현대적 문화는 삽화의 힘을 입고 속도감 있게 발달했다. 유머와 난센스로 풍자와 비판을 상당부분 떠안고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삽화의 역사는 문자해독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던 문자 기록을 뛰어넘어 기억을 기록하고 재현해온 역사다. 특히 사실적인 관찰, 빠르고 압축적인 재현, 기법, 총체적 의미상징을 위한 메타포 등 삽화의 역사는 유화보다 훨씬 빠르게 본 것을 재현해내는 시각언어였다. 기실 문자와 말을 통하지 않는 시각언어의 메신저였던 셈이다. 18~19세기 출판은 인쇄기술 개발도 개발이려니와 삽화를 활용해 현대성이 요구하는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시각적 유희와 미학, 풍자의 대중적 언어를 창출해낸다.


구스타프 도레가 삽화가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 1829년 파리에서는 프랑스 최초의 삽화신문인 《실루엣》(La Silhouette)이 창간되었다. 이 잡지의 공동창립자이자 삽화가였던 샤를 필리퐁(Charles Philipon)은 《실루엣》을 정치풍자 삽화로 메웠다. 이 신문은 심한 검열 속에서도 정치전선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는 삽화가 장 제라르 그랑빌(Jean Gerard Grandville)을 끌어들였고, 이후 《캐리커처》(La Caricature, 1830)에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의 유명한 석판화들을 실었다. 《실루엣》과 《캐리커처》 《샤리바리》(Le Charivari, 1832) 등은 정치풍자 삽화를 게재한 잡지의 전형으로 1830년대 이후 유럽 문화의 주류와 비주류, 지배문화와 저항문화를 이끌어나갔다. 


인간과 함께해온 역사 이야기를 그리다

구스타프 도레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분쟁에 휘말려 있던 스트라스부르 출신이다. 지역적 특성 때문에 도레의 작품 속에 독일 기질이 흐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틈만 나면 베토벤 음악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석판화와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화가가 되기 위한 정규교육은 한참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전 세계 지도를 그리지 않은 곳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외국 도시와 풍토, 사람 들을 좋아했고 그림을 즐겼다. 여행 전에는 충분히 여행지를 공부하고, 여행 중에는 반복적으로 낯선 곳의 사물과 그 이면을 느낌대로 포착하곤 했다고 전한다.

도레는 아직 배우는 단계에 있던 1847년경에 처음 파리 구경을 했다. 당시 도레는 거리와 사람들을 즐겨 그리며 독학으로 그림 연습을 해왔을 뿐, 삽화가든 화가든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곳에서 동경해 마지않던 샤를 필리퐁의 삽화가게에 들렸고, 필리퐁에게 자기가 그린 삽화를 보여주며 소감을 부탁했다. 이 때 그린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노동〉이었다. 성품이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전하는 필리퐁은 도레의 그림을 성심성의껏 살펴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챘다. 그리고 얼마 후 새로 창간하는 풍자만화지 《Journal Pour Rire》(1848)에 도레의 삽화를 싣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1849년에 저널리스트이자 사진가인 나다르(Nadar Tournachon)가 인수해 더욱 대중적으로 운영하면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재주 많은 도레를 삽화가로 키우기 위해 그랑빌이 도레의 부모에게 오히려 부탁을 하며 몇 번이나 직접 그림 지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레는 이렇게 필리퐁의 잡지에 삽화가로 기고하면서부터 파리에 머물게 되었고, 그러면서 삽화를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파리의 살롱전에도 작품을 출품했을 만큼 화가의 꿈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는 곧 대중을 위해 시민정신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자기의 취향과 본분에 맞다고 판단하면서 삽화에 매진했다. 1854년에는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 작품의 삽화를 맡게 되었고, 비로소 사람들은 도레의 그림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도레가 삽화가로 프랑스와 영국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크림전쟁(1854~56) 때였다. 도레는 조국을 위해 전황과 참화를 국민에게 알리는 삽화잡지 《Musee Franco-Anglaise》를 발간하기로 결심했고, 필리퐁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무렵에 만화로 보는 《러시아의 역사》(1854)도 그렸다. 

