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카탈로그 서문〕
‘빛 무늬’의 반투명한 숨결
김성호(미술평론가)
빛 무늬
화가 박지현은 ‘빛 무늬’를 그리고 만든다. 우리의 일상에서 ‘푸른빛 무늬’ 혹은 ‘붉은빛 무늬‘처럼 ‘형용사+빛 무늬’로 사용되는 용어를 단순화시킨 이번 전시 주제어 ‘빛 무늬’는 그녀의 작업에서 시각 예술에 대한 인간 주체의 인식과 감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표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빛’이란 인간이 물리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가시광선(Visible light)을 지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색’이란 빛이 인간의 눈을 자극함으로써 생기는 인간의 물리적, 생리적 지각현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의 물리적, 생리적 과정이란 눈의 망막, 더 정확히는 시세포인 원추세포에 도달한 빛이 전기적 신호를 대뇌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을 지칭한다. 이처럼 그녀가 선택한 주제어 ‘빛 무늬’는 빛과 색이라는 것이 우주에 만연한 보편적인 물리적 현상이기 이전에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지각 과정 없이는 결코 현시되지 못하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한편, 빛(光)과 색(色)은 쌍둥이거나 형제들이다. 생각해보자. 빛이 물체를 비추었을 때 반사, 흡수, 투과, 굴절, 분해 등의 과정을 통해 물체의 특성에 따라 그 시각적 결과물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색’이라는 점에서, ‘색’은 ‘빛’의 전령이자 같은 위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녀가 ‘푸른빛 무늬’와 같은 쓰임새로부터 ‘특정의 색’을 떼어내고 ‘빛 무늬’라는 용어만을 사용하는 까닭은, ‘빛과 색’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과학적 현상의 결과물이면서 단지 인간의 지각의 투여로 생겨나는 다른 이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빛과 색’ 사이의 변별되지 않은 ‘빛 무늬’라는 작명은 자신의 창작 안에서 융합된 두 개념이 관객의 생리적, 심리적 지각 작용과 교류하면서 어떠한 심미적 변화를 일으키는지 성찰하려는 호기심 가득한 창작 태도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박지현의 ‘빛 무늬’는 궁극적으로 ‘빛과 색’이라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창작으로서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를 성찰하는 그녀의 인간 시각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으로부터 생명력을 입는다. 즉 ‘빛 무늬’라는 물리적 현상을 자신의 창작물에 투사하면서 그것이 감상자의 생리적, 심리적 지각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조형실험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녀의 작품에 내재한 미학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중첩의 반투명 회화
박지현의 이번 개인전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빛 무늬'라는 것이 어떠한 특정 광원(光源)에 대한 실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보다는 그것을 투과시키거나 가리는 효과들을 실험하는 겹겹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혹은 콜라주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 ‘빛 무늬’라는 작품명을 ‘드러냄’보다는 ‘감춤’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박지현은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일차적으로 일련의 꽃, 식물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드로잉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창작언어로 탄생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전통 한국화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빌려와 자신의 언어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그림의 바탕이 되는 드로잉 자체를 ‘현대적 화훼도(花卉圖)’라 지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1차적인 드로잉이 완성된 후, 작가는 그것을 화선지, 장지는 물론이고 포장지, 색지 등 다양한 종이들 위에 옮겨낸 후 그 형태를 일일이 오려내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친다. 