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확고하게 누적된 연구의 토대 위에서, 관점과 관심에 변화를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 저자들은 기존의 양식사 연구에서 간과된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회화사를 다시 보고자 했다. 그 시작으로 겸재 정선•표암 강세황•호생관 최북•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추사 김정희•오원 장승업 7인의 작가가 어떻게 ‘대가’가 되는지, 명작과 위작의 문제까지 각 연구자가 주제를 잡고 조사를 공유하며 연구와 발표를 거쳐 시대순으로 묶었다. 이를 통해 ‘근현대기 서구 지향적, 근대 지향적,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과거를 어떻게 흔들어 놓았는지 읽을 수 있게 한다. 이 저술은 한국회화사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내면부터 짚어보고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걸음이 되어준다. 그래서 이들의 용기는 한국회화사를 재 집필할 후학에 대한 격려이다.
책소개
명화와 대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정선, 강세황, 최북,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장승업, 그리고 위작의 세계
한국회화사의 ‘명화’와 ‘대가’, 그 ‘만들어진 전통’ 다시 보기
정선, 김홍도, 김정희, 신윤복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이에 더해 강세황, 최북, 장승업이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회화사, 아니 한국회화사에 한 획을, 그것도 아주 굵직하게 그은 대가와 명화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간 한국회화사 연구자들은 안휘준의 『한국회화사』(1980)에서 배운 대로 대부분 양식사에 기반한 미술사학의 초기 방법론과 시대구분론에 연구의 근본을 두었다. 하지만 서구 학계에서는 관점과 관심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미술사 방법론이 등장했다. 작품 내용은 물론 사회경제적·정치적·문화적 배경, 의례, 여성 등 작품을 둘러싼 문화와 사유방식에 다각도로 밀착하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에 이 책의 글쓴이들은 회화사 연구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기존의 양식사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회화사를 볼 필요가 있다며 의기투합했다.
‘동아시아 회화사 연구1’로 출간된 이 책은 한국회화사를 공부하는 7인의 연구자들의 의욕이 낳은 첫 결실이다. 글쓴이들은 달항아리, 석굴암,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 유명한 작품과 화가의 명성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다며, 서구의 연구방법론을 적용하기에 앞서 한국회화사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내면부터 짚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서구적 근대화의 추구와 민족주의의 의지를 안고 만들어진 우리 역사 속에 그림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 작가는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7인이고, 명작 못지않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위작(僞作)의 세계를 함께 조명하여 연구의 의의를 더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작가’가 어떻게 ‘대가’가 되는가를 추적한 성과이다. 작가가 예술세계를 구축하면서 대가의 지위를 부여받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창조적 역량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창조적 역량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가치를 평가받아야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창작 활동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작가의 명성을 구축하는 데에는 여타의 요인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자기 작품을 객관화하여 설명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작가를 대신해 의미를 부여할 비평가, 작가가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지원을 해줄 후원자, 전시를 통해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기획자 등은 작가의 명성과 위상을 높이는 대표적인 조력자이다.”(199쪽)
지은이들은 각 작가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역사를 조명함으로써 한 작가가 어떻게 대가가 되는가를 톺아본다. 특히 작가들이 생전에 예술가로서 무엇을 하였으며, 사후에 누가 왜 그들을 추숭했는지를 통시적으로 살핀다. 연구는 쉽지 않았다. 앞선 연구에 딴죽을 건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한국회회사의 척추를 잇고 있는 명화와 대가들의 정체를 진단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한국미술계의 스승과 선배의 논고를 근본부터 검토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7쪽) 연구자들은 2년의 시간을 함께하며 2019년 12월에는 학술대회(‘명화의 발견, 대가의 탄생’)를 가졌고, 이번에 그것을 일반인과 공유할 수 있게 수정 보완했다. 그 결과, “독자들은 아주 쉽게 근현대기 서구 지향적, 근대 지향적,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과거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는 점을 알게” 되고, “과거를 기억하는 현재의 한계, 과거를 미화하려는 다각적 욕망의 속성에 대하여 성찰하게”(12쪽) 된다.
각 글 뒤에는 글쓴이의 ‘후기’를 더했다. 지극히 사적인 진술로, 해당 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회화사는 거듭 다시 집필되어야 한다!”