도레는 이즈음부터 삽화가로서 해야 할 일, 원대한 꿈이 무엇인지를 찾아냈다. 바로 서사시나 소설, 시에 등장하는 인간과 신, 자연과 운명, 사랑과 투쟁, 공포와 기쁨 등 삶과 역사에 대한 뛰어난 이야기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이 계획을 차례로 실현해갔다. 물론 도레가 이 작업만 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그는 자기만의 양식을 찾기 위해 주변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작업을 해나간 듯하다. 

당시 그가 주로 기고하던 잡지들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사건과 인물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순수 회화 역시 ‘살롱전’이 정통으로 여기는 회화와 함께 라파엘전파에서 바르비종파,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나아가 인상주의에 이르는 변화로 보들레르가 지적한 현대성을 예술에 담아내는 고민들로 시끄러웠다.

도레는 이런 환경 속에서 크게 주저하지 않고 정확히 나아갈 길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만의 방식이 새로운 방법이면 그만이었고, 본래 지니고 있던 예술성과 함께 날카로운 사회의식으로 모든 주제와 소재를 연구, 해석했다. 그의 작업태도나 방법, 혹은 생활로 미루어, 감각적으로 분석한 소묘에 대상의 특징을 분명히 부여할 수 있도록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자연히 되리라고 믿고 밀고나갔던 것 같다.

새로운 유파들의 예술관과 방법에 휩쓸리지 않고 문학적인 서사의 장엄하고 그로테스크한 삽화들을 그리며 유명해진 도레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을 그림에 담아냈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소품이나 역사물, 생활 주변의 다양한 일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노동자, 뱃사람, 농부, 상인, 집시, 거지, 무희, 학생 등도 숱하게 그렸고, 산을 좋아해 직접 다녀본 각국의 산을 그리거나 이국의 거리, 이색적인 사람들 등에도 진지하게 시선을 기울였다. 고급 호화장정본만이 아니라 싸구려 간행물에도 삽화를 그렸다. 그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딘가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아니면 예리한 본능으로 익살스런 지점을 포착해 해학과 풍자를 구현했다. 그의 그림은 다소 어둡고 공포스런 장면일지라도 괴기로 흘러가지 않았고, 싸구려 잡지에 실은 삽화일지라도 해학적인 사회의식이 엿보였다. 

1854년 이후 도레는 『성경』 『천일야화』 『라퐁텐 우화집』,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밀턴의 『실낙원』, 테니슨의 『왕의 목가』 등 여러 대작의 삽화책을 연달아 내놓았다. 그리고 1870년대 이후 후기에는 주로 영국과 스페인에 머물면서 이 지역에 관련되거나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보불전쟁,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파리 코뮌의 성립과 붕괴 등 정치적 혼란기의 역동적인 상황을 스케치한 『수수께끼』(The Enigma, 1871)와 런던에서 작업한 『런던: 순례여행』(1872)도 이 무렵 제작되었다. 도레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지는 『런던: 순례여행』에는 인간 본연의 문제 속에 도레의 날카로운 인문학적 소양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 스페인 여행전문가인 친구와 동행하며 『스페인 여행 포트폴리오』(1874)도 펴냈다. 광활한 스페인을 섬세하고도 변화무쌍하게 그려낸 작업이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늙은 선원의 노래』(1876), 『십자군 전쟁사』(1877), 이탈리아 시인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1879),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 삽화도 이어졌다.

도레의 삽화들은 거의 전부 커다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명실공히 도레는 당대에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삽화가였다. 그의 이름을 붙인 화랑과 살롱도 소유했을 만큼 명성을 얻었다. 도레는 200여 권의 삽화책과 수천 점에 이르는 단편 삽화를 그리면서 쉬지 않고 작업했다. 유화와 조각 작업도 100여 점가량 남겼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황홀하게, 드라마틱한 장면 연출의 대가

도레가 이렇게 엄청난 양의 유화를 그릴 수 있었던 데는 1860년대에 일렉트로타이프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종의 공장식 제작이 가능했다는 점이 한몫했다. 그리고 도레 드로잉의 특성을 제대로 판각할 줄 아는 전문가들을 훈련시켜 이들과 평생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도레의 삽화에는 이들의 서명도 함께 들어 있다.

