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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예술(A)

이선영

현대와 예술


1. 모더니티


모더니티는 정치경제학적인 의미의 현대를 특징지으며, 문화예술적인 의미의 모더니즘과는 구별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모더니즘은 모더니티의 상부구조이다. 진보와 새로움은 양자에서 꼭 같은 것을 의미 한 것은 아니었다. 모더니티와의 관계 속에 모더니즘을 배치할 때 모더니즘의 현실과 이상이 확실해 질 수 있으며, 우리 사회 역시 자본주의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만큼,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문제가 외재적일 수는 없다. 가령 1980년대에 모더니즘과 각을 세웠던 민중미술은 질곡에 가득 찬 한국의 모더니티와 깊이 연관된 문화예술 사조였다. 그래서 민중미술은 모더니티가 구가했던 진보의 의미와 한계를 공유한다. 모더니티에서의 진보나 새로움, 그리고 그것의 정점인 혁명과 달리, 모더니즘에서의 그것들은 예술의 내적 언어의 문제에 집중된다. 그리고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양자와 관계를 맺은 근대적 주체의 모습 역시 통일되어 있지 않다. 


모더니티의 주체는 앞, 또는 위를 향한 단선적 경로 위의 진보적 주체로 이성적이며, 모더니즘에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내적 주체는 확장되다 못해 해체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의 해체를 전제하는데 그것은 모더니즘에 이미 내재해 있다. 주체의 해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질 것이다.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에서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는 ‘현대적’이라는 단어를 빈번히 명기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의 발흥, 경제적 성장, 자본주의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대성은 ‘모든 사회적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확실성과 운동, 생산방식과 교통방식의 전복’(마르크스)에서 기인했다. 현대화라는 개념은 ‘자본형성, 자원의 동원과 아울러 생산력의 발전과 노동 생산성의 증대, 정치적 중앙권력의 관철과 민족정체성의 형성’(하버마스)과 얽혀있다. 앙리 르페브르는 [모더니티 입문]에서 금세기에 초부터 일상의 극적인 변화를 지적한다. 전기, 자동차, 비행기 등 현대기술을 바탕으로 한 세계 최초의 발명들이 산업화된 사회의 실천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대규모 계급투쟁, 국제적 긴장이 시작되었다. 모더니티란 가속화된 기술적 진보와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축적과정이었다. 근대성은 계몽과 밀접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은 진보적 사고가 보여주는 포괄적 의미에서 인간에게서 공포를 없애고 인간을 주인으로 지정하는 목표를 추구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적대적인 자연의 혼돈을 제어하는 발전을 말한다. 근대성의 이념은 합리화의 이념과 밀접히 관련된다. 이 합리적 사회에서는 이성이 과학과 기술적 활동 뿐 아니라, 사물의 관리와 더불어 인간의 지배를 명령한다. 종교가 지배하는 전통으로부터 탈마법화 되어 세속화된 세계는 ‘합리적’(막스 베버)이라고 서술되었다.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에 의하면, 합리화란 기능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세계의 분화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체계의 모습은 핵심조직인 자본주의적 경영과 관료제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과학과 기술은 합리주의의 정점에 놓인다. 알렝 투렌에 의하면 감각이 우리에게 외부에서 제공한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을 앞서 측정하고 예기하는 가정에 종속시키는 자연과학에서의 실험과 기획은 어떤 것을 어떤 것과 동일시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항상 어떤 것을 이해 가능성의 틀에 맞추는 형이상학의 유산이 남아있다. 결국 합리적이란, 앞서 규정된 목표에 이르기 위해 가장 적절한 도구와 가장 경제적인 노동방법을 총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도구적 합리성의 총아인 과학 기술 문명은 삶의 추상화를 낳는다. 이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추상은 오로지 현대적 세계에서만 발견될 뿐’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역사상 어떤 사회에 비교할 수 없이 추상적이다.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시간과 화폐를 통해 추상적으로 측량되는 노동, 즉 세계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동일성의 관계를 만든 임금 노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시간이 가속도가 붙은 근대는 역사에 대한 감수성을 드높인 시대이다. [지나간 미래]에 의하면 이러한 역사의식에 의해 근대는 현재를 일종의 과도기로서 특징짓는다. 이 과도기는 과정에 속도가 더 붙을 것이라는 가속화의 의식과 미래가 전혀 다른 종류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소모된다. 하버마스는 18세기에 ‘모던’ 또는 새로운 시대라는 표현과 함께 등장한 개념으로 혁명, 진보, 해방, 발전, 위기, 시대정신 등의 예를 든다. 코젤렉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더 커졌다고 말한다. 미래의 세계는 현재나 과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미래의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근대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주의’라는 개념들은 모두 인간의 경험보다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기대로 구성된다. 근대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으며, 새로운 것에 개방되어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유동성과 운동성이 지배적인 현대성은 좌파에게는 ‘새로운 시대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시대의 의식’(하버마스)이며, 우파에게는 ‘과거를 파괴하고 미래를 통제하는 인간의 자기 의식적 의지’(벨)이다. 역사는 유토피아라는 목적을 향하는 진보의 과정이 된다. 역사주의로 귀결된 근대의 역사의식은 민족과 전통을 재발견하였다. 재발견이라기보다는 창안에 가까웠다. 전통은 대중문화나 현대예술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근대적 발명품이다. 스콧 래쉬와 조나단 프리드먼 편집한 [현대성과 정체성]에 의하면, 19세기에는 국민국가가 자리를 잡으면서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창조가 활성화되었다.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유럽의 풍경은 진짜 오래된 것보다는 19세기에 각색된 것이 많다. 국민국가는 근대세계 체제의 주요한 정치적 단위이다. 사회, 국민경제, 민족 개념은 모두 동질적인 민족적 실체의 존재를 모델로 한다. 