발견된 그림, 정선의 진경산수화
고연희의 「정선, 명성의 부상과 근거」에서는 그간 정선(鄭敾)의 세간의 평가에 대한 위상이 높아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정선의 산수화는 정치적으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화사적으로는 근대화를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발견된 그림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린 정선은 금강산의 장면을 그린 화첩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진경은 빼앗긴 국토의 사생(근대적 스케치)으로 의미화된 민족적·근대적 가치였다. 이후 정선은 미술사학자 최완수의 노력으로 1980년대를 거치며 학계에서 ‘조선중화사상’이라는 자주성의 현현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화성(畫聖)’으로 일컬어지기에 이른다. 정선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진경의 화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민족주의적 연구자 오세창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고연희는 18세기의 진경은 국토를 사생한 것이 아니었고, 정선의 후원자인 18세기 학자들은 조선중화사상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당시 정선은 화성으로 불린 적도 없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선의 평가는 근대적·현대적 산물이라며, 정선은 살아생전 윤두서, 강세황, 심사정보다 저평가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때 남인계 학자들은 정선의 산수화에 별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학습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회화 및 그림실력에 가치를 부여하며 동시대의 윤두서를 가장 뛰어난 화가로 평가하였다. 정선보다 한 세대 뒤에는 심사정(沈師正, 1707~69)과 강세황(姜世晃, 1713~91)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이들과 정선을 비교하곤 하였다. 심사정은 정선에게 그림을 배우고 또 금강산도 그렸지만 문학적 내용과 중국풍의 그림을 많이 그렸고, 강세황은 정선이 ‘진경(眞景)’을 잘 그렸다는 화제를 남겼지만, ……정선을 비평했다.”(24쪽)
“조선시대의 화가 정선이 우리 산천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은 그 시절 유람을 즐긴 일부 문인들이 즐겨 감상한 그림이었지만, 지금은 한국회화사에서 진경산수화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는 문화유산이 되어 그 자리가 우뚝하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살펴보면 18세기의 정선은 유람산수의 기이한 경치를 잘 표현하여 칭송되었다. 실재하는 산수경, 즉 ‘진경’을 대상으로 그렸다는 특성이 언급되었으나 정선의 급한 필치에 대한 우려가 한편 지속되면서 윤두서·심사정·강세황보다 저평가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김정희 등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현대기에 이르기까지 정선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48쪽)
겸재 정선을 압도한 18세기 문인화가 강세황
강세황(姜世晃) 하면 개성을 비롯해 그 부근의 명승지를 그린 『송도기행첩』이나 자화상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당대에 강세황은 실경산수나 초상화, 인물화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강세황의 평가에 대한 오늘날과 동시대의 시각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시서화 삼절에서 예원의 총수로」에서 글쓴이 이경화는 강세황의 화가 이미지가 구축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여러 사회문화적・정치경제적 요소 중에 화가와 사회를 직접 연결해 주는 수응(酬應)이라는 행위에 주목했다. 수응은 주위의 요청에 응하여 서화를 제작하는 행위를 말한다. 강세황은 사대부로서 그림에 능한 자신의 모습에 갈등하였고, 그에게 묵죽화를 요청한 이들에게 가장 문인다운 그림인 묵죽화로서 수응한 조선의 사대부 화가였다. 20세기 초 강세황은 대중에게 화가보다는 서예가로 기억되며 근대 미술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문인화와 문인화에 대한 외면이 가져온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런데 1970년대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강표암(姜豹菴)’이라는 3쪽짜리 논고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과 『정춘루첩』을 소개하면서 강세황은 혁신적 화가로 그간의 평가에 반전을 보인다. 이 두 화첩에서 보이는 원근법과 그러데이션 기법은 전통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법으로서, 서양화의 시점과 표현 방식을 빌려와 산수화에 적용한 기법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강세황은 바로 서양화풍 수용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송도기행첩』에서 개성 시가의 전경을 한 폭에 포착하기 위하여 사용된 원근법, 영통사(靈通寺) 입구의 바위의 독특한 양감을 표현한 그러데이션 기법은 이전의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화법으로서 서양화의 시점과 표현 방식을 빌려와 산수화에 적용한 것이었다. 근래에 강세황이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서양화풍 수용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였다. 최순우는 이 화첩의 발견을 계기로 강세황이 서양화법의 ‘혁신적인 표현법을 정립’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86쪽)
기인으로 유명세를 떨친 최북
당연하게도 미술사학자와 국문학자의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은 다르게 마련이다. 일례로 미술사학자는 화가의 삶을 고증하기 위해서, 생몰년을 비롯해 교유관계를 추적하는 용도로 사료를 이용하는 반면, 국문학자는 문헌 속에 등장하는 한 개인의 기인적 삶을 그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당대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인 화가로 알려진 최북(崔北)이 재조명받기에 이른다. 「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에서 글쓴이 유재빈은 기인 예술가로 기억되는 최북의 예술가상을 그리고 있다.
