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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아 / 몸에 새겨진 고통과 쾌락의 기호

이선영

몸에 새겨진 고통과 쾌락의 기호

(11.18-12.27, 가인화랑)

 

 이선영(미술평론가)

     

지난 10 여 년간 장지아의 작품을 단순한 전시회가 아닌 돌발적 사건처럼 접해왔는데, 이번 전시의 면모는 일견 차분하다. 그동안 장지아의 작품은 엄청나게 ‘세다’는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가지게 된 필자는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에 가보니 심플한 좌대 위를 이불 또는 탁자보처럼 덮은 통가죽, 붉은 벽돌, 낡은 수술기구 등이 전부여서 썰렁한 기운마저 돌았다. 서서 오줌 누는 여자(2007년 ‘omerta;침묵의 계율’ 전, 대안공간 루프)나 가학 피학적인 행위가 등장하는 이전의 작품(2004년 ‘where is the center of gravity’전, 아트선재-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I confess’전, 정미소)에 비해 선정적인 면은 없지만, 물질의 형태로 그 강도와 섬세함을 보존한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통과했을 고통과 열락의 시간은 차갑게 물질화된 채로 해동을 기다린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1]

 

장지아의 작품은 강렬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예술적 승화에 연연하지 않지만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정교하다. 유기체 특유의 항상성을 죽어서도 유지하면서 그 표면에 이미지를 새기는 것에 강한 저항을 보여주는 가죽, 피나 피 같은 붉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피 자체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사물들, 이국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에 색다른 사물의 질서를 부여한 언어적 상상력 등이 그러하다. 필자가 작가를 접해 본 경험으로 보자면, 장지아의 작품의 세기는 유별난 엽기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천진함과 작업에 대한 집요한 성실성에서 오는 것 같다. 천진함과 성실함이 결합되면 두려울 게 없다. 요컨대 앞뒤를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는 맹목적 자세는 자신도 모르게 금기들에 접근하게 한다. 

 

장지아의 전시들의 부산물이었던 선정성은 금기와 그 위반의 게임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몸은 금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몸은 정상과 이상이 판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이다. 몸이라는 가장 민감한 경계의 위반은 자잘한 상처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진폭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 뿐 아니라, 열락과 초월도 가져온다. 그것은 비천함과 숭고를 오고간다. 금기를 위반하는 폭력을 성스러움으로 간주하는 위반의 철학자들은 예술을 종교의 후예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기와 그 위반이라는 사건이 어둡고 쇠락한 기운으로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그렇게 매혹되지 않을 것이다. 금기라는 한계를 넘어 절대를 향해 질주하려는 본능은 그 분출구를 찾는데, 장지아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해 온 몸은 그 전쟁터가 된다. 

 

가죽과 피, 그리고 금속 용구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몸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한다. 날카로운 금속은 내장과 살을 보호하는 피부를 뚫고 붉은 체액을 바깥으로 유출시킬 것이다. 화공약품과 살지지는 냄새를 맡으면서 가죽위에 인두질 드로잉을 하는 행위, 도대체 저것들로 무슨 수술을 했을까 싶은 야릇한 금속 도구들은 유기체의 고통과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그 결과물은 시각적 쾌감을 주는 예술작품이자 치유이다. 금속과 살의 접합은 사도매저키즘같은 일탈적인 성적 관행에서, 일상적으로는 피어싱이나 문신 같은 하위문화의 장식에서 유희적, 쾌락적으로 등장한다. 장지아의 작품에서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는 지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장지아론을 집필한 류병학이 말하듯이 ‘누군가의 고통은 누군가의 쾌락’이다. 

 



[작은 가죽들 1]

 

소한마리의 가죽이 통째로 등장하는 작품 위에 새겨진 것은 한 무리의 젊은 작가들이 중국 오지를 돌아다니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벗겨진 피부 위에는 이국적 문화와 자연을 즐기는 인간들이 그림지도처럼 새겨져 있다. 작가는 중국의 운남 지역에서 고택의 처마 밑에 살 껍질을 벗겨진 채 통째로 매달린 인체 크기의 고깃덩어리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존된 이 단백질 공급원은 가축의 도살이나 가공이 금지된 곳에서 행해지는 현대적 방식과는 낯설다. 고즈녘한 동양적 풍경과 중첩된 거대한 고깃덩어리는 은폐된 삶의 진실을 불현 듯 드러낸다. 삶을 위해 희생된 유기체의 고통은 작업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큰 작품의 경우 인두로 한땀한땀 수를 놓듯이 하루 10시간 넘게 꼬박 3개월을 바쳤다. 

