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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비평〕2012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 자연과 나누는 소리

김성호

〔전시비평〕

2012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9. 25~11. 30 공주 쌍신생태공원, 금강자연미술센터


자연과 나누는 소리


김성호(미술평론가)





올해 5회를 맞이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총감독 윤진섭)가 새롭게 단장했다.


먼저 행사장소가 바뀌었다. 꼬불꼬불한 산비탈을 달라붙는 하루살이들을 연신 쫒아내면서 땀 흘리며 올라가곤 했던 연미산자연미술공원에서는 올해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이곳에는 2010년까지의 출품작들만 남겨져 있다. 올해 비엔날레는 어디로 갔는가? 금강이 훤히 보이는 드넓은 쌍신생태공원으로 이동했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이제 좀 쉽고 편하게 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다. 단지 2010년부터 모색한 새로운 전시 공간 탐색의 끝에 만난 행운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것은 고마울 때도 있는 MB정권의 4대강 사업 덕이었다. 한창 작품 설치 기간 중 ‘금강 둔치 어디’라는 이름 없던 이곳이 쌍신생태공원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면서 주차장이며 자갈길이며 여러모로 행사의 편의 차원에서 비엔날레측이 운 좋게 덕을 본 것이다. 어찌 보면, 2010년 이래 금강과 보다 더 가까워짐으로써 비엔날레 이름에 걸맞은 위상을 찾은 셈이다.


달라진 환경만큼 참여 작가들은 이전 행사 때보다 다른 차원의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고, 관객들은 보다 더 편안하게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 작품은 더 커지거나 스펙터클해졌고, 관객들은 기념 인증 샷을 위해 작품을 배경으로 드넓은 원경을 카메라 렌즈 안에 멋지게 넣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하나의 딜레마이다. 향후 행사가 대면할 좋은/나쁜 환경을 동시에 열어둔 셈이기 때문이다.


피터 알패(Peter Alpar), 헝가리, 언덕(Hill)


테네올 티에리(Teneul Thierry), 프랑스, 회오리(Twirl)





소리를 돌려 드릴게요.

행사의 주관자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는 “자연의 품에 몸을 던지자”라는 야투(野投)의 슬로건답지 않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원에서의 행사를 밀어붙였을까?


올해 전시 주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소리(Nature, Human being & Sound)’는 변화된 상황에서의 이번 비엔날레의 미래적 비전을 예측해볼 수 있는 유효한 아포리즘(aphorism)이다. 이 주제는 생명이 있는 곳에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생명은 필연적으로 소리를 동반한다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언명을 되살린다. 전시의 키워드 ‘소리’는 생명체로서의 자연이 또 다른 생명체인 인간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이며, 인간이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화답이다. 자연의 소리란 “우리의 모습이 이러할진대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라는 점잖은 질문일 테고, 아마도 인간의 소리란 연신 눌러대던 자동차 클랙슨, 돌리던 세탁기, 클릭을 반복하던 마우스 등 온갖 연장 소리와 기계적 소음을 멈추고 “당신은 우리의 원초적 고향... 그래서 우리는...”라며 말을 흐리는 미완성의 피드백일 것이다. 자연에 화답하는 미술의 언어에는 명백한 답이 없다. 그저 자연의 점잖은 질문에 화답하는 자연미술가들의 저마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들은 자연과 끝없이 교감하려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연과의 쌍방형 커뮤니케이션에 초대받은 작가는 총 13개국 44인이며 이중 야외전 참여 작가는 27인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다’는 소주제 아래 펼쳐진 야외전에서 작가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자연의 질문에 화답한다.


마리아 둔다코바(Maria Dundakova, 스위스)의 작품 ‘바람의 노랫길’은 금강을 바라보는 둔치에 기둥처럼 마주 서 있는 두 개의 암석 덩어리이다. 이것들은 마치 인간의 갈비뼈 같은 형상으로 깊게 파인 홈들을 상흔처럼 몸에 갖고 있다. 금강의 바람이 홈이 파인 그들의 가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처량하고 우울한 소리를 낸다. 외롭다고! 관객이 그것에 화답하듯 바닥에 흩뿌려진 돌조각을 들어 그들의 갈비뼈를 쓸어내리자 암석 덩어리가 자신의 몸통을 울리며 청량한 소리로 화답한다. 고맙다고! 고승연(한국)의 작품 ‘백년의 소리-비단내 가야금’ 또한 둔다코바의 작품처럼 몸체에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는 악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수십 년의 세월을 지닌 고사목(枯死木)을 울림통으로 삼고 있는 가야금이다. 바람이 가야금의 줄을 건드리며 짧은 울음소리를 낸다. 외롭다고! 관객이 그것에 화답하듯 가야금 줄을 연주하듯이 튕겨본다. 그러자 고목이 온몸을 울리는 청명한 하모니로 소리를 되돌려준다. 고맙다고!


마리아 둔다코바(Maria Dundakova),스위스/불가리아, 바람의 노랫길(The Wind Song Way)

 

고승연(Ko, Seung-Hyun), 한국, 백년의 소리-비단내 가야금(The sound of hundred years-Bidannae Kayageum)


한편, 자연으로부터 기원하는 실제의 소리가 아닌 자연에 관한 관념의 소리를 들려주는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린덴바우어 알로이스(Lindenbauer Alois Leopold, 오스트리아)의 ‘성장하는 배’는 둔치에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나룻배 형상의 작품이다. 그는 관객들이 그 위에 올라 몸을 누이고 자연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길 원한다. 둔치의 풀이 자라는 소리 혹은 해가 저무는 소리를 말이다. 도로나우프 모리츠(Dornauf Moritz, 독일)의 작품 ‘듣기’는 제목과 달리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땅 속 깊이 관을 박아 놓은 그곳으로부터 관객들이 귀가 아닌 마음으로 대지의 소리를 듣기를 그가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르나우프 모리츠(Dornauf Moritz)독일듣기(Listening)


자연의 메시지에 대한 작가들의 화답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로저 리고스(Roger Rigorth, 독일)는 바람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바람개비를 수면 위에 띄어놓았다. 그들의 소리 없는 날갯짓이 화답인 셈이다. 이응우(한국)는 교각 밑에 우리의 전통 민요 아리랑을 시각적 조형언어로 환원시킨 동그란 도상들을 음표처럼 매달아놓았다. 양자 모두 자연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소리 없는 시각적 연주를 선택한 것이다.