역사 만들기는 정체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조나단 프리드먼은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에서 서구의 고유성은 동양, 원시성, 전통성에 대립해 왔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는 부상하는 유럽정체성의 중대한 한 측면을 이루었다. 단선적 역사의식은 식민지배와 함께 공간화 되어 문화에 있어서도 진화론이 주장되었다. 선진적인 중심과 후진적인 주변이라는 공간적 배치가 이루어졌다. 문화적 진화론에는 유럽을 모델로 전 세계를 서열화하는 위계적 관점이 있다. 조나단 프리드먼에 의하면 유럽세계의 헤게모니는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상업주의와 유럽 중심의 세계 시장이 형성되던 탐험의 시대였다. 이국주의와 원시주의는 이 같은 우주론적 소산 가운데 하나였다. 인류학은 공간을 시간으로 오역하고, 문명과 비문명의 진화적 관계로서 현문명의 중심부/주변부/변두리 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표상 속에서 탄생했다. 


근대에는 이처럼 공간의 시간화가 있었다면 극도로 현대화(hypermodernization)된 시대는 ‘시간이 공간을 완전히 정복하는’(데이비드 하비) 것이다. 첨단, 또는 중심부의 발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무한히 공급되어야한다. 조나단 프리드먼에 의하면 경쟁적 팽창이 일어났던 시대에,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중심부가 팽창되는데, 교역, 전쟁, 약탈 등은 부의 원시적 축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문명사회와 비서구의 미개사회를 뜨거운(hot) 사회와 차가운(cold) 사회로 비유한 바 있는데, 그것은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어 진보를 만들어내는 뜨거운 서구와 괘종시계 처음 투입된 에너지기 무한히 사용되며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차가운 비서구 사회의 대조이다.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고 또 낭비되면서 생산력의 혁명을 이룬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원료와 노동력의 공급지이자 시장인 식민지를 필요로 했다. 세계화를 추동한 것은 시장이다. 