최북은 살아생전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행보다는 회화적 역량으로 평가받은 화가였다. 최북의 후원자라고 할 만한 성호 이익은 안산 시절 최북의 회화를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하고 고아한 작품을 그린 화가로 그의 화업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 남공철의 「최칠칠전」과 조희룡의 「최북전」 등에서 최북을 일탈적 행위의 예술가로 묘사하면서 그를 기인 화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문학작품 속의 행동거지가 역사기록처럼 후대에 인용되면서, 최북에게 세상을 조롱하고 호탕하게 바라본 기행적이고 낭만적인 화가상이 덧씌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최북을 술꾼이라고도 하고 환쟁이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그를 가리켜 미친놈(狂生)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때때로 묘한 깨달음을 주거나 쓸 만한 것도 있었으니 위와 같은 것이 그렇다. 이(단)전은, 최북이 『서상기(西廂記)』나 『수호전(水滸傳)』 등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지은 시도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읊조릴 만했지만 그것을 감춰두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고 했다. 최북은 서울의 여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124쪽)
‘국민화가’ 김홍도
김홍도(金弘道)는 살아생전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서의 마땅한 지위를 누린 만큼 탁월한 그림솜씨는 물론이고 도화서 화원으로서 최고의 광영을 누렸다. 「‘풍속화가 김홍도’를 욕망하다」에서 글쓴이 김소연은 김홍도를 풍속화가의 대가로 인정하고, 그의 풍속화를 근대적·사실적·혁명적 사유의 그림으로 해석한 근대의 인식 과정을 추적하였다. 김홍도가 생전에 이룬 작품 제작의 양상을 비롯해 그에 대한 조선 후기의 평가를 미루어보아 김홍도의 정체성을 풍속화에만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 과거의 기록과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로 보아 김홍도는 풍속화는 물론이고 진경산수, 도석인물화, 화조영모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에서 최고의 작품을 남겼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술사학계에서는 김홍도를 근대적 인간상으로 평가하고 “가장 한국적인 화풍을 풍속화 부분에서 창출한” 기여자로 강조함으로써 그 흐름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된 부분이 김홍도의 풍속화만큼이나 김홍도의 신선도에 대한 평가가 다변하다는 점이다. 20세기 초까지 칭송하던 김홍도의 신선도는, 풍속화를 욕망하는 근대의 안목에서 ‘헛’된 것으로 비난받았다.
조선 미인도의 전형, 신윤복의 「미인도」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는 현전하는 미인도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견 시기도 다른 미인도보다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윤복 「미인도」의 부상」에서 글쓴이 김지혜는 오늘날 조선을 대표하는 명화이자 조선의 여인상을 대표하는, 조선의 최고 미인을 담은 미인도로 인정받는 신윤복 「미인도」의 공개에서부터 오늘날 대중적인 인기와 명화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논하고 있다. 「미인도」 작품 한 점에 대한 관련 사료를 통하여, 신윤복 「미인도」의 부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시대적 가치관과 미감의 변화도 함께 다루고 있다.
「미인도」는 1957년을 전후하여 워싱턴 등지에서의 해외 전시를 통해 한국의 명화로 위상을 갖게 된 이후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회화사에 편입되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먼저 소개된 것이다. 글쓴이는 1957년 이전까지 「미인도」를 공개하기에 쉽지 않았던 이유를 화가 신윤복에 대한 평가의 변화와 미인도라는 화제가 가진 특수성 속에서 살펴보았다. 「미인도」는 오래도록 남성만의 공간인 문방(文房)이나 사랑방의 감상물로 여겨졌다가 현대에 들어와 대중적 공간에 걸렸고, 그림 속 기녀라는 신분은 한국의 미인으로 격상되었다. 이는 신윤복을 대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조선의 소동파’ 김정희
추운 겨울에도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는 얼지 않았으며 밤에도 빛났다고 한다. 과연 신필이라는 말이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누가 김정희를 만들었는가」에서 글쓴이 김수진은 김정희가 한 작가에서 한국서화사의 태산준령(泰山峻嶺) 같은 대가로 평가받기까지 자신의 창조적 역량 외에 어떤 외부 요인이 작동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외부 요인이란 비평가, 후원자, 기획자, 조력자 등이 되겠다.