이윽고 오려낸 종이들을 겹겹이 패널 위에 쌓아올리는데, 겹쳐진 개체들을 약간씩 비껴서 붙이거나 아예 원래의 위치로부터 이탈시켜 붙이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판본으로부터 오려진 10여 점의 드로잉 이미지들은 한 작품 안에서 어떤 경우에는 쌍생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개체처럼 보이기도 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본(畫本)을 “그림의 바탕이 되는 종이, 천 따위”라고 할 때, 그녀에게서 화본이란 궁극적으로 애초의 드로잉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십여 장의 분신 이미지들 역시 화본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담당하게 된다. 동형의 분신 이미지들이 파피에 콜레 혹은 콜라주의 형식으로 겹쳐지면서 하나의 작품을 비로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화본’의 역할로부터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는 종이는 집적된 콜라주들 전부를 마지막으로 뒤덮는 얇은 ‘한 장의 순지(純紙)’이다. 이 마지막 종이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인 동시에 그것을 보존하는 ‘표지(表紙)’ 혹은 프레임이 된다. 그것은 원래 비어 있으되 가득 채워진 공간이기도 하다. 즉 ‘빛으로 가득 채운 여백의 공간’이 된다. 아울러 그것은 관객이 그 많은 종이 콜라주들의 ‘집적 흔적’을 작품 밖에서 투과해서 보는 반투명의 창(窓)이자 인터페이스(interface)가 된다. 이 얇은 종이 한 장으로 그간 작품 창작에 투여되었던 느릿느릿한 진행형의 시간성은 정지의 담론으로 완결되며, 복잡다기함을 낱낱이 드러냈던 낱장들의 ‘복수 이미지’는 반투명의 세계 안에 포섭되면서 흐릿한 ‘단수 이미지’의 정체성으로 급변하게 된다. 투명함과 불투명의 세계에 다리를 놓고 있는 그녀의 ‘반투명의 작품세계’가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색종이를 오려서 콜라주로 만든 마티스(Matisse)의 말년 작품을 흔히 ‘색종이를 잘라서 붙인 불투명 회화’란 뜻에서 ‘잘라낸 과슈화(Gouaches découpés)’라고 지칭한다면, 우리는 박지현의 작품을 ‘종이를 잘라서 겹쳐놓은 반투명 회화’란 의미에서 ‘중첩된 반투명 회화(Overlapped translucent painting)'라 부를 만하다. 그녀의 ‘반투명 회화’는 화선지라는 한국화 전통의 매체를 통해서 콜라주, 몽타주, 융복합에 이르는 서구적 조형방식을 횡단시키면서도, 종국에는 무수한 종이 콜라주들의 차별과 대립을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동양 전통의 ’불이(不二)’의 세계마저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현대적 한국화의 지평을 모색한다고 평할 수 있겠다.
반투명한 ‘피부와 숨결’
그녀의 반투명 회화는 인간의 피부와 같다.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 인간의 눈, 귀, 코와 같은 감각기관 때문에 곧잘 망각되는 ‘피부’는 ‘몸으로서의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근원적 인터페이스이다. 그것은 인간 몸과 세계 사이의 자연적 경계(Natural boundary)이자 인터페이스이다. 거기에서 다종다양한 소통의 체계들이 생산된다. 접촉으로서, 악수로서, 포옹으로서 말이다.
박지현의 작품에서 ‘피부’라는 은유는 구체적으로 마지막에 올라선 한 장의 '순지'로 표상되지만 그녀의 작품세계를 통찰해볼 때,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모든 낱장의 종이 콜라주들에 해당된다. 즉 군집체로서의 피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피부’ 역시 그녀의 작품처럼 ‘표피, 진피, 피하지방층’처럼 다양한 층위들로 구성된 낱장들(혹은 개체들)의 군집체이지 않던가? 땀샘, 모낭, 피지샘, 혈관들이 모인 하나의 군집체의 자격으로서 ‘피부’는 외부의 유해한 자극에 대한 장벽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외부 세계와 열린 소통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런 차원에서 박지현의 ‘반투명한 회화’는 ‘반투명한 피부’의 열린 군집체 개념을 잇는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녀의 ‘반투명한 회화’가 담고 있는 ‘반투명한 피부’라는 은유는 ‘겹과 결’에 대한 ‘존재론(특히 동양철학의 존재론)적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살펴보았던 중첩의 반투명성은 결국 ‘겹’이라는 개념에 대한 실천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작품에서 실제로 확인해낼 수 있듯이, ‘겹’이란 개체와 낱장들이 중첩되며 만들어내는 과정의 현상학이다. 마치 겹겹이 숨겨져 있던 꽃송이를 자신이 몸체 안에서 피우는 한 떨기 식물의 생장학(auxanology)처럼 말이다.