마샬 버만은 [현대성의 경험]에서 부르주아의 과격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행동주의, 즉 처음에는 자신들의 노동자들에게 강요하였고 그 다음에는 전 세계에 강요했던 행동주의는 ‘그 이전의 모든 세대를 종합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대량적이면서도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내었다’(마르크스)음을 강조한다. 버만에 의하면 또 다른 위대한 부르주아의 성취는 일상생활을 국제화하는 것이었다. ‘생산을 위해서 시장을 부단하게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전 세계에 걸쳐서 부르주아에게 요구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모든 곳에서 자리를 잡아야만 했고 모든 곳에 정착해야만 했고 모든 곳을 연결 지어야만 했다’(마르크스) 부르주아 문명은 보편적이다. 그 자체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던 현대 부르주아는 우연히 세계문화를 창조하게 되었다. 이질적 문화는 동화되거나 억압된다.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은 문화전파가 종속적인 사회질서가 해체되고 연이어 지배적인 시장문화로 사회가 통합되는 곳에서 가장 쉽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2. 근대적 이성과 주체, 그리고 대중 개인주의


모더니티를 추동하는 또는 그에 반응하는 주체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다. 근대적 주체가 근대와 함께 반성되어야 한다면, 근대적 주체를 이루었던 이질적인 가닥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체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손쉽게 주장되는 바와 같이 쉽게 포기될 것이 아니다. 주체가 해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주체를 창안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이다. 탈근대주의에서 강조되는 탈주체화는 근대적 주체가 가지는 어떤 난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를 창안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을 때, 주체의 해체가 요구되었던 필연성을 잃어버리고, 기성의 질서에 흡수되고 만다. 탈근대에는 해체하는 주체와 해체된 주체가 함께 있는 것이다. 해체는 금기를 비롯한 모든 경계를 넘나든다는 스스로의 착각과 달리, 기성의 질서는 좀 더 유연한 제도화를 통해 그들만의 해방구를 구획해 주곤 한다. 시공간적 팽창주의를 추동하는 이성적 주체가 있는가하면, 그것과 길항작용을 하는 보다 내면화된 주체가 있다. 


전자가 사회 혁명과 발을 맞추는 지향하는 전위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좀 더 소박하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으로 언어의 혁명에 복무하는 모더니스트가 해당된다. 정보혁명에 의해 세계가 상부구조 하부구조 할 것 없이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엮여지는 시대에, 언어의 혁명은 이전시대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만프레드 프랭크는 [현대의 조건]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이성은 통일성을 지향하는 힘이다’라고 말한 이래, 이성적 판단의 근본 성질은 사고의 필연성, 보편성, 합법칙성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근대는 혁명과 더불어 경험되고 생각되어졌다. 이성은 이러한 혁명적 전통 속에서 개인적인 열정에 대해 일반의지의 합리성을 대립시키면서, 과학적 논증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 사회적 형식들을 백지화했다. 알렝 투렌은 [현대성비판]에서 과학과 그 응용을 활성화시킨 것도 이성이고, 개인과 집단적 필요에 사회적 삶을 적응시킨 것도 이성이며, 폭력과 전횡을 법치국가의 시장으로 대체시킨 것도 이성이었다고 평가한다. 


