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실재에 대한 현대인의 경험은 어떻게 이뤄지고 작동하는가. 그것은 직접경험보다는 간접경험에 가깝다. 실재를 직접 대면하는 대신 이미지를 매개로 실재를 추상하는 식의 프로세스를 거친다. 이미지가 현대인의 인식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결정짓는 것.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미지 밖에서 현대인은 아무것도 인식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이미지를 근거로 실재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엄밀하게는 실재를 경험하고 인식한다기보다는 추상하는 것이다. 추상적 실재가 경험적 실재를 대체한 것인데, 이런 대체경험은 지금과 같은 이미지의 시대에, 인터넷의 시대에, 가상현실의 시대에 뚜렷한 시대적 징후로 자리하고 있고 그 자체 엄연한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한 것이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다. 이미지는 실재를 재현한 것이고, 알다시피 재현은 다만 정도와 양상에 차이가 있을 뿐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노출돼 있다. 재현은 이미 일정정도의 자의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있는 것.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며 객관적 재현은 논리적으론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완전한 인식구조에 관성적 인식이 보태어져서 다만 부분적으로 인식한 것을 근거로 전체를 추상하는 식이다. 실제로는 짜 맞추는 식이다.
홍순명의 사이드스케이프는 불완전한(?) 이미지를 매개로 바로 이런 부분인식과 파편화된 인식, 실재를 추상하는 인식과 짜 맞추는 인식을 문제 삼는다. 사이드스케이프란 옆으로 비켜 선 풍경, 풍경 밖에서 본 풍경이 아닌가. 풍경에 대한 태도의 관성을, 이미지를 읽는 인식의 관성을 문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에 떠도는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이미지들을 발췌하는데, 그것도 부분적으로 발췌한다. 불완전한 이미지란 바로 이렇듯 부분 발췌된 이미지란 말이다. 그렇게 부분 발췌된 이미지는 원본에서의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성질을 휘발시켜 불완전하고 익명적인 그리고 오리무중의 성분으로 변질시킨다.
이렇게 그려진(재현된?) 그림은 도무지 뭘 그린 것이지, 실재하는 무엇을 재현이라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먹구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한줄기 빛이 투과되는 꽤나 낭만적인 풍경이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원폭현장으로 드러나는 식이다. 그러나 그 풍경이 원폭 현장임이 밝혀지고 드러나는 것은 작가가 미처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나머지 그림이 복원되어져야 전체적인 인식이며 완전한 인식도 덩달아 복원될 수가 있을 터이다. 마찬가지로 두건을 쓰고 있는 사람을 그린 오리무중의 기호가 알고 보니 이라크 포로수용소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폭력과 린치라고 하는 정치적 현실을 사후적으로 드러내는 식이다. 꼭 그런 식이다. 진실은 이미지의 표면에 드러나 있지가 않다. 이미지 속에 꼭꼭 숨겨져 있다. 이미지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지는 진실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숨기기 위한 장치이며, 더 잘 숨기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를 일이다.
더불어 풍경을 얼굴로 대체한 일련의 프로젝트 <꿈꿀 권리>에서 작가는 아이들이 직접 그린 자기 얼굴 그림과 아이의 얼굴 사진을 하나로 중첩시켜 보여주는데, 이 작업 역시 실재와 꿈, 실재와 욕망, 실재와 이미지와의 차이를, 불일치와 불협화를 증언한다. 그렇게 작가의 사이드스케이프는 이미지 정치학을 예시해준다.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