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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린 / 어두워진 실상과 밝혀진 허상

이선영

어두워진 실상과 밝혀진 허상

 

이선영(미술평론가)

     

1. 뒤집혀진 세계

     

필자가 이예린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9년 무렵, 작가 여러 명이 참여한 어떤 기획전에서였다. 그 때 본 것이 사진 작품이었고, 이후로도 간간이 주로 사진작품만을 접했으므로 필자에게 이예린은 당시까지는 사진작가로 기억되어 있었다. 이제 30대 중반의 작가인데, 이미 국내외에서 사진작업으로만 60여 작품을 만들고 발표했으니 그렇게 각인될 법도 하다. 작업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하고 발표한 미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고, 귀국 시점이 미술 시장에서 사진 붐이 일었던 시기와 우연찮게 일치되면서 이예린은 사진 작업으로 먼저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운도 좋았지만, 작업량이 그토록 많이 그리고 다방면에서 따라주지 않았다면 우연(기회)을 필연으로 고양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회의 주관적 측면은 영감이고, 객관적 측면은 사회문화적 맥락이다. 한 아이디어를 그렇게 끝까지 밀고나가서 다양한 변주를 펼쳐 보인 뒷심도 한몫했다. 물론 그 시리즈가 많고 유명하다고 해서, 한 아이디어를 동어반복 식으로 늘어놓은 경우는 아니다. 

 

이예린의 작품은 비슷한 게임원칙이 관철되고는 있지만, 많은 경우의 수가 실험되고 있다. 작가가 결정한 한정된 언어로 펼치는 다양한 게임의 세계는 실험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와 조응한다. 그것은 일회성으로 끝날 소재나 형식이 아니라, 다산성을 가진다. 내포적 다양성이 풍부한 다산적 소재 및 형식이 작가에게 다가오는 순간은 일생에 그리 많지 않다. 이예린의 경우는 늘 무엇인가 궁리하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 작가들에게만 기회는 온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흔치 않게 다가온 기회를 온전히 자신의 생산물로 키워내는 것에 작가의 역량이 놓여있다. 사진작품은 회화, 드로잉, 입체 등 여러 방식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작가가 해왔던 모든 장르의 실험들을 포괄하여 한 시리즈로 집약된 산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비가 온 뒤 잠깐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반영 상을 뒤집어 보인, 어찌 보면 단순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작가가 뒤집어 놓은 세상만큼이나 획기적이다. 

 




 (도-1) [34번가와 5번 애비뉴], 101x69cm, 디지털 C-프린트, 2009년.

  

이예린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명료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만, 내포적 다양성이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미덕이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작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무지 복잡하고 뭔가 있는 것처럼 잔뜩 연출되어 있지만 애써 퍼즐을 맞추고 나면 별 내용이 없는 경우, 더 나아가 작가가 작품에 따라다니며 일일이 해명하지 않으면 해독되기 어려운 불완전한 작품을 말이다. 특히 젊은 작가의 경우 표현 과잉에 빠지기 쉬운데, 이예린은 절제를 강렬한 표현과 연결시킬 줄 아는 현명함을 가졌다. 작가가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우연히 응시했을 물웅덩이는 일상 한 켠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흔해빠진 현상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상상의 세계로 관객을 이끌고 들어가는 독특한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관객은 환상으로 고양된, 뒤집어진 밑바닥 현실을 바라본다. 강고한 현실은 화면 밑바닥에 흑백 상으로 얇게 깔려있을 뿐이다. 아예 생략된 경우도 있다. 반대로 잠시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반영상은 다채로운 색깔을 잃지 않은 채 화면 중앙에 벌떡 일어나 있다. 

 

그림자가 주인공이 되고 실제가 그림자가 된다. 그것은 그림자이긴 하지만, 물에 비친 그림자이기에 거울 같은 반영상이기도 하다. 이예린의 작품에는 재현의 기원이 되는 그림자와 거울의 모델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타자는 동일자의 희미한 그림자나 환영을 벗어나고, 더 나아가 그 관계를 역전시킨다. 물웅덩이의 이미지는 거울처럼 현실을 반영하는데, 그것은 현대 정신분석학자 라깡의 거울단계의 가설처럼 조각난 현실을 통합시킨다는 점에서 상상적이다. 이예린의 작품에서 현실의 그림자인 환영의 세계는 상상과 밀접하다. 여러 물리적 조건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환영은 상상의 세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 다른 완전한 별천지가 아니라, 약간의 어긋남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작가는 그 틈을 최대한 벌린다. 틈은 또 다른 우주, 또는 또 다른 우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심리학적 거울과 마찬가지로 이예린의 작품에서는 통합은 완전치 않다.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난폭하게 침투하기도 하고, 우연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시점의 물리적 조건 또한 반영한다. 