도레는 우선 단단한 붓으로 목판에 인디안 잉크를 칠한 다음 그 위에 불투명한 흰색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방법은 목판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는 비난도 받았으나, 인디안 잉크 효과는 바위의 음영과 숲 그림자, 폭풍과 분노 표현 등에 강렬한 효과를 불어넣는 새로운 기법이었다. 이 기법은 종종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하고, 때로는 삼류 모방자가 통속적 트릭으로 사용하는 기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도레는 줄담배를 피우며 밤늦게까지 일하고 불규칙적 생활을 하면서도 독신으로 살면서 많은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무언가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면서 저녁마다 유쾌하게 토론을 즐겼고, 커피와 시가 향이 살롱을 뒤덮는 도시 생활을 사랑하는 한편 지독하게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런던 순례를 함께한 블랜차드 제라르(Gerard Blanchard)는 그 시대에 가장 주목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도레를 꼽으며 그를 ‘영혼의 사진가’라 불렀고, 도레는 기억에 남은 혼잡스런 장면들 가운데 소소한 디테일 몇 가지만으로도 오브제의 힘을 끌어낸다고 평가했다. 이런 능력은 밤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살롱 문화와도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한다. 

도레 삽화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정확한 소묘력에 있다. 그는 정밀묘사를 위해 철저하게 대상을 사전 연구했다. 학문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자기 목적에 맞춰 대상을 충실하게 활용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메타포나 변용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문맥 활용과 소재 대체의 정확도를 위한 자료 연구였고 볼 수 있다. 자료 활용에 대한 치밀한 계산으로 그는 종합적인 구성과 극적인 장면 연출의 대가가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인물들은 표정과 분위기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장면 선택 역시 탁월하다. 풍자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섬뜩하다.


작품의 특징은 성장 환경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도레가 어린 시절 살던 곳은 라인 계곡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고딕 성당과 공공건물 들이 늘어서 경관이 매우 뛰어났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역사와 함께한 문화적 환경은 도레의 상상력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때로는 광대하고 거칠게,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하게, 하지만 또 때로는 황홀하고 로맨틱하게, 아름답고 유머러스하게 사물을 들여다보고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길러준 것이다. 

도레의 감수성과 예술성은 동시대 여러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 고흐는 도레의 삽화를 매우 좋아해 『런던: 순례여행』을 동생 테오에게 추천했다. 그는 도레 삽화를 수집하면서 『런던: 순례여행』에 나오는 감옥 안마당 삽화를 모티프로 〈죄수들의 보행〉을 그리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도레를 렘브란트와 비교하기도 한다. 서양미술사의 굵직한 유파에 속해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서사 삽화의 최고봉에 올라 현대 일러스트 역사에 정점을 찍은 흔들리지 않는 위상을 차지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구스타브 도레는 매우 독특한 스타일로 삽화에 새로운 양식을 부여했고, 대중의 새로운 취향에 맞추기도 하고 또 대중을 이끌기도 하면서 현대 일러스트를 발전시킨 위대한 예술가다. 




지은이 | 한길책박물관 기획; 강성원 글

*



목차


1. 『성서』 La Sagrada Biblia

2. 존 밀턴의 『실낙원』 El Paraiso Perdido

3. 호세 소리야의 전설 모음집 『산울림』 Ecos de Las Montanas

4. 알프레드 테니슨의 『왕의 목가』 Idylls of the King

5. 『스케치 모음집: 유머러스-그로테스크』 Two Hundred Sketches: humorus&grotesque

6.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La Divina Commedia

7. 『라퐁텐 우화』 Fables de La Fontaine

8.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Don Quichotte

9. 『런던: 순례여행』 London: A Pilgimage

10. 새뮤얼 콜리지의 『늙은 선원의 노래』 Der Alte Matrose von Coleridge

11.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o Furioso

12. 『도레 갤러리: 250개의 아름다운 도레 작품들』 Casell’s Dor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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