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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없는 현재

이선영

미래 없는 현재

 

구현모 전 (2.6-3.7, pkm 갤러리)

미래가 끝났을 때 전 (2.7-5.10, 하이트컬렉션)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룹전인 ‘미래가 끝났을 때’와 구현모 개인전에는 젊은 작가들의 미래에 대한 의식이 잘 드러난다. 이 전시들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어떤 든든한 토대나 나침반의 부재, 탈주보다는 방황에 더 가까운 비틀거리는 움직임이 발견된다. 젊은 작가들의 미래에 대한 의식은 가까운 과거로부터 당면한 현재까지 예술하며 영위하는 삶을 작품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미래에 대한 의식은 밝지 않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물질적 진보를 이룬 한국 사회에는, 전체의 파이는 커졌지만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은 매우 적고 그마저 불확실해졌다는 박탈감이 팽배해 있다. 전시된 작품들의 면면은 플러스 알파의 에너지가 더 필요한 예술적 삶은커녕, 평범한 삶을 살기에도 녹록치 않은 현실이 있다. 물론 그 어느 시대도 삶은 수월치 않았다. 그러나 전통 같은 과거의 확실한 가치가 무너진 이래, 미래에 대한 가중치가 높아진 현대의 변화무쌍한 과도기도 지나가고, 이제 모든 것이 촘촘하게 매뉴얼 화 되는 경향이 확실해지는 즈음, 미래는 더욱 답답하게 다가온다. 전통적 관례에 의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모험하듯 대할 수는 없다. 뻔하게 보이는 상황은 곧 닥쳐올 고난을 잘 모른 채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 것과도 다르다. 순진한 무지는 용기를 줄 수도 있고, 그 무지막지한 노력들이 예상 밖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학습된 고정된 가치들은 사전에 의욕을 꺽는다. 특히 주어진 틀을 거부하는 예술가에게 사회의 전면적 코드화는 더 큰 고통이다. 

 

코드는 코드를 잘 습득하고 이용하는 이들에게나 합리적인 과정일 뿐이다. 미래는 모더니티가 중시하던 가치였다.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에서 현대는 역사적 사건과 과정이 가속화된다는 의식과 미래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근대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으며, 새로운 것에 개방되어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이때 미래의 세계는 현재나 과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미래의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진다. 코젤렉은 유토피아인 미래를 앞당기겠다는 기대가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가속 역시 근대를 규정하는 시간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현대성은 ‘새로운 시대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시대의식’(하버마스)이 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비중과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미래를 담당한 젊음의 가치도 높아졌다. 각종 선언문으로 점철된 근대의 문예사조에는 혁명, 진보, 새로움, 유토피아에 열광하는 파토스로 넘친다.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적 확신을 내장한 젊은 예술가들은 정체된 삶과 예술에 활동적 변화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미래가 어느 순간 끝장났으며, 미래와 더불어 젊은이들도 급속하게 주변화 되었다. 미래(와 그 담지자인 젊음)는 근대적 계몽 자체에 내재된 부정적 측면, 즉 도구적 이성(오성)의 지배가 점차 공고화됨으로서 급속하게 사라져 갔다. 모더니티는 규율과 통제, 객관화와 정량화,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초창기 근대를 이끌었던 자유와 자율적 주체의 소리 없는 추락을 말한다. 

  


최윤, [국민매니페스토]

 

하이트컬렉션의 ‘미래가 끝났을 때’전은 그 전시제목이 유래한 작품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를 인용하면서, 미래가 끝난 시점을 1970년대 후반으로 특정한다. 그 시대와 현재가 공유하는 것은, 정보기술의 도약과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무한 경쟁이 가속화된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진보와 새로움에 바탕 하는 근대의 종말에 대한 담론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온 시기와 겹쳐진다. 각종 불확실성을 설파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이 전시를 이루는 11명의 작가(팀)는 불특정 다수의 경쟁구도, 또는 하나의 관점으로 작가들을 줄 세우지 않고 선배 작가들의 추천을 통해 구성되었다. 작품들은 젊은 작가들의 취약한 사회적 위치가 두드러지고, 일상 속의 진부함에 녹아나는 과정들, 그 속에서 작업하는 자의식이 표현된다. 이양정아는 [300/20 프로젝트]에서 서울에서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0만원으로 살 수 있는 집을 찾는다. 부동산의 가치는 단번에 젊은이들의 계급적 상황을 규정한다. 전시장 벽에 걸린 바닥 장식재들은 300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땅의 면적을 표시한다. 함정식의 [터벅터벅]은 한 사람의 걸음들을 찍은 반쪽짜리 영상들을 하나로 이어 붙인 것으로, 미묘하게 어긋나있는 불구의 삶을 풍자한다. 서보경의 [여름휴가]는 혼자 놀기의 정수이다. 특히 난데없는 물벼락은 젊은이들의 고난이 일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주는 듯하다. 소외된 노동은 소외된 여가를 낳기 때문이다. 강정석의 [야간행]은 겨울 야산을 오르는 경험을 통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 와중에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는 학업, 아르바이트, 군대, 연애 같은 젊은이들 공통의 경험이 있다. 가혹함과 불확실함 와중에도 진부함은 반복된다. 