 

그것은 바닥의 요철과 이물질이 있고, 약한 바람에도 흐릿해지는 불투명한 거울이다. 특히 그 거울의 바닥의 굴곡 면과 고인물의 상태에 따라 변화무쌍한 외곽선이 형성된다. 외곽선은 단지 어떤 내부를 감싸서 전달해주는 중성적 틀이 아니라, 그 내부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창이나 거울처럼 반듯하지 않고 우연적 조건에 의해 불규칙적인 형상을 이루며, 그러한 조건이 허상의 일시적 측면을 강조한다. 아래에 흑백으로 깔린 현실은 참조점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참조대상의 위치나 비중은 크지 않다. 이러한 상호적 병렬이 두 세계를 변별력을 강화한다. 실제의 연못인 경우도 간간이 있지만, 대체로 배수가 잘 안되어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고여 생긴 이 순간의 연못은 작가에게 또 다른 세상을 담는 틀이 되었다. 이예린은 그것을 ‘물 액자’라고 표현한다. 비가 그치고 햇빛이 드는 순간, 잠시 지상에 형성된 그 시공간에 현실과 평행한 세계가 담기는 것이다. 

     

2. 자리를 바꾼 존재와 무(無)

     

이예린의 작품에서 허상부분은 대개 불규칙적인 작은 ‘물액자’에 담겨지지만, 때로 화면 상반부 전체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것은 연못이나 호수 같은 항시적인 물웅덩이, 또는 촉촉이 젖은 지면 전체를 거꾸로 세운 경우이다. 그것들은 대개 바람 타는 물결의 일렁임 속에 잠겨있다. 이 경우 허상부분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액자는 작품 [34번가와 5번 애비뉴](2009년)(도1)처럼 불규칙하다. 물액자에 담겨진 세계는 현실 속에서 상상에 관련된 이미지들이 담긴다. 가령 화면 아래의 번잡한 자동차 거리 위로 교회의 뾰족탑만 비치는 작품은 지금보다는 정신의 힘이 컸던 과거가 강조되며,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들 앞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인들이 부각된 작품은 같은 예술인에 대한 공감이 있다. 화면 상단부의 반영상은 지표면의 물리적 조건과 결합된다. 그것을 다양한 질감과 형태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물 액자에 고풍스런 건축이 비침과 동시에 그것을 에워싸는 것은 현실의 물리적 구조물이다. 맨홀 뚜껑과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결합되기도 하는 사진작품들은 가위 없이 행하는 몽타주이다. 실상과 허상의 비중이 작품에 따라 다른데, 화면 아래에 흑백 실상부분이 비교적 온전하게 많이 나온 것에 비해 화면 상단의 반영상은 극히 작은 영역을 차지하기도 한다. 화면 상단의 반영상은 포장도로의 형태나 상태, 대기의 조건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구획되거나 미묘한 파장으로 번져나간다. 작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2009년)(도2)에서 초고층 빌딩의 위용도 예외 없이 폐휴지 둥둥 떠 있는 반영 상으로 변모한다. 이 작품에서 실제 장면은 아예 사라져 있다. 겨울 도시의 스산함이 느껴지는 작품 [Another Winter still #1](2007년)에서 실상 장면은 거의 없고, 차가운 시멘트 덩어리와 마주한 어른거리는 건물이 비추어져 있는가 하면, 작품 [프라하에서](2008년)에서 고풍스런 건물들이 떨어진 낙엽들과 아래에는 자동차 바퀴만 보일 뿐이다. 

 

허상과 실상의 경계부근에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공백지대가 끼어들기도 한다. 작품 [카셀에서](2008년)(도3)에서 회색빛 실상과 지표면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늘색 띠가 화면의 숨통을 틔워준다. 허상 부분에 나무 이미지가 구별되는 차원들을 연결해주는 작품 [AZ #01](2011년)(도4)에서 나무를 감싸는 깊은 우주는 자갈밭과 빗물이 만나 이루어진 심연이다. 작품 [Another Winter still #2](2007년)(도5)는 대상을 거울처럼 비추면서도 검은 그림자의 실루엣이 나오는 독특한 경우이다. 여기에서 육각형 보도의 괴인 물에 비친 사람이 보이는데, 신호등 실루엣과 함께 구름 아래로 나온 강한 햇빛을 받아서 그자체가 그림자처럼 나왔다. 반영상 만으로 겨울의 쨍한 추위가 느껴지는 이 작품에서 거울 반영은 그림자 반영과 중첩된다. 작품 [워싱턴 스퀘어 파크](2008년)(도6)에서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아스팔트 안에 잠시 조성된 물웅덩이와 그 안에 잠시 자리한 비둘기는 실상과 허상을 동시에 온전히 보여준다. 