로저 리고스(Roger Rigorth)독일금강의 날개(Geumgang wings)


이응우(Ri, Eung-Woo)한국아리랑(Arirang/ Korean traditional folksong)


그런 면에서 토마스 마이(Thomas May,독일)의 작품 ‘다섯 명을 위한 정원’이나, 허버트 파커(Herbert V. Parker, 미국)의 작품 ‘금강의 대화’는 자연 속에 구축한 건축적 환경에 관객들을 초대하고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마당을 제공한다. 전자는 다섯 사람의 얼굴이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공중에 매달아놓은 인공 정원을 통해서, 후자는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자그마한 대나무 집을 통해서,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요청한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소통의 장에서 무슨 이야기든지 서로 나눠보라고 말이다.


허버트 V. 파커(Herbert V. Parker)미국금강의 대화(Geumgang Dialogue)


자연의 잠재적 소리들을 현실화하든, 그것들을 자연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내면화시키든,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요청하든지 간에, 자연의 소리(메시지)에 응대하는 이번 비엔날레의 참여 작가들의 다양한 화답 방식에는 특유의 공유지점이 존재한다. 자연(自然)에 관한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모든 상태’라는 의미 안으로 자연미술을 국한시키지 않겠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 멀리 떠난 원시림이 더 이상 아니듯, 자연미술 역시 ‘인간의 최소한의 개입’만을 용인하는 오래된 자연미학의 틀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심도 깊은 연구와 치열한 토론을 거쳐 자연미술의 이론과 실천을 모색해왔다. 그들은 자연을 인공의 대립개념으로 심각하게 맞세워 놓기보다는 인간과 뿌리가 같았던 존재임을 상기하려고 한다. 다만 오늘날 둘 사이에 간극이나 상처가 있는 관계임을 인정하고 자연미술을 통해 화해의 제스처 혹은 치유를 지속적으로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201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그런 면에서 자연을 환경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에 그다지 손사래를 치지 않는다. 오늘날 자연은 인간의 주변에 가깝게 들어앉아있는 환경까지 넉넉하게 자신을 범주화한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고향이자 인간이 주절거리는 대화를 받아줄 넉넉한 상대이지 않던가? 비엔날레 주관자 ‘야투’가 ‘자연에 몸을 던진다’면서 왜 인공의 공원으로 들어갔냐고? 바로 그런 까닭으로 기꺼이 인공의 공원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소리를 절대 빼앗아 가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원래 인간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은 언제나 자신의 소리를 인간에게 되돌려주고 한없이 베풀 따름이다. 이제 인간이 자연의 소리를 자연에게 되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포코니 아틸라(Pokornyh Attila), 헝가리, 하프 형태의 문(Harp Gate)





자연미술의 투트랙 전략

정치도, 비즈니스도 아닌 미술 그것도 자연미술에 전략은 무슨 말이고, 또 투트랙 전략(Two-track strategy)이란 웬 말인가? 과연 그것이 필요할까?


2012 자연미술비엔날레는 야외전 외에도 거대행사답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대지적 사유’라는 소주제의 실내전은 물론이며, YATOO-I 워크샵, 이란자연미술가초대전, 어린이자연미술전, 자연미술 시민강좌 및 심포지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행사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전체 행사가 크게 두 가지의 쟁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야외전의 성격처럼 ‘확장된 자연미술’의 맥을 이으면서 ‘이벤트와 대중화의 전략’을 걷고 있는 것들이며, 또 하나는 ‘자연미술의 본래적 의미’에 천착하면서 ‘연구와 내실화의 전략’을 걷고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겠다. 전자가 실내전 및 대중 대상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상기한 워크샵과 같은 연구형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주지하듯이 오늘날의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1981년 20대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그룹 ‘야투(野投)’의 자연미술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덩치를 키워나가던 중, 2004년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자연미술가들에게는 야투의 초심을 간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관건이었다. 형식, 내용면에서 국제 이벤트화 된 비엔날레에서 그 길을 모색하는 방식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환경적인 대지미술, 야외설치조각을 경계하면서 ‘빈 몸으로 자연과 만나는’ 이들의 자연친화적 미술은 분명 비엔날레의 미술유형과는 다른 지점이다. 다행스럽게 야투는 창립이후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사계절 연구회’를 통해 외양보다는 내실 면에서 발전을 추구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특히 2011년에 발족한 야투인터내셔널 프로젝트(www.yatooi.com)는 그동안 야투와 교류해온 작가들과의 지속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자연미술운동을 질적으로 확장시켜나가고자 한다. ‘야투’가 앞으로도 ‘자연과의 나눔’이라는 목적 아래 명확한 투트랙 전략을 통해,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대중화와 자연미술의 내실화를 보다 알차게 실천해나가길 기대한다.●


출전 / 

김성호,  “자연과 나누는 소리”, 『월간미술』, 특집, 11월호, 2012, pp. 140-141. (2012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9. 25~11. 30 공주 쌍신생태공원, 금강자연미술센터),


이미지 출처 / 2012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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