김정희에게 작품을 구한 이들은 누구였나, 제주 유배 시절 신간서적을 구해준 이들은 누구였나, ‘추사체’라는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위리안치에 처한 죄인이 어떻게 국왕의 주문에 응할 수 있었나, 제자 허련(許鍊)은 어떤 방식으로 스승의 브랜드를 팔았나, 김정희는 어떻게 ‘조선의 소동파’로 이미지메이킹을 할 수 있었나, 현대 미술 경매시장에서 김정희 작품의 위상은 어떠한가 등에 이르기까지, 대가가 탄생하고 신화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균형 있는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예술가의 애주와 기행은 무죄, 장승업
장승업(張承業)은 글도 몰랐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록 또한 별로 없다. 하지만 서화 창작에서 문자를 읽고 씀에 자유롭지 못한 장승업이지만 그의 화맥이 안중식, 조석진에게로 이어짐에 따라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오원 장승업, 흥행에 이르는 길」에서 글쓴이 김소연은 장승업의 뜬구름 같은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대가 장승업의 명성은 존재하되 그의 작품이 명작으로서 위치가 모호하다면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에서 시작한다.
장승업은 산수, 화조, 영모, 인물, 기명절지까지 모든 장르에 뛰어난 화가이자, 흔히 조선의 3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후 장지연, 최남선, 오세창, 김용준 등이 한국회화사에서의 장승업의 위상을 기술하면서, 특히 오세창의 안목으로 만들어진 간송미술관의 컬렉션과 특별전이 이어지면서 대가의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장승업은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 중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한 점도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에 걸맞은 근현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아직까지 화명(畵名)을 호색(好色), 호주(好酒)로 특징지은 영화 「취화선(醉畵仙)」(2002)의 이미지로 장승업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명작과 위작의 차이
「조선 후기 서화시장을 통해 본 명작(名作)의 탄생과 위작(僞作)의 유통」에서 글쓴이 서윤정은 명작의 대칭적 위치에 존재하는 거대한 문제, ‘위작’을 다루고 있다. 명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위작은 누가 제작하는 것인가? 명작의 정의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명작이 탄생하고 그 명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회문화적 이유와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심미적 철학적 기준이 복잡다단하게 작용한다.
글쓴이는 명작의 조건과 의미, 위작의 제작과 유통, 서화애조 풍조와 수장, 감식활동이 활발했던 18세기 조선 후기의 서화시장을 통해 중국 명작들이 유통되고 기록된 상황 속에 군림했던 위작, 위작이지만 상당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경우 등 다양한 예를 제시하면서, 명작 못지않은 위작의 존재감을 제시하고 있다.
지은이, 엮은이 | 고연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서 겸재 정선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뒤, 같은 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영모화초화의 정치적 성격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영모화초화를 주제로 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한국문학과 회화를 함께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민족문화연구원(고려대), 한국문화연구원(이화여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서울대) 연구교수, 시카고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전과 경영』 『조선시대 산수화』 『그림, 문학에 취하다』 『화상찬으로 읽는 사대부의 초상화』 등이 있다.
지은이 | 이경화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강세황의 자화상과 회화를 통한 자기표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의 문인화·초상화·실경산수화 등을 공부해 왔으며 근대기 우리 미술에 발생한 다양한 변화를 폭넓은 시각으로 관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논문으로 「太平宰相의 초상채제공 초상화의 제작과 함의에 관한 재고」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과 경성제국대학 진열관」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이 | 유재빈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정조대 궁중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18세기 도산서원의 회화적 구현과 그 의미」 「정조대 왕위계승의 상징적 재현」 「건륭제의 다보격과 궁중회화」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소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를 지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한국회화사와 한국근대미술사를 지도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근대문화재 분과)으로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동아시아의 궁중미술』(공저), 「한국 근대기 미술 유학을 통한 ‘동양화’의 추구: 채색화단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여성의 서화교육과 작가활동 연구」 「해강 김규진 묵죽화와 『해강죽보(海岡竹譜)』 연구」 등이 있으며, 한국 근대미술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이 | 김지혜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자료관 학예사로 근무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에서 문화예술사와 한국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시각 이미지에 관심을 갖고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근대 미인 담론과 이미지」 「미스 조선, 근대기 미인 대회와 미인 이미지」 「근대 광고 이미지에 나타난 주부의 표상」 『모던 경성의 시각문화와 일상』(공저)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수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초빙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충남대, 서울시립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를 해왔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로 외국인 학생들에게 동아시아의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에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공저)와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해외의 민화컬렉션’을 『월간 민화』에 연재 중이다.