 




 (-5) [Another Winter still #2], 30x20cm, 디지털 C-프린트, 2007년.

 

상상에서 또 다른 사상이 파생되듯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찍은 실상의 허상부분을 결합하여 또 다른 장소를 만들기도 한다. 대개 붐비는 도시에서 건진 작품 속 물액자에는 한 두 사람만을 선택하는 효과가 있다. 그 거리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대중들은 결국은 모두 혼자라는 것, 상상의 세계에서는 특히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17번가](2009년)(도7)에서 소실점 부근에 혼자 걷는 여성이 보이는데, 작가는 아래 실상의 번잡한 대도시에서 한사람만을 부각시킨다. 검은 우산을 쓴 여자가 아주 크게,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 [파리no.4](2012년)는 마치 영화 [메리 포핀스]나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 나오는 검은 신사들처럼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물액자에 건져진 한 두 명의 사람은 길바닥의 먼지와 결합하여 주변과는 다른 그만의 기후 조건에 감싸여 있다. 잘 차려입은 파리의 멋쟁이는 자신에게만 불어오는 모래 폭풍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길을 간다. 

 

이예린의 작품에서 현실과 최소한의 접면을 가진 그 세계는 현실과 닮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색이 있고 촉촉한 허상부분에서 사람은 대개 한두 명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리가 생략되어 있어 번잡한 일상 속에 잠시 끼어든 유령 같은 느낌이 든다. 물 액자는 바람에 일렁여 반영 상을 신기루 같은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물이 고인 장소의 바닥과 풍경을 중첩시키기도 하며, 물에 떠있는 이물질들과 결합하여 독특한 질감의 촉각적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다른 장소에서 찍은 여러 사진을 같이 배치하여 새로운 장소가 생성되기도 한다. 현실과의 최소한의 접점을 가지는 상상세계는 회화에서 극대화되고, 드로잉에서는 추상적 요소들로 분해되어 있지만, 사진작업에서는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피사체가 되는 참조대상을 완전히 괄호 칠 수 없는 인덱스(index)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사진은 상상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몫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상대적 위상은 강화된다. 

 

여기에서 현실은 더욱 현실적이고 상상은 더욱 상상적이다. 이예린의 작품에서 양자의 위상은 화면 내에서의 비중, 그리고 색채의 반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현실과 상상은 이원론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보다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다. 상상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며, 현실이라고 해서 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상상의 구성요소는 현실이고, 현실의 구성요소 또한 상상이 상당부문 차지한다. 이예린의 작품은 약간의 차이에서 시작된 큰 차이가 있다. 소비자 대중을 끝없이 유혹하는 자본의 전시장, 그 스펙터클로서의 대도시는 그 본래적 칙칙함을 유지한 채 중력의 작용을 극복하지 못하고 화면 바닥에 깔려있으며, 일시적인 시공간 속에 담긴 현실의 단편은 상상의 세계로 둥실 떠오른다. 현실과 상상은 화면 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상대적 위상을 지닌다. 이예린의 작품에서는 대체로 환영(상상)의 비중이 더 크다. 

     

3. 모태 언어로의 음악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예린을 먼저 연구한 다른 필자들도 지적하듯이, 미술을 전공하기 전에 피아노를 쳤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 요소는 회화와 드로잉, 입체와 영상설치 작업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주요 시리즈인 사진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묵묵히를 위한 4악장](2012년)에는 그림과 설치물에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악기가 등장하고, 악기의 현 부분에 글자로 이야기를 새겨 넣었다. 작품 [버려진 첼로의 불평](2003년)(도8)에는 버려진 첼로를 분해해서, 비록 기계 돌아가는 소음이긴 하지만, ‘나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기나 음악이 아니어도 소리는 늘 이예린의 작품 주변에서 들려온다. 작품 [‘라’없는 엘리제를 위하여](2001년)에서는 라음이 제일 많이 나오는 곡의 특정 음을 뺌으로서 자족적인 완결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삭제한다. 이예린의 입체작품은 늘 움직이고 소리를 내는 기계이자 생명체이다. 박자 기계와 유명 지휘자를 결합시킨 작품 [메트로놈 지휘자](2002년)에서는 현대미술가의 관점에서 클래식 지휘자의 위치를 물어본다. 