헤겔은 계몽주의 시대가 오성, 또는 반성을 이성의 자리에 세워놓았다고 말한다. 오성과 같은 사이비 이성은 체계의 자기 보존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하여 다양성의 차이라는 비동일성을 포괄하려는 동일성의 사유가 확립된다. 프랭크는 분석적 이성이 생활세계의 구조들을 더욱 추상화시켰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추상으로의 환원은 감각자료, 인정된 언어사용, 증명가능성을 통해서이다. 경험론의 근본전제는 정신적 표상이 선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감각 경험으로 합성된다. 물론 이러한 ‘단순한 요소들의 배열로 합성된 것’은 ‘구체제를 부수는 부르주아의 무기’(사르트르)이기도 했다. 프랑크는 ‘합리적 근거 짓기’라는 몰가치적 작업이야말로 외부세계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려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강조한다. 이성은 ‘전적으로 계산하는 사고와 그것이 만들어낸 엄청난 성과의 광기’(하이데거)로 밝혀진다. 그것은 도구화된 과학기술부터 관료주의까지 공식적 세계를 지배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모더니티 입문]에서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두 가지로, 인간은 자연과 역사로 나뉘어진다고 말했다. 근대민주주의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자율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리차드 세넷도 혁명가들은 ‘중립적인 주체, 즉 개인적인 열정과 이해관계를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킬 수 있는 자’를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추상적 주체성은 모든 의심스러운 객체로부터 시작해 유일하게 확실한 존재로 환원하는데서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근대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된다는 사실로 규정된다. 인간은 모든 존재자의 바탕에 놓여 있는 주체이다. 그것은 근대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대상화와 표상가능성의 토대가 된다. 하버마스는 스스로를 외화하고, 이 객관화를 다시 체험 속으로 융해시키는 주체성에 관한 표상이 근대에서 중요시되었다고 지적한다. 의식철학의 의미에서 주체는 자신의 인식과 행위를 통해 객관세계와 관계하는 것이다. 


언어와 세계가 일치한다는 형이상학적 봉인이 파괴되면, 언어의 재현 기능자체가 문제된다. 하버마스는 문제점 있는 재현의 과정에 대한 명료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표상하는 주체는 자신을 스스로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반성이라는 개념이 주도하게 되며, 표상하는 주체는 최종적 확실성의 토대가 된다. 자기의식을 통해 현재화된 인간은 자신이 자율적이고, 동시에 유일한 실존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사물의 질서를 생산해야 하는 초인간적 과제를 떠맡아야 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성의 억압적인 성격은 자신을 객체로 만드는 주체의 관계 속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가장 야심적이 형식의 현대성은, 인간이란 인간 스스로가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추상적 자아인 동일성들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또 성장하는 사람들의 개인화를 강요하는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현대성의 이론이 인식, 의식과 그리고 자기의식의 개념들에 방향을 맞추는 한, 이성개념 또는 합리성과의 연관관계는 분명해 진다. 


그러나 근대에는 이성의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성과 주체의 대화를 중시하는 알렝 투렌은 근대란 단지 세속화, 합리화, 자본주의 정신의 시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종교개혁의 시기와 17세기에 이미 합리화만큼 강력했던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힘에 의해 이 현대주의는 보완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과 부르주아 개인주의 정신을 대조시킨다. 전자는 생산, 노동, 절약, 희생으로 사회를 구성하지만, 후자는 행복을 추구하고 사생활에 특권을 부여한다. 현대사회는 합리주의적이며 세속화되고 생산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중앙화 된 생산과 경영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구속과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는 개인주의적이다. 현대성은 이성과 주체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성 없는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에 매몰되며, 주체가 없는 이성은 권력의 도구가 된다. 


주체와 이성이 인간 속에 공존함을 강조하는 투렌은 그 선구자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자유의지에 중요성이 부여하는 데카르트는 과학적 사고의 위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을 신뢰하도록 한다. 계몽의 합리주의는 이성의 승리와 신앙의 파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발견함에 반해, 데카르트는 이성을 신뢰함으로서 피조물일 뿐 아니라, 창조주의 모든 이미지를 갖춘 인간 주체에 대해 성찰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단지 현대 합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라, 기독교 이원론을 현대적 주체의 사상으로 변형시킨 중심인물로 평가된다. 알렝 투렌은 주체화란 한 개인의 삶이 외부로부터 결정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성의 원칙을 갖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적 의식철학이 동일성이라는 중심개념을 가졌다면, 니체로부터 시작된 탈현대적 이성비판의 중심개념은 차이와 타자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을 ‘고문대, 그것은 이성이다’(푸코)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이성적 주체와 대화를 통해 이성과 길항작용을 하는 내면적 주체의 모습은 소비사회가 전면적으로 전개되어 만들어진 대중에게서 발견되기 힘들다. 대중은 이기적 행복의 추구가 근대의 강박관념임을 보여준다. 대중의 대다수는 소비가 행해지는 도시에서 산다. 대중의 수동성은 근대도시의 공간적 구조와도 밀접하다. 근대는 도시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리차드 세넷은 [살과 돌; 서구 문명에서 육체와 도시]에서 19세기 중반 유럽은 농업중심의 사회였지만, 한 세기가 지난 후에는 중심핵이 고도로 집중된 도시 중심의 사회가 되었음을 밝힌다. 세넷에 의하면 근대도시는 수동적인 군중을 낳았다.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은 권력의 진정한 형태인 소외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민은 시각의 노예가 되어, 집단적으로 훔쳐보는 자가 되었다. 혁명의 도시에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투명한 자유의 공간을 도시중심에서 만들려는 계몽적 충동은 공허함과 무관심을 유도했다. 


