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회화와 서사
스토리텔링_다섯 편의 이야기 전 (9.13—11.10, 갤러리 화이트블럭)
나티 우타릿 전 (10.10-11.3, 갤러리 현대)
각 매체의 순수성을 향한 모더니즘의 진보는 회화에 있어서 문학적 요소를 배제해왔다. 미술은 공간예술에 속하기에 시간성(temporality)이 억압된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이후에 억압된 것들은 복귀하고 있다. 갤러리 화이트블럭의 스토리텔링 전은 참여한 다섯 작가에게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며, 갤러리 현대의 나티 우타릿 전은 회화에 차용된 서구의 오랜 재현양식에 내재된 알레고리가 있다. 미술이 아무리 추상화되었다 해도 관객은 그림 앞에서 어떤 내용을 묻는다. 작가 역시 작품 안에 은밀하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야기는 시간의 선을 따른다. A.A 멘딜로우가 [시간과 소설]에서 말하듯이, 결국 ‘시간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시간은 의미를 확실하게도 해주고 불확실하게도 해준다. 그러나 미술은 시간예술에서 확정된 바와 같은 선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롭다. 어느 부분을 먼저보든, 어느 작품을 먼저 보든 그것은 관객의 자유이며, 보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도 다르게 전개되며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 이러한 불확정성이 회화에 잠재된 이야기를 개방적 구조로 이끈다. 때로 그것은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열려있다.
스토리텔링 전에서 전소정, 이샛별, 우정수의 그림은 무슨 내용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이들의 그림은 꿈, 무의식, 타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시간, 즉 논리로부터 자유롭다. 영상이나 책자 같은 시간예술의 형식을 곁들인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소정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나 광부 출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몇 막으로 나뉜 무대극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순이로 설정되어 있지만, 유령처럼 익명적이다. 유령들은 연필과 목탄으로 그려진, 어두운 악몽 같은 장면에 출몰한다. 그들의 무대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이기 보다는 환상적인데,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끝없는 계단이나, 서커스 무대 같은 배경이 그러하다. 비슷한 인물이 여럿 배치되어, 한 인물의 여러 동세인지 여러 인물의 행동인지 모호하다.
캔버스 위에 목탄으로 그린 우정수의 칙칙한 그림도 수수께끼 같다. 숲 속에서 외계인의 시체를 묻으려 삽질하는 남자를 그린 [극좌표], 화장을 위해 쌓아놓은 나무들 앞에서 싸우는 듯한 두 남자를 그린 [화장], 가면 쓴 인물들이 맨얼굴의 소녀를 에워싸는 [도깨비들의 춤] 등에는 지구인과 외계인, 삶과 죽음, 동질성과 이질성 따위의, 배제되는 두 항목이 공존한다. 각각의 관계들은 생경하게 맞부딛치기에 부조리하게 다가온다. 화면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졌으나, 흑백 논리처럼 분명한 것은 아니다. [책의 무덤] 시리즈는 사회에 대한 풍자와 묵시록의 대가들을 오마주하는데, 여기에서 한장한장 뿔뿔이 흩어지려는 이야기들을 한데 묶는 것은 한권의 책이다. 이샛별의 경우 특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총천연색 꿈이다. 작가말대로, 그림은 ‘견고하게 지탱했던 논리가 붕괴하는 그 신비한 마술이 드러나는 사건’처럼 보인다.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이 되기 위해 작가는 일관된 논리를 가진다고 기대되는 현실의 틈새를 최대한 벌린다. [진화론자], [사라지는 순간], [소거], [클라인의 항아리]같은 작품 제목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초현실주의가 보여주듯, 인과의 연쇄 망이 끊어졌을 때 무덤덤한 일상에 묶여있던 에너지가 스르르 풀려나온다. 생략된 부분, 현실의 틈에서 환상이 번성한다. 그림은 비약과 도약의 무대가 된다. 마구 건너뛰는 무대의 주인공 역시 카니발적이다. 상의에 운동복을 하의에 타이즈를 신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주인공은 토끼 얼굴 또는 토끼 가면을 쓰고서 신비로운 사건 현장들에 동분서주한다.
서동욱,[s# 밤, 실내, 아이리스의 방], 유화, 2011년.
