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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문·박형진-한 공간에서 다른 그림으로 대화하다

정영숙

부부 미술가 강석문·박형진

한 공간에서 다른 그림으로 대화하다


사과농사 지으며 작업실 같이 쓰는 화가 부부,

전원생활 속 한국화와 서양화의 자연 교감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강석문·박형진 작가는 부부 사이다. 서울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각각 한두 번의 개인전을 연 뒤 1999년 여름 강씨의 고향인 경북 영주시 풍기읍으로 낙향했다. 과수 농가에서 쓰던 과일 창고를 개조해 두 사람이 사용할 작업실을 만들었다.

대개의 부부 작가는 한 공간에서 함께 작업하기를 꺼린다. 한 작가에게 무게중심이 쏠리거나 화풍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작업공간을 마련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공간에서 함께 작업한다. 칸막이도 없다. 작업공간이 두 사람이 움직이는 동선에 맞게 적절히 구분돼 있을 뿐이다. 강 작가는 동양화, 박 작가는 서양화라는 장르 차이도 있지만, 두 사람의 성향이 달라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더라도 화풍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고 의지할 뿐 미술가로서는 자신만의 독자적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강석문 “자연이 말하는 것을 그린다”


과수원에 거른 주고, 가지치고, 1년에 한 번 사과를 수확하며 땀 흘리고 있을 때 서울에서 작업에 매진하는 동료 작가들은 1년에 한 번 꼴로 개인전 개최 소식을 보내왔다. 하지만 맨발로 흙을 밟고, 좋은 농사를 위해 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과의 교감은 깊어졌고, 그 교감은 작품에도 반영됐다. 이 과정을 거쳐 강석문 작가는 개인전 주제를 ‘나도 군자’로 정했다. 새와 곤충, 꽃과 나무가 가벼운 듯 산뜻한 붓터치로 표현되고, 바람소리까지 담아내려는 듯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산에는 산새/ 들에는 들새/ 물에는 물새/ 들고 나는 새는/ 하고 많아도/ 울음소리 예쁜 새는/ 열에 하나가 드물지/ 웬일이냐구?/ 이유는 간단해/ 듣는 사람이/ 새가 아니란 거야.”

 이문구의 동시 <새>의 전문이다. 강석문 작가의 그림에서도 똑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작가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대신 자연이 말하는 것에 작가가 귀를 기울이는 자세, 그것이 군자의 태도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시기라고 했다.

 부부는 아들이 태어나던 해 주목 한 그루를 심었다. 눈과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나무, 붉은 열매까지 열리며 쑥쑥 크는 나무처럼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봄의 노래>, <주목처럼>, <너와 함께> 등 일련의 작품은 가정을 이루는 집과 나무, 그리고 꽃·풀·벌레가 한데 어울리는 따뜻한 공간이다. 농사꾼의 경험과 아버지가 된 후의 삶이 자연친화적이면서 무기교의 자연스러운 표현에 배어 나온다.

 강 작가는 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농담, 자연스러운 선의 맛을 대학 2학년 때 은사를 통해 알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사군자를 배웠고, 동양화의 현대적 변용도 결국 동양화의 기본에서 출발한다는 인식 아래 붓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작업공간에는 농담과 선의 흐름을 연습한 화선지가 가득하다.

강 작가는 빈 화선지를 앞에 놓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그날 작업을 생각하며 선을 긋고 또 그어 몸과 마음이 유연하게 일치하면 비로소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마음이 비워질 때까지 그 선 긋기를 100여 차례 반복하기도 한다.

 강 작가의 작품은 어린아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붓을 들고 대충 쓱쓱 휘갈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치기 어린 듯한 선들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그만의 아취가 풍겨 나온다. 채색은 분채를 주로 사용하는데, 색의 깊으면서도 투명한 맛을 살리기 위해 50회 이상 붓질을 한다. 그렇게 겹칠을 하다 보면 종이가 버티지 못한다. 때문에 한 번 채색할 때마다 '물의 두께'만큼이나 얇게 채색해야 한다.

 강 작가는 오랜 농사에서 농군의 마음을 체득했음인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미술가로서 당장의 명성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순수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망만 그득하다고 한다. 한국화가 중에서는 심사정을 가장 좋아한단다. 산수·화조·문인화에 두루 뛰어난 조선 후기의 대표작가다.

 “시골에서 살면 착해져요. 새싹이 자라는 것도 신비하고, 풀과 곤충도 또 다른 자식 같은 마음이 들죠. 생명에 대한 깊은 사고를 하게 됩니다. 악과 선이 있다면 자연히 선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앞으로도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예민한 감성으로 느낀 자연에 대한 사고와 자연과 인간의 화합의 세계를 더 깊고 간결하게 담아내겠다는 생각이다.