지은이 | 서윤정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에서 조선시대 궁중회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 동대학교 및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동아시아의 시각문화와 미술사를 가르쳤다.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로 있으며, 조선 후기 궁중회화와 동아시아 관점에서 본 한국회화와 물질문화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조선 후기 외교 선물로 전해진 청과 서양의 예술과 물질문화: 정조대 후기 사행을 중심으로」(2019)와 “A New Way of Seeing: Commercial Paintings and Prints from China and European Painting Techniques in Late Chosŏn Court Painting”(2019)이 있으며, 공저로 A Companion to Korean Art(2020) 등이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으로 “The Art of Diplomacy: Material Culture and the Practice of Gift Exchanges in East Asi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목차
머리글
1. 정선, 명성(名聲)의 부상과 근거 -고연희
사랑방 감상물에서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진경산수화’의 발견
조선시대, 엇갈리던 평가 혹은 비난
근대기, ‘진경(眞景)’을 택한 민족화가와 사생(寫生)으로 그린 근대화가
현대기, 정선은 자주의식의 으뜸 화가
‘진경’이 무엇이길래?: 근거 검토 1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을 그렸다?: 근거 검토 2
정선은 ‘화성(畫聖)’이다?: 근거 검토 3
가상(假想)과 역사
2. 시서화 삼절에서 예원의 총수로
―수응과 담론으로 본 강세황의 화가상 형성과 변화의 역사-이경화
오늘날과 다른 평가를 받았던 화가
시서화 삼절의 명성과 「표옹자지(豹翁自誌)」의 아마추어 화가
강세황의 회화 수응과 묵죽화
회화 수응과 사회적 명망의 상호관계
18세기 예원의 총수
미완성의 화가상
3. 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유재빈
최북, 시대에 따른 화가상의 변화를 추적하다
최북, 재능과 일복을 타고난 화가
최북 사후, 기인 전기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하다
근대기의 최북, 그림보다 기행으로 기억되다
최북, 기록의 빈자리를 상상력으로 메우다
4. ‘풍속화가 김홍도’를 욕망하다-김소연
김홍도는 어떤 화가일까
못 그리는 그림이 없는 최고의 화가
근대기 ‘조선적인 것’의 프로젝트와 김홍도
근대적·사실적·혁명적 그림으로서의 풍속화
상반된 가치, 헛된 그림 신선도
‘풍속화가 김홍도’를 향한 시대적 열망
5. 신윤복, 「미인도」의 부상-김지혜
신윤복의 「미인도」, 대중에 처음 선보이다
「미인도」에 대한 기록의 부재
신윤복, 무명의 화가에서 풍속화의 거장으로
「미인도」, 신윤복의 대표작이 되다
미인도 감상의 역사, 문방의 미인도에서 전람회의 미인화로
「미인도」,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해외에 전시되다
국내 전시를 통한 「미인도」의 명작화
미인의 신원, 기녀에서 미인으로
조선 미인도의 전형이 되다
명작의 명작화, 신윤복 「미인도」의 대중성
6. 누가 김정희를 만들었는가
―김정희 명성 형성의 역사-김수진
김정희에 대한 세간의 평가
‘작가(作家)’에서 ‘대가(大家)’가 되기까지
김정희에게 작품을 구한 이들은 누구였나
김정희 유배기의 서화 수응과 중인 거간(居間)
김정희 작품의 유전(流傳)과 해배(解配)
김정희 초상과 소동파(蘇東坡) 이미지
김정희 사후 허련의 추숭 활동
김정희 전시의 역사
김정희 시장의 형성
대가의 탄생과 신화화
7. 오원 장승업, 흥행에 이르는 길-김소연
뜬구름 같은 삶의 흔적을 더듬다
장승업 신화의 서막을 열다
근대기 최고 감식안 오세창과의 인연
김용준의 장승업론: 예술가의 애주와 기행은 무죄
인민적 격앙의 시대가 낳은 반항정신을 읽다
중국 냄새 나는 그림에 대한 시선
대가와 명작의 상관관계
8. 조선 후기 서화시장을 통해 본 명작(名作)의 탄생과 위작(僞作)의 유통-서윤정
명작과 위작의 탄생
명작, 그림을 평하고 내력을 논하다.
위작은 누가 어떻게 만들까
화보와 화론서: 명작의 교과서, 위작의 지침서
조선 후기 서화 감식론의 선구자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조선 후기 서화 감식론의 새로운 지평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위작
조선에 전해진 중국의 가짜그림
명작과 위작의 관계
위작, 상상과 가정(假定)의 역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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