서동욱의 작품에서 영화와 그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그림은 영화의 한 장면 같고, 대사가 별로 안 나오는 영화는 그림 같다. 영화와 그림의 시간구조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최대한 근접한다. 영화는 남녀의 어긋나는 만남을 그리며, 인간적 관계에서 발생될 수 있는 쓸쓸함을 담는다. 일련의 이야기가 20여 분의 시간의 선을 타고 흘러가는 영화가 산문이라면, 그 중에서 유화로 그려진 장면들은 보다 압축적이라는 점에서 시적이다. 시적 장면들은 일상의 누추함을 더욱 깊게 하는 고독, 또는 누추한 일상을 마술적인 분위기로 감싸는 환희가 있다. 최진욱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스토리텔링을 완강히 거부하는 듯하다. 그는 에로 영화에서 본격적인 야한 장면이 펼쳐지기 위해 쓸데없이 나오는 여러 장면의 예를 들면서, ‘장면을 위한 장면’을 그렸다고 밝힌다. 그렇게 선택된 장면들은 야밤의 교정, 중국집에서의 회식, 야외에서 사생하는 학생들,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이 등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학교 괴담] 등으로 붙인 제목도 장면과는 별 관련이 없다. 평범한 풍경에서 ‘이상한 나라’나 ‘괴담’에 기대될 법한 환상적이거나 엽기적인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모호한 그림의 서사를 보충하거나 힌트를 주는 것이 제목인데, 그는 장면의 선택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그런 단서들을 배제한다. 추상미술처럼 그림을 그림으로만 봐달라는 것인가. 그러나 의례처럼 지나가는 소모적 일상이나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기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이 휙휙 칠해진 듯하면서도 단호한 선들에 실려 있는 그림들은 현실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볼 때마다 달리 배열(remap)되는 듯한 살아있는 붓질은 텅 빈 서사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생한 흐름을 간직한다.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붓을 든 화가의 현존을 포함한 현실 그자체를 ‘순수 묘사(pure-description)’(들뢰즈)하려는 회화적 야심은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파괴한다.
최진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유화, 2012년.
16-17세기 서양회화의 전범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나티 우타릿의 회화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전범이 된 시기의 작품들 자체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캔버스는 전용과 인용의 기법을 통해서 한 번 더 겹쳐 쓴 양피지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정립을 위해’ 쓴 크레이그 오웬스의 [알레고리적 충동]이 주장하듯,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알레고리는 복귀되고 있다. 나티 우타릿의 알레고리 풍의 회화는 정보사회의 소음과 잡음을 잠재우고 옛 시대의 어법으로 나지막이 속삭인다. 이 고풍스러운 회화의 공간 속에 고요하게 안치된 것은 현대의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익숙한 상품과 명품들이다. 심지어 한국 돈도 있다. 작품 제목도 옛글자체로 액자 위에 새겨 놓는 등, 대가들이 그림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에 21세기 동남아에 살고 있는 한 화가의 목소리를 덧입힌다.
상업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바로크 시대의 화려한 또는 일상적인 물건들에는 메멘토 모리나 바니타스 같은 알레고리가 있지만, 그러한 메시지는 상품의 지배가 더 완연하게 펼쳐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유효하다. 어쨌든 전범이 된 대가 못지않은 필력에 현대적 버전으로 각색된 메시지까지 겸비한 나티 우타릿의 회화는 달아오르고 있는 동남아 미술 시장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가 전범으로 삼은 유럽의 회화들의 배후에는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무적함대를 거느렸던 16세기의 이탈리아, 17세기의 네덜란드, 스페인 같은 열강들이 있었다. 생산이나 이동 수단의 혁명 외에 식민지에서의 폭력과 약탈에 기반 하는 자본주의의 성장은 그렇게 축적된 물건들에 대한 물신적 환상을 부추켰고, 전통적인 후원자를 잃고 익명의 미술시장을 위해 생산된 정물화는 귀족의 뒤를 이은 부르주아의 당당한 모습을 담은 초상화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이다. 정물화나 초상화라는 재현양식은 미술사적으로도 소유나 지배의 양식과 밀접하다.
자율화된 시장에서 생산된 정물이나 초상은 지금도 광고의 전범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화는 상품의 내용과 형식이 완벽히 통일된 예다. 작가의 고향 태국은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격지 않았다지만, 자본주의에 내재된 세계화의 흐름은 예외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그가 태국에서 받은 미술교육은 서구의 아카데미를 그대로 재현한 시스템에 충실하다. 한국에서의 첫 전시 제목은 ‘우스꽝스러운 낙천주의’인데, 실존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로 자처하는 그가 염려하는 낙천주의자들은 물질적 풍요와 진보를 믿는 이들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적 풍요는 주변과 중심을 만들었다. 아시아는 약진하고 있지만 아직 주변부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작가는 대걸레를 들고 있는 궁중 광대풍의, 또는 자기에 맞지 않은 큰 옷을 입은 난쟁이를 그린 작품들에 [we are asia]라는 자조적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에 그의 냉소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작가가 자화상이라고 까지 말하는 이 난쟁이는 누구인가? 서구에 의해 타자화 된 동양인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준이 되었던 동일자는 정상인가? 타자들을 착취하며 성장했던 동일자는 거인이라는 또 다른 괴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라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들’(자크 르 고프)이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난쟁이를 우습게만 볼 것도 아니다. 다수의 주변부를 타자화했던 문제적 근대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의 회화적 패러다임에 충실한 나티 우타릿의 그림은 일종의 동종요법인 셈이다. 작가는 유럽 중에서 명품 백화점들이 몰려있는 파리의 오스만 대로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그곳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아시아인들이 관광과 쇼핑을 한다. 그들이 돈을 펑펑 쓰는 소비자라면 우대받지만, 노동자나 불법체류자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러나 옛 그림이든 21세기에 새롭게 각색된 그림이든, 그림을 통해서 세속적 물질주의를 각성시키기에는 그림 자체가 물신주의의 정점에 이른 고가의 상품이라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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