1      2 

1. 꽃과 벌레_143x78cm_장지에 먹, 채색_2008

2. 주목처럼_70x75cm_장지에 먹, 채색_2010


박형진, 관념적 사과에서 농부의 사과로


”사과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기 전, 내게 사과는 과일가게 광주리에 담겨있는 사과였어요. 그런데 이곳 사과밭에서의 사과는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박형진 작가의 글 중 <행복한 사과>에 관한 단상이다. 30대 초반, 젊은 여성작가가 사과밭에서 작업하며 느낀 것들을 그린 행복한 사과는 왠지 반어적으로 들린다. 조형적 형태로서의 사과, 작품 주제에 적합한 관념적 사과였다.

 하지만 2002년부터 박형진 작가의 작품 속 사과는 다르게 표현된다. 사과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의 마음을 읽고 커가는 나무의 형상으로 옮겨진다. 2003년 이후로는 <상당히 커다란 열매> <제법 커다란 열매> 등 주관적 경험을 넘어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으로 영글어간다.

 사과에서 시작한 소재는 새싹·강아지·새·사람 등으로 확장되고, 이들이 한 화면 속에서 공존하며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박형진 작가의 작업실 이젤 위에는 지금도 작업 중인 <상당히 커다란 새싹>이 놓여 있다. 새들이 새싹 밑에서 모이를 쪼고, 강아지는 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이는 자기보다 휠씬 큰 나무 같은 새싹에 물을 준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목가적 풍경이다.

 자칫 단순하게 보일 소재들을 두고 작가는 조형적 묘를 발휘한다. 가장 작은 요소인 새싹을 가장 크게 그리고, 제일 크게 표현될 듯싶은 사람을 가장 작게 그린 것이다. 조형적 특징은 크기의 대비만이 아니다. 형태의 단순화도 중요한 요소다. 간결한 선과 원하는 형태를 얻기 위해 캔버스에 여러 번 드로잉한 후 결정한다.

 ‘청소년의 자살’ 뉴스가 유독 많았던 2011년 가을. 박 작가는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계획해 왔던 <잘 자라라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맘먹고, 2012년 5월 개인전 때 아이들과 함께 식물을 키우는 <잘 자라라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했다. “작은 씨앗을 틔워 잎새의 식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로, 화분에 씨앗을 심은 후 인증사진을 찍는다. 그 작은 화분이 아이들에게 ‘마음의 쉼터’가 되어 주는 마음”이 기획 의도였다. 2~3개월이 지난 후 기획자에게 사진이 전송됐다.

 이 프로젝트는 작가의 삶의 반영이자 그림 밖으로 나온 움직이는 미술이다. 한편으로 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키우는 모성이 응축된 생명의 경이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는 교과서에 실린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식물을 키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경험을 통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과 정성스러움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학습에 지친 마음의 휴식도 되었을 것이다.

 전원생활은 시골에서 작업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었었지만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됐다. 비록 직접 손에 흙을 묻혀가며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스치는 감각을 놓치지는 않았다. 박 작가에게는 주변의 사물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는 예민한 촉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렇다고 소소한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밀하게 관찰하지는 않는다. 스치듯 관찰한 사물을 시간이 지나 불현듯 어떤 형상으로 떠오르면 그것을 작업으로 옮긴다.


 1 

2

1. 제법 커다란 새싹_acrylic on canvas_70.9x91cm_2013

2. 상당히 커다란 열매_acrylic on canvas_130x162cm_2003

독립성을 지켜주는 두 개의 창문


어떤 소설가가 박 작가와 대화하면서 이야기했던 ‘작은 정서’라는 말에 끌렸다는 박 작가는 ‘작고 사소한 것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던 어느 날 씨앗이 흙속에서 자라는 것을 보고 마술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2013년 발표한 개인전의 주제는 ‘새싹, 그리고 정원’이었다. 기존의 조형 방식도 보이지만, 새싹과 과일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자란 밭과 정원으로 대상이 확장된다.

 박 작가는 ‘남겨진 정원’ 시리즈를 통해 제2의 형식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형진 하면 떠오르는 커다란 새싹, 열매,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이 어울리는 간결한 형태의 조화를 다른 조형언어로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박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겠다며 대학시절부터 치열하게 작업했던 부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즐기면서 작업하는 편이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롤프 메르쿨레(Rolf Merkle)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20여년이 훌쩍 지나고 보니 박 작가는 그 누구보다 더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다. 남과의 경쟁보다 독립적 작업, 자신의 방식을 잘 이끌어가는 미술가의 작업 태도가 녹아 있다.

 강석문·박형진의 작업실은 한 공간에 있지만 창문은 두 개다. 강 작가의 작업공간에 난 창문으로 바라보니 예쁜 새가 지저귄다. 비록 내가 새가 아니라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천연색 깃털이 아름다운 새가 잠시 앉았다 간 매화나무를 찰나적으로 본 것만으로도 그 창문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 작가가 작업하며 바라보는 창문 밖으로는 과수원이 펼쳐진다. 구름도 흐른다. 두 개의 창문은 부부 작가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자연환경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조형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느끼는 마음의 눈, 그 힘에 따라 작품은 눈으로 보이는 환경 이면의 풍경을 담아낸다. 강석문 작가는 예술작품의 순수성을, 박형진 작가는 상상력의 폭을 넓혀가는 중이다.  


월간중앙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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