거대한 열린 부피, 요컨대 자유의 공간은 시민과 군중을 잠잠하게 하고, 그들의 육체를 누그러뜨렸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개별자였다. 흩어진 개인이 가득한 공공영역은 더 이상 정치영역이 아니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고안해낸 말인, ‘개인주의의 시대’가 바로 근대이다. 도시적 고독에 둘러싸인 개인주의는 ‘그들과 접촉하지만 그들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그 자신으로만, 그 자신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토크빌) 토크빌은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는 서로를 상호무관심으로 견뎌내는 사람들의 공존이라는 어떤 특정한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깊은 관계를 지적한다. 그는 도시에서 ‘부패하지는 않지만 영혼을 약화시키고, 소리 없이 그 행동의 스프링을 풀어놓는 물질주의’를 보았다. 대도시는 개인으로 분리시키는 움직임을 통해 지금 형태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각자 물질을 필요로 할 뿐, 서로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작가 또한 익명화되었다. 익명화란 작가 역시 대중의 한명이라는 넘어서, 이전시대의 예술보다 작가에게 주어진 더 큰 몫을 전제하기에 역설적이다. 주체는 양식(언어)을 통해 작품 전체로 흩뿌려진다. 빅토르 스토이치타의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 의하면, 인상파 화가인 르누아르는 보들레르의 평문 [현대생활을 그리는 화가]에 심취되어서 다음과 같은 열성적인 관찰자인 견자(見者)를 꿈꾼다. 세계의 수도 파리를 배회하는 도시의 산책자로서의 관찰자는 ‘세상을 보고, 세상의 가장 중심에 있되 그곳으로부터 숨겨진 채 남아있으라...관찰자는 그가 어디를 가든 익명으로 즐기는 왕자이다....그것은 비(非) 자아의 만족할 줄 모르는 자아이며, 매순간 마다 끊임없이 변덕스럽고 사라지기 쉬운 삶 그 자체보다 더 생생하게, 이미지로 그것을 그려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근대적 주체는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숨겨진 채로 남아있고자 한다. 


근대 미술에서의 주체는 이전 세대의 사실주의적 주체와 달리, 고정된 정점이 아니라 묘사되는 사물과 함께 움직인다. 가령 사진 및 영상의 시대와 더 밀착되어 호흡하는 누보 레알리즘은 주체/대상의 이분법에 기초한 이전시대의 리얼리즘과 큰 차이를 가진다. 순수예술로서의 모더니즘은 ‘대상과 주체, 미술가의 외부에 있는 세계와 미술가 자신을 다 포함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 것’(보들레르)이다. 신과 유비되는 인간이라는 선험적 질서에 기반 하는 휴머니즘은 재현 및 표현의 이론과 더불어 약화되었고, 현대미술이 전개되는 내내 ‘인간주의’는 그자체로 문제시되는 개념이 되어, 결국에는 ‘포스트 휴머니즘’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익명적 대중과의 관계도 이중적이다. 특화된 언어의 전문가로서의 모더니스트는 대중에 대해 엘리트주의적 의식을 가지면서, 동시에 상업적 물신화의 정점에 선다면 어느 시대보다도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현대의 잠재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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