 

부담 없는 드로잉 같지만, 거의 조각에 가까운 작업이다.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인두질 작업은 울룩불룩 우는 가죽만큼이나 작가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했을 것이다. 작업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각인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기억과 고통의 인과 관계를 다룬다. 위반의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기억이 심어질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그것은 달구어져야 한다. 부단히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니체는 인간에게 기억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피와 고문, 그리고 희생 없이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모든 종교적 의례의 가장 잔인한 절차는 고통이야말로 기억술에 가장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덕택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도달했다. 

 

이러한 니체의 음울한 결론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가호나 계몽화 된 개인들 간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수많은 피와 잔혹의 결과임을 알려준다.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니체의 역사관이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운명에 있는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 세계임을 밝힌다. 헤이든 화이트의 니체에 대한 독법에 의하면, 타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은 가학적인데, 부유해진 사회는 가학적 쾌락을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주어진 것이든 받아들인 것이든 고통은 비축되고 입안되고 과세되고 국가화 되고 사회화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고통이 자본화된다. 모든 자본화된 현실에는 고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삶이란 그 근본기능에 있어서 침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이며, 항상 다수의 약한 권력을 희생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벽돌 1]

 

민주주의와 이성, 역사와 진보에 대항하여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하는 니체의 사상은 반동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낙인찍혔지만, 인간의 삶에 그러한 어두운 구석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평소에 동물실험이나 학대 등에 열렬히 반대하는 장지아가 절대 그러한 불온한 사상에 물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약육강식에 기반 하는 정글 같은 이 자본주의 사회가 니체주의적이라는 현실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근대적 진보가 의심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먼저 복권된 철학자가 니체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생적 현실을 오성이나 이성의 매개 없이 날것으로 표현하려는 이들에게 니체의 울림은 거대하다. 타자의 희생이 암시된 의례적 요소, 그것이 암시하는 폭력과 성스러움, 고통과 쾌락의 동시적인 분출은 초창기 작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흐른다.

 

다른 가죽 작업에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화상, 가혹한 예술노동에 시달렸을 손, 누군가의 섭식의 대상이 된 유기체,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법과 강령, 해골끼리 혀를 교환하는 장면 등이 보인다. 이미지들은 마치 꿈이나 무의식처럼 뚜렷한 인과관계 없이 띄엄띄엄 새겨져 있지만, 그것들은 재료의 강한 저항을 이겨낸 가혹한 산물이며 그 모두 인간의 삶을 울고 웃게 하는 사랑, 죽음, 광기, 예술, 욕망과 밀접한 도상이다. 그것들은 살과 피를 연상시키는 재료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장지아는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그만의 방식으로 경감시킨다. 작가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을, 무거움에서 가벼움을 길어 올린다. [아름다운 도구 시리즈]는 북경의 벼룩 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기능적 물건에 새겨진 장식은 유물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외과용 수술 도구에 작가가 멋대로 붙인 해설은 수상쩍은 치료보다는 고문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것은 2011년 ‘I confess’ 전에 나온 가학피학적인 도구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한마리를 도축하여 받은 피로 거칠게 만든 벽돌이나 아이가 대충 만든 듯한 어수룩한 사물들은 바로 이렇게 생긴 작품을 만들기 위한 그 모든 피비린내 나는 노력을 가벼운 농담처럼 만든다. 살아있는 피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사물-예술은 기괴하다. 원래 소피는 석고랑 만나면 분홍이 아니라 회색으로, 산소와 만나면 검붉게 변한다. 정육점에 진열된 붉은 살코기는 살이 아니라 피의 색이다. 고기는 실은 피의 맛이다. 전시 오프닝 날 붉은 색 일색으로 나온 음식물은 오감에 호소해온 장지아 작업의 스타일을 알려주는 에피소드이다. 소소한 형태로 만들어진 사물엔 희생된 생명의 기운이 담겨있다. 이 작업을 할 당시 작가는 피를 쏟으며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 그 작업을 해야 할 필연성이 있었기에 작업은 냉혹하게 진행되었다. 그 순간에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바로 그 필연성이 예술 및 예술가를 잔혹한 운명에 몰아넣는다.       

 

출전; 월간미술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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