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미술작가론〕
보이지 않는 풍경
김성호(미술평론가)
전은희의 회화에는 도시 속 구석진 공간이 자리한다. 그것은 도심을 벗어난 재개발 지역에서 흔히 보게 되는 버려진 변방풍경(邊方風景)이다. 그녀에게서 그곳은 부재로 텅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그림자와 그것의 열망이 함께 호흡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전은희, 부재된 정원 72.7×60㎝, 한지에 채색, 2011
보이지 않는 사람
구석진 그곳, 때론 무너지기도 하고, 때론 허물어져가는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서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벌어진 채’로 존재한다. 벽돌을 쌓아 담을 만들던 아버지, 철문 위에 페인트칠을 하던 삼촌, 햇살 좋은 뜰에 빨래를 널던 어머니, 흙장난 하던 아이는 현재 그곳에 없지만 그들의 ‘시간-기억’은 그곳에 흔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페인트칠이 박락된 담벼락, 지금은 말라버렸지만 누군가 돌보았음에 틀림없는 화분들, 굳게 담겨진 문, 그 위를 점령한 담쟁이 넝쿨들이 그것이다.
일견, 전은희의 ‘사람 없는 풍경’은 ‘누군가’가 ‘무엇인가’에 자리를 내주고 소멸한 부재의 풍경이다. 예를 들면, 담 너머로부터 낯선 침입을 감행한 장난감 행글라이더는 바람에 팔락이며 뜰에서 비행을 멈추고 조용한 명상에 잠기고 있는 중이고, 축대 위에 쓰러질 듯 버티고 있는 집에는 커다란 나무가 풍성한 녹색의 잎사귀들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 분주히 나들던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고, 대신 그 위에 빛바랜 광고 전단지들이 납작하게 매달려 피곤한 몸을 의탁한다.
사람 대신 사물이 대체하고 자리한 그녀의 ‘적막한 풍경’에는 사람들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들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의 경우처럼 ‘무엇인가(사물)’의 몸에 ‘누군가(사람)’의 시간 흔적이 존재 근원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는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서 ‘누군가(사람)’의 존재가 암시적으로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작품〈사이 공간-오후〉는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열려진 창문으로 반쯤 걷혀 있는 커튼은 누군가 있는(혹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어두운 공간 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굳게 닫힌 문이 전면에 자리한 다른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문을 잠그고 떠난 누군가의 귀가(歸家)를 기대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녀의 회화에는 부재가 표면 위에 올라서 있지만 그 부재의 심층에는 존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무엇(사물)’이란 ‘보이지 않는 누군가(사람)’의 ‘존재/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부재의 동시 증명’이 부재의 이면에서 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작가의 ‘존재에 관한 열망’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전은희, 간 판 140×80㎝, 한지에 채색, 2012
전은희, 파란 눈물 80×100㎝, 한지에 채색, 2012
전은희, 통시적 풍경 130×200㎝, 한지에 채색, 2011
전은희,사이공간-오후, 한지에 채색_73×53cm_2013
보이지 않는 풍경
클라크(K. Clark)가 그의 저작 『Landscape into Art』(1949)에서 풍경이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 되는 것으로 고찰했듯이, 전은희에게서도 풍경은 그녀의 예술적 인식을 표상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우리가 대개 ‘풍경’을 눈으로 대면하는 이미지(image)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심상풍경’이라고 하는 내면으로 대면하는 이미지, 즉 이미저리(imagery)를 떠올리는 것처럼, 전은희에게 있어 ‘보이는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풍경’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지점이다. 즉 그녀는 ‘보이는 풍경’(현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풍경’(예술)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처럼 ‘시각적 인식’으로부터 ‘실존적 인식’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전은희의 조형 철학은 작품을 보는 관자로 하여금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에서의 의미론을 체험케 한다. 즉 ‘가시적 대상(visible object)’으로부터 관자들이 저마다의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을 떠올려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드러난 피폐한 풍경을 대면하는 관자들은 그것과 유사한 풍경을 경험했던 과거의 어떤 시절을 떠올리거나 현재의 고독한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기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란 ‘벽(壁)’으로 상징된다.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벽이라는 경계는 구조상, ‘보이지 않는 무엇’을 필연적으로 은폐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작품에서 이처럼 상징적인 ‘벽’으로부터 틈, 구멍을 만들거나 아예 벽을 허물어뜨려 이곳과 저곳,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리를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 보라. 시멘트 벽 틈새로 자라는 이끼 혹은 벽에 난 구멍 사이로 펼쳐지는 녹색의 풍경을.
생각해보자.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은 우리에게 주체와 객체라는 것이 애초부터 상호 교환되는 역동적 관계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전은희의 회화가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찾아나서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란 ‘존재의 결핍이 아닌 충만한 긍정의 공간으로서의 부재’에 관한 철학이자 ‘이미지와 이미저리’, ‘주체와 객체’를 화해, 소통시키려는 비주얼커뮤니케이션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전은희, 사이공간-휴식, 한지에 채색_81×65cm_2013
신(新)진경산수
그녀가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으로 발품을 팔아 방문하고 카메라로 수집해 온 퇴락하고 피폐한 풍경들은 그녀의 작업실에서 회화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더러는 사진의 프레임에 갇힌 풍경의 실제 요소들이 그녀의 회화에서는 첨삭되거나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외려 그녀가 바라보는 풍경에 관한 주제의식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게다가 장지 위에 한지를 배접하고 먹, 분채, 호분 등 전통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아크릴을 혼용하는 식의 창작방식은 오늘날의 남루한 ‘변방의 풍경’을 ‘실재보다 더 실재같이’ 표현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건물의 시멘트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한지를 사용하거나 한지 배면으로 침투하는 먹의 한계색을 보강하기 위해 아크릴을 군데군데 사용하는 방식은 이러한 버려진 도시 풍경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기에 적합해 보인다.
한편, 전시 현장에서 작품들을 선보일 때 고려되는 설치적 언어 역시 이러한 현실감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된다. 일테면 그녀는 개별 작품들을 병풍처럼 이어붙이거나 높낮이가 다르게 걸기도 하며 심지어 바닥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에 현실감 있는 긴장을 부여한다. 또는 전시장 한 곳을 실제의 벽처럼 작품으로 꾸미고 바닥 위에 연탄재, 낙엽들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에 현실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전은희의 이러한 설치 언어는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소통에 있어 심리적 파장을 일으키는 기제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현대한국화가 시도하는 신선한 실험이 되기에 이른다.
전은희, 제4회 개인전 - 인사 아트 센터 전시장
그녀의 용묵(用墨)과 용필(用筆)이 평범하면서도, 이처럼 진중한 무게의 현실감 있는 풍경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까닭은, 전통에 대한 부단한 실험과 더불어 ‘탈재현적 리얼리즘의 상상력’, 달리 말해 ‘보이는 풍경’ 속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담아내는 그녀의 일련의 ‘부재에 관한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은 가히 오늘날의 신(新)진경산수라 할 만하다. ●
출전 /
김성호, '보이지 않는 풍경', (전은희 작가론), 『미술과 비평』, 2012.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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