 

작가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예린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매년 상을 받을 만큼 피아노를 잘 치는 재주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피아노를 쳤던 성실한 소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 분야가 그렇듯이, 같은 곡을 수없이 반복해서 훈련해야 하는 고된 과정은 피아노를 계속 치고 있는 기계적인 손과 달리, 머릿속으로는 다른 것을 상상하는 이상한 버릇을 들이게 했다. 작가는 그 때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구나’를 처음 생각했으며, 머릿속의 상상의 세계를 키워갔다. 성실한 학생이자 딸로서 해야 하는 현실의 의무는 반자동적으로 실행되는 바닥의 현실이었지만, 억압적 현실로부터 자극받은 상상은 점점 커져갔다. 피아노는 아침저녁으로 맨날 쳐야했지만, 미술은 여행 같은데 가면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으로 다가왔고, 결국 미술 전공으로 예고에 들어갔다.

 

어린 이예린에게 미술은 반복적 현실의 재생과는 다른 상상의 세계로 다가왔고, 이러한 본질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술이 현실이 된 지금 그녀에게는 모태 예술이었던 음악은 무의식과 몸속에 깊숙이 자리하며,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상상의 세계를 차지한다. 음악 자체가 미술과 달리, 비가시적이며 추상적이다. 음악이란 시간적 차이를 가지는 음과 음이 연결되어 상징이나 의미가 되는데, 그 사이와 틈 역시 상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미술은 공간적이고 음악은 시간적일 뿐이다. 시공간적 틈을 어떻게 이어가는가의 문제를 공유하기에, 음악과 미술의 언어는 그렇게도 호환성이 큰 것이다. 음악 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여러 장르를 두루 섭렵해온 이예린의 작품은 공(共)감각적이다. 작가에게 음악의 그림자는 강력하여, 귀에서 음악이나 음이 들려와야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음악적이어야 내 스스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품에 ‘운율과 율동감이 없다면 표피적이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술대학의 학생이 되어서는 실험적인 것을 고무하는 학교 분위기가 현실보다는 상상의 몫을 키웠다. 예고에서 미술을 어릴 때 피아노 쳤던 것처럼 열심히 해서 수석 입학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 다니는 내내 여러 전공을 두루 거치면서 ‘적어도 학창 시절에는 틀에 얽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틀이란 무엇보다도 재현주의를 말한다. 모든 것을 동일성의 진리로 복속시키는 지배적 질서의 재현 말이다. 뒤집힌 세계는 그렇게 나왔다. 유학도 비슷한 분위기의 학교에 가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섭렵과 실험을 거듭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서른 무렵에 닥친 부친상이라는 개인적 고난은 또 다른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자신에게 예술이란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어릴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예술이 사치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입체나 설치작업 같이 너무 버거운 작업은 축소되었다.

 

이예린은 깊은 슬픔에 경황이 없어 약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다. 작가가 직면한 죽음이라는 사건은 몇 년 후에나 작업에 반영될 만큼 당시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현실에 대한 더 큰 상실감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현실세계에서의 상실감 또한 상상세계의 몫을 더욱 크게 했다. 이예린의 작품에서 현실은 회색이지만, 그 반대편의 세계는 생기가 감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예린을 작가로서 세상에 처음 알린 사진 작업은 시련이 닥치기 전에 시작되었고, 미국의 대학에서의 졸업 전과 오픈스튜디오 전시에서 호평과 더불어 판매도 되는 개가를 올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 작업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환영의 세계가 가지는 현실성은 또다른 울림을 가지면서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웅덩이에 비친 그 일시적 세계는 더 진짜 세상 같이 다가왔다. 피아노 건반을 칠 때처럼, 거울에 손을 댈 때 대상과 환영이 거울의 한 지점에서 만나듯이 양자는 만났고, 환영은 현실을 받쳐주게 된 것이다. 

 

작가는 ‘물체가 우주 속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림자가 받쳐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원래 모습, 즉 조각난 파편들이 우주의 먼지로 해체되지 않는 것은 조각들을 이어주는 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상, 더 나아가 현실에 대한 예술의 근본적인 역할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깨달음은 거의 종교적 차원의 울림까지 준다. 그러한 깨달음은 우연적이었기에 작품에도 인공적 요소는 최대한 배제 된다. 현란한 포토샵 기술의 시대가 개막되었지만, 이예린의 사진작업은 실상과 허상의 위치 변화와 색 처리가 전부이다. 편집이나 합성이 아니라, ‘시각만 달리하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메시지이다. 물론 각각의 작품은 몇 백 장을 찍어서 결정적인 한 장을 고르는 문제이기에, 우연이란 필연이라는 맥락 속에 놓여있다. 유학 이후 발표된 작품은 사진이 많았지만, 2006년까지는 입체와 영상 작품이 많았고, 그림은 꾸준히 그려왔다. 입체작업은 요즘 그림에 흡수되어, 이전 같았으면 직접 만들어 현실공간에 설치했을 것들을 그림으로 대신 표현한다. 