 

최윤은 전시장 곳곳에 진부한 키치풍의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이미지 벽]에서는 그림과 가림막이 같은 수준에 놓이며, [국민 매니페스토]는 아름다운 산수풍경이 담긴 달력 그림들을 바탕에 깔고 유행가 가사를 웅변조로 삽입했다. 예술과 일상문화의 전도에 의해, 하찮음은 중요해지고 중요한 것은 하찮아진다. 소비로 이루어지는 진부한 일상은 예술에 있어 소멸에 대한 의식을 고양한다. 로와정은 [두 개의 시간]에서 한 해 동안 파리에서 사용한 두루마리 휴지의 심지를 모아 만든 휴지를 걸어놓았다. 딱딱한 휴지가 상상하게 하는 블랙 유머는 남녀 팬티를 교차시켜 별처럼 설치해 놓은 [밤마다 행복했으면]에도 반복된다. 일상만큼이나 예술도 소모적이다. 김다움은 여러 전시의 흔적들을 모아서 계획상에만 존재하는 또 다른 전시를 예시한다. 김동규는 [탈출용 못걸이]에서 노인들이 주로 눈에 띄는 벼룩시장에 흘러든 그림을 추적한다. 물감들로 덮여진 캔버스를 훑어가는 카메라의 시점은, 한도 끝도 없이 질척거리는 예술의 세계로부터 해방 또는 소외되는 과정이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꾀하는 유목적 시점 또한 곳곳에 덫이 놓여있다. 김실비의 [M을 위한 노래]는 일본의 예술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작가가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를, 그리드 구조가 선명한 가상의 지도 위에다 현지 사진들을 느슨하게 겹쳐서 보여준다. 이병수의 [102장의 희망]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는 자전거 여행의 궤적이다. 추상적인 좌표계에 위치한 추레한 동네 풍경들은 희망의 역설적 의미를 말해준다. 정승일의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는 고층건물같이 날선 반사면을 가진 구조물로, 단단하면서도 취약한 이 기하적 구조들은 공간을 파편화시키고 그 안에 비친 인간의 좌표계를 불안정하게 한다. 

 


구현모 작품 이미지

 

구현모의 ‘사직동’ 전은 집이라는 기본구조로 주체가 자리하는 공간의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도 마샬 버만이 [현대성의 경험]에서 인용한 바 있는, ‘견고했던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리고 있으며 신성했던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 되고 있고, 인간은 마침내 진정한 조건에 직면하게 된 그 유동적 현실’인 현대성을 깔고 있다. 사직동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로, 개발지상주의라는 맥락에 놓인 한국의 도시들이 그렇듯이 많은 변모를 거쳤을 것이다. 낡을 틈 없이 허물어지고, 삶의 흔적들은 쓰레기로 쓸어 담겨지고 새로 구조화되는 반복적인 과정들이 젊은 작가는 물론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삶의 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했다는 사실은 이제 공유되고 있다. 공적 제도들마저 개발 또는 발전주의에 대한 회의와 피로를 표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이라는 가장 안정되어야 할 자리는 얇은 판자와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얽혀있다. 이 취약한 것들이 떠내려갈까 봐 닻처럼 묵직한 돌덩어리를 달아놓기도 했지만, 그것은 토대 위에 거의 얹혀 있다시피 한 건축적 구조들을 더욱 위태롭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구현모의 작품은 박탈감이라는 하나의 정조에 물들어 있지는 않다. 취약한 김에 열린 구조로 만든다. 호두나무로 만든 지붕이 마룻바닥처럼 보이기도 작품 [지붕]은 시점에 따라 가변적 구조로 변모한다. 사회구조는 집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지만, 그렇게 가벼워진 것은 또 다른 관성을 획득하며 한시적 지속을 유지한다. 

 

그의 집은 질곡에 가득한 지상의 질서로부터 초월한 채 붕 떠있으며, 작은 집의 나무는 지상에 뻗어있는 만큼의 가지만큼 풍부한 뿌리를 대칭적으로 뻗어 내린다. 얇은 판자와 가는 나뭇가지는 자연의 질서와 닮음으로서 그 견고함을 유지한다. 작품에 내재된 이중성은 7분 분량의 영상 [고광나무]에서 더욱 빛난다. 그 나무는 작가가 독일에 있을 때 창문 너머로 보였던 나무를 바흐의 칸타타 선율에 실은 것이다. 바람과 음악에 몸을 실은 나무는 일상의 시간을 죽 늘어뜨린다. 나무를 뒤척이게 하는 바람은 절망으로도 희열로도 느껴진다. 현실의 절망이 깊을수록 희열은 강렬해진다. 구현모의 작품에서 단선적 역사는 맹목적 질주를 멈추고, 자연과 신화의 주기인 순환의 시간 속에 흘러든다. 인류에게 순환을 상상하게 했던 달의 상징과 더불어 서 있는 작은 집들은 원초의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중심으로 다가오며, 신성한 기운에 잠겨있다. 이 전시의 작은 집들은 폭압적 역사를 벗어나 모든 것이 ‘비롯된 때’(illud tempus)에 존재했던 원초적 모델이다. 사회적 모더니티와 달리, 예술적 모더니즘은 이 신화적 시간으로 회귀하려는 반복적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역사(주의)를 쇄도하는 폭력으로 간주하며 묵시론적인 세계관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철거되는 지 세워지는지 알 수 없는 과도적 구조들은 묵시록과 유토피아가 공존했던 어떤 창조적 시기를 예시한다. 그것은 생성이 구조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때이며, 예술이 늘 상 회귀하고 싶어 하는 신선한 시간이기도 하다. 


출전; 아트 인 컬처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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