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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지의 겹침을 통한 ‘사이(間)의 미학-권영우論

윤진섭

화선지의 겹침을 통한 ‘사이(間)의 미학-권영우論


                                                

Ⅰ. 한지작업의 출발: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

 理美知연구소가 발간한 권영우 화집에는 ‘종이작업의 시작과 실험:1962-1977’이란 제하에 1965년에 제작한 추상화가 맨 앞에 실려 있다. 여기에 명기된 연대를 참고해 보면 1962년에 처음으로 권영우가 종이작업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1962년부터 64년까지 제작한 작품들이 이 화집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나는 이 화집에 실린 도판과 연대를 근거로 권영우의 작품세계에 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의 작품이 지닌 의의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권영우는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정립한 한지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가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50여 년에 이르는 긴 세월을 한지에 바친 정열과, 한지가 지닌 조형적 가치에 그 누구보다도 일찍 눈을 떠 이를 필생의 화두로 삼은 작가적 혜안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전후 우리의 화단에서 한지가 주된 표현의 매재(媒材)로 떠오른 때가 1980년대 초반이니까 그의 한지작업은 선구자적인 것이다. 일찍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기생으로 화업에 발을 들여놓은 그가 선택한 전공이 동양화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화선지를 비롯한 한지에 일찍 눈을 뜰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한지작업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선배나 그와 비슷한 연배의 동양화 작가들이 단순히 화선지를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일종의 화지로 여겼던 반면, 그는 화선지 그 자체의 표현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화선지가 지닌 고유한 성질과 독자적인 미적 가치에 대한 발견이 오늘날 그를 만든 주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문화와 전통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박물관 진열대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에 그친다면 그런 문화나 전통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흐르는 문화가 되어야지 멈춘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흐르는 문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날로 새로워지는(一日又日新)’ 문화를 이름이다. 전통 역시 마찬가지로 박물관에 박제가 되어 보관돼 있는 물품이 아니라, 그 정신이 면면히 살아 오늘의 문화적 상황에 접맥된 그런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권영우의 한지 작업은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도도한 정신이 활력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60년대 초반의 한지 작업인 것이다. 이 시기는 권영우의 전체 화력에서 첫 분수령을 이룬다. 

 1950년대 후반의 구상적 화풍과 단절을 이루는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접어들어 그는 구상적 화풍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전통에 대한 깊은 숙고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시 그의 발언을 들어보자. 


 “전통은 흘러야지 멈춰버리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이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지요. 작가는 움직여야 합니다.”


 다시 강조되는 전통론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얼마나 전통을 중요시 했는가 하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역설적’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추상으로 일관되고 있는 그의 작품 경향이 전통에 대한 거부, 즉 ‘전위(avant-garde)’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 전위나 혹은 ‘실험’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작업을 수행하는 실험 정신에 연유한다. 실제로 그는 한지를 가지고 숱한 실험을 반복해 왔다. 어느 날 표구점에서 우연히 목격한, 배접용 판에 여러 겹 겹쳐 발라진 한지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후 한지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한지에 대한 실험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Ⅱ. 한지의 물성 표출과 ‘사이(間)’의 미학 

전통을 거부하면서도 전통에 접맥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권영우가 취하고 있는 창작 행위의 근간이다. 그는 전통을 자기 작업의 토대로 삼아 그 정신은 살리되 형식을 깨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그 정신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이(間)’다. 종이와 종이의 사이, 그 사이에서 무수하고도 미묘한 색의 뉘앙스와 결이 파생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종이의 변주가 바로 권영우의 화선지 작업의 요체인 것이다. 그것은 유리의 투명한 성질과는 달리, 우리의 전통 창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완충적이고 반투명한 한지의 성질에서 나온다. 그의 작업이 전통에 기대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문화적 특질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지가 지닌 반투명한 성질은 그의 작업의 주된 방법 중의 하나인 종이의 ‘겹침’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한지를 한 장 한 장 덧붙일 때마다 드러나는 ‘사이’의 미학, 그 은근한 계조(gradation)의 맛이야말로 권영우의 한지 작업이 지닌 또 다른 요체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지의 반투명한 물성을 잘 파악하여 조형화한 것이 바로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무제(Untitled)> 연작이다. 이 ‘무제’라는 타이틀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화풍의 전환을 이룬 이후 현재까지 제작한 작품에 일관되게 붙인 명제다. 그는 작품의 내용을 보조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즉 연상적인 명제를 기피함으로써 작품 자체의 즉자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그 첫 출발이 바로 60년대 중반의 <무제> 연작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화선지의 반투명한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바탕지에 사각 혹은 긴 띠 모양의 화선지를 겹쳐 붙였을 때 나타나는 조형적 아름다움에 주목하였다. 이 연작은 사각형을 기본 단위로 한 구성적 경향의 것이었다. 이 ‘겹침’의 기법에 바탕을 둔 조형적 실험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는데, 종이를 한 겹 한 겹 붙여가면서 손으로 밀거나 찢음으로써 압력에 의해 변형된 종이의 흔적을 표출시키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는 또한 둥글게 유기적인 형태로 찢은 화선지를 여러 번 덧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나이테 모양의 계조 효과를 유발하는 것들도 있고, 화면에 무수히 구멍을 뚫은 것들도 이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70년대 후반에 갈수록 행위성이 강화되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는 화선지를 화면에 바른 다음 ‘긁고, 밀어붙이고, 찢고, 그 위에 또 바르는’ 다양한 행위를 베푼다. 그런 행위 뒤에 나타난 결과는 어떤 동작을 가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거나 종이의 표면을 둥글고 볼록하게 처리한 것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 다양한 변주는 모두 한지라고 하는 매재의 물성적 특성을 이용한 결과물이다.   