     

4. 회화와 드로잉

     

사진에 비해 상상의 여지가 더 많은 회화에서 상상을 현실보다 더 비중 있게 생각하는 작가의 성향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현실과 상상간의 긴장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되었다. 특히 2012년의 개인전 ‘물빛 에피소드’ 전에는 몇 년 전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생각과 음악이 강하게 자리한다. 그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된다. 종이 위에 과슈와 연필로 그린 추상적이고 음악적인 작품 [12번의 인트로](2012년) no. 1, no. 2 는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 패널에 음악처럼 12번의 시작을 해본다. 작품 [22개의 건반 피아노가 있는 방](2012년)(도9)에서는 피아노가 있는 클래식한 실내에,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이 맞은편 책장을 비추고, 앉기에는 힘든 초현실주의적 의자가 놓여 있다. 물론 22개의 건반을 가진 피아노 역시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품의 환상성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에 관철된다. 분홍/연두색 벽과 바닥면은 실내라기보다는 그냥 추상적인 색 면처럼 보이며,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과 날카로운 선들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소리가 공간을 날카롭게 베어낸 것 같다.

 

작품 [눈을 뿜는 등이 있는 서재](2012년)에서 소리는 난데없는 화면 아래의 붉은 선들로 연상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것들은 분명 현실적 요소들이지만, 어울리지 않은 시공간의 조합이 두드러진다. 책은 자신의 등껍질만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하나 펼쳐질 때 상상의 세계는 사진작품에서의 물액자처럼 둥실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현실성 보다는 잠재성을 강조한다. 실내인지 외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 등에 소복한 눈을 맞고 있는 사슴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서 방황한다. 작품 [물방울이 깃털로 되곤 하는 어느 곳](2012)에서 철장처럼 드리워진 줄무늬는 병원의 환자복이며, 작가의 개인사와 관련해 비교적 분명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환자는 특히나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으며, 어디로 연결되는 지 알 수 없는 아득한 길로 떠나갈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실내의 책장과 실외의 가로등은 한 공간에 공존한다. 모호한 공간 속에 배치되어 있는 가로등에서 발산되는 것들은 어떤 기후조건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구름이나 달을 열매처럼 맺고 있는 환상적인 나무가 있는 작품 [달나무 구름나무](2009년)처럼 그렇게 서 있다. 

 

 

(-10) [새벽 4시에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 멜로디 나무],116x91cm, 캔버스에 유채, 2010년.

 

지하와 지상, 그리고 천상을 연결하는 이 수직의 존재들은 자신을 둘러싼 구별되는 우주에 어떤 기상 조건 뿐 아니라, 소리도 발산한다. 작품 [새벽 4시에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 멜로디 나무](2010년)(도10)는 동이 트기 이전의 가장 적막한 시간을 표현했다. 나무는 지상에 뿌리박혀 이동하지 못하지만, 여러 계를 연결시키는 상징적 우주이다. 그림 속 도상들은 애써 연결 해야만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각보다는 상상을 더 많이 요구한다. 그것들은 꿈 속의 사물처럼 비논리적인 세계이다. 작품의 제목 자체가 백일몽 같은 허상적 세계를 환기한다. 평소에 늘 열심히 하는 드로잉은 음악적 요소가 강하다. 수많은 드로잉들은 각기 다른 음악을 만들어내는 악보처럼 보일 정도이다. 부담 없이 소리를 그리는 작업에서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쟝르가 가질 수 있는 육체적, 물질적 저항은 최소화된다. 감각은 여러 매개 없이 바로 표현된다. 모태 언어였던 음악이 무의식과 표현을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 짓는 드로잉에서 지속적인 분출구를 찾는다. 그것은 사진 작품 속 허상(simulacre)같이 현실과 닮은 그림자(eikônes)가 아니라, 닮지 않은 그림자(phantasma)의 세계이다. 이예린은 미술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순수한 생성의 세계에 가닿으려고 한다.

 

출전; 비주얼 10호(한국 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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