나아가, 박지현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결’이란 개념은 ‘겹’이 창출하는 규칙적인 평정의 상태를 지칭한다. 생각해보자 ‘결’의 미학은 정신의 세계, 특히 이치, 도리, 원리, 섭리와 같은 동양 전통의 ‘리(理)’의 정신세계와 만난다. 한자 ‘리(理)’를 해체한다면 ‘옥(王=玉)’을 ‘단위체(里)’로 쪼개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단위체들이 중첩되어 이룬 ‘결’의 세계는 이러한 ‘리’의 세계를 실천한다. 마치 우리의 ‘마음결’이 한자로 ‘심리(心理)’인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에서 ‘결과 리’의 만남이 이루는 평정 상태는 외견상으로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는 한 장의 종이로부터 표상되지만, 이것은 완성지점일 따름이다. 그녀의 작품 전체가 ‘군집체로서의 피부’처럼 ‘결’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제작 과정 속에서 개별 콜라주들이 서로 어긋나게 중첩, 집적되면서 창출되는 복수의 이미지란 개별체들이 꿈틀대는 대립적 이질성(heterogeneity)이 상사성(similarity)으로 순화되면서 이르게 되는 평정 상태이다. 따라서 그것의 결과인 한 폭의 신비로운 화면은 이러한 ‘결’의 미학이 유감없이 실천된 것이라 할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결의 평정상태는 사실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박지현의 작품들 역시 개별체 콜라주들의 이질성들(채우기/비우기, 침투하기/포용하기, 도드라지기/균질화하기 등)이 지속적으로 작품 내부에서 운동하면서 최종적으로 평정의 상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안개가 낀 듯,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박지현의 작품에서 선보이는 평정의 상태는 사실 매체를 실험하는 그녀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치열한 창작의 노동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현된 것이다. 즉 우리에게 마치 선(禪)의 명상의 단계에서 선보이는 ‘심신일여(心身一如)’와 같은 평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그녀의 작품은 실상 전투와도 같은 창작의 과정과 더불어 이질성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싸웠던 치열한 어떠한 운동의 소산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중첩의 반투명 회화’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실천하는 예술 실험의 장(場)이다.
작가 박지현이 아틀리에서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일구어낸 ‘중첩의 반투명 회화들’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하나의 '신비의 정원(Secret Garden)'이 될 듯하다. 그녀가 담은 흐릿하고 아련한 식물 이미지들은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듯 보인다. 들숨과 날숨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거친 호흡들을 다듬어 평정의 상태에 이르게 만든 따뜻하고 생명력 가득한 ‘숨결’처럼 말이다. 혹은 ‘생명의 숨’으로 번역되는 인도의 프라나(prāṇa) 또는 중국의 기(氣)와 같은 상태로 말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다양한 조형적 실험들을 계획하고 있다. 예를 들면, 패널 위에 종이 콜라주의 중첩 이미지를 올리는 현재의 방식 외에도 나무 패널 대신 투명(혹은 반투명) 아크릴 판을 사용함으로써 중첩의 의미를 좀 더 다른 방향에서 탐구하거나, 인공조명을 통한 그림자 효과를 실험하거나, 평면에 부가되는 설치작품으로의 확장을 고려하는 방식들로 말이다. 그녀의 작품이 어떠한 현대적 방식으로 확장되든 그녀가 현재 천착하고 있는 ‘빛 무늬’라는 주제와 ‘반투명의 숨결’과 같은 ‘겹과 결’에 대한 미학적 사유는 앞으로도 그녀의 작품을 지탱하는 근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출전 /
김성호, '빛 무늬의 반투명한 숨결', (박지현전, 2013. 8. 13∼8. 30, 수원미술전시관 프로젝트 스페이스II)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