Ⅲ. 파리 시절(1978-1989):색의 도입과 내재율의 시기

 이 시기는 크게 봐서 색이 도입됨과 동시에 직선에 의한 리듬이 나타나는 것이 이전 시기의 양식적 특징과 구별된다. 부분적으로는 60년대에 시도됐던 손가락에 의한 구멍 뚫기와 칼로 종이를 찢는 행위가 병행되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색의 도입이다. 그는 1978년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도불하는데, 이 시기에 청색, 검정, 연한 갈색, 녹색 등등의 단색조가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한지라고 하는 매재와 행위를 가하는 신체가 1:1 대응관계를 이루었다면 거기에 덧붙여 색채라고 하는 또 다른 재료가 첨가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분수령이다. 그는 화선지에 자를 대고 칼이나 기타 자신이 고안한 예리한 도구로 흠집을 낸 다음 거기에 색을 칠하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때 색칠은 종이의 전면이나 후면에서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행해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종이의 후면에서 색을 칠하는 배채법은 우리의 옛 초상화 제작에 사용되던 전통 기법으로 그의 작업에서 전통이 응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의 작업은 화선지로 캔버스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한 장 두 장 또는 여러 장을 겹쳐 바른 후, 그것을 찢고, 뚫고, 그리고 채색을 한다. 화면의 앞에서도 칠하고 뒷면에서도 칠하며 앞으로 번져 나오게도 한다. 겹쳐지는 화선지의 수도, 바르는 풀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찢기고 뚫릴 때 그 상황이 각각 다르고, 채색을 할 때 채색을 받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것은 그때그때 새롭게 또는 우연히 나타나는 현상을 기대하고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효과는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권영우는 그러한 상황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그의 이 시기 작품은 계획된 필연과 결과로서의 우연이 결합된 것이다. 자를 대고 종이를 예리한 도구로 그어 흠집을 내는 행위, 손가락으로 무수히 구멍을 뚫는 행위 등이 계획된 필연이라면, 물감을 흘리거나 칠을 한 후에 나타나는 종이의 반응은 우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색은 하나의 보조적인 재료가 아니라 종이와 행위성에 버금가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게 된다. 



Ⅲ. 귀국 이후(1990-  ):부조 회화와 입체에 대한 실험

 1989년에 파리에서 귀국한 뒤, 권영우는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더욱 왕성한 실험에 빠져든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부조 회화와 입체 작업에 대한 천착이다. 부조란 말 그대로 캔버스에 기성의 사물을 부착하고 그 표면을 화선지로 뒤덮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색은 다시 사라진다. 사물과 종이,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는다. 기성의 사물로는 부채, 자동차 번호판, 페트병, 나뭇가지, 못, 노끈, 바가지, 낚시 바늘, 골판지, 방패연 등등이 동원되고 있다. 이 사물들은 화면 안에서 변형되거나 집합적인 형태를 띠면서 다양한 조형적 질서를 드러낸다. 그것은 우연의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적인 감각이 개입된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분수령이다. 

 요약하자면 60년대 초반, 구상적 화풍에서 추상으로의 전향이 첫 번째 분수령이요, 70년대 후반 파리 체류에 나타난 색의 사용이 두 번째 분수령, 1989년 귀국 후에 용인 시절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물의 도입이 세 번째 분수령이다. 

 이 세 시기를 통해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선지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화선지와의 씨름이라고 해야 옳다. 그는 화선지를 가장 중심적인 매재로 선택해서 재료의 표현가능성을 넓혀왔다. 거의 60여 년에 이르는 권영우의 화력은 전통에 입각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에 온 정열을 바쳤음을 보여준다. 그 추진력은 왕성한 실험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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