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이동환 / 황홀하고 절망적인, 치명적이고 장렬한
흙가슴. 이동환은 흙가슴과 더불어 그림을 시작했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사회인으로서의 생활도 같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그에게 그림은 생활과 더불어 온 것이었고 사회에 의해 매개되거나 연동된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 순수회화의 자족적이고 형식적인 논리를 위한 자리가 들어설 여지는 처음부터 별로 없어 보였다. 형식논리는 다만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고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한 구실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그림의 축은 언제나 형식보다는 서사 쪽에 놓인 것이었고, 이후로도 쭉 그랬다.
그렇게 작가는 가슴에 흙을 품고 살았고, 그렇게 품은 흙가슴으로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흙은 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고향이고 고향의식이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와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보다는 존재론적 자의식이며 원형의식에 가깝다. 현대인은 흙을 상실한 삶을 살고, 고향을 상실한 삶을 산다.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산다. 예술이란 그렇게 상실한 것들을 복구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실재 아님 원형과 같은 궁극적인 것을 복원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미혹의 베일에 가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들을 눈앞에 되불러 오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그렸고 주변사람들을 그렸다.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는,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이 세상이란 감옥에 갇힌 사실을 모르는 고릴라를 그렸다(보호주의자). 적어도 그의 의식 속에선 속박과 해방의, 구속과 자유의 경계가 모호한 고릴라를 그렸다(모호한 경계). 그렇게 미혹의 베일에 가려 미혹된 삶을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렸다.
길을 잃다. 그리고 IMF가 터졌다. 터졌다? 사람들은 아마도 곪은 것이 터졌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터질 것이 터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과 함께 사람들의 이면을 지배하는 잠재의식과 불안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IMF가 터지면서 나도 길을 잃었고 사람들도 길을 잃었다. 좌표를 상실한 것이다. 좌표? 길이 곧 좌표고 삶의 메타포다. 삶의 상징을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실재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좌표는 뭐고 상징은 뭐고 실재는 뭔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의 한계며 해악이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에 있다고 본다. 이 주의와 법칙에 어긋나는 것들은 도태된다. 좌표며 상징이고 실재란 바로 이 주의와 법칙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 그리고 그 준칙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삶의 좌표며 상징이며 실재를 박탈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며 사회로부터 도태된 사람들 곧 소위 잉여인간들이 생산된다(바타이유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잉여를 생산한다고 본다. 바로 구조적인 문제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잉여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질 들뢰즈의 욕망기계와도 그리고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와도 통한다).
작가는 그런 잉여인간들을 그렸다. 길모퉁이 내지는 구석진 곳 내지는 후미진 곳을 서성이는 사람들을 그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면 안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어서 그들의 얼굴이며 표정을 읽을 수는 없다(심정적으로 추상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읽을 수 없는 얼굴이며 표정 자체(모르긴 해도 한때 떳떳한 삶의 표상이었고 기호였었을)는 아마도 잉여인간의 표상이며 기호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버려진 사물들과 함께 버려진 사람들을 그렸고, 폐기된 사물들과 함께 폐기된 사람들을 그렸다. 길모퉁이 내지는 구석진 곳 내지는 후미진 곳에,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갈리는 곳에, 예각으로 날카로운 각진 공간에 길을 잃고 좌표를 상실한 사람들을 그렸고,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그렸고, 버려지고 폐기된 사람들을 그렸다.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흔들리는 대명사. 그리고 작가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렇지 않다는 작가의 고백은 사실은 도무지 아무렇지 않게 되지가 않는다는 역설적 표현이며 반어법으로, 일종의 강조 화법으로 읽어야 한다. 미쳐버리고 싶은(데), (사실 아님 현실은 결코)미쳐지지 않는, 이라는 이인성의 소설 제목처럼 아무렇지 않고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되지가 않는다는 의미의 숨은 말이며 숨은 뜻으로 읽어야 한다. 실제를 보면 구덩이 속에 빠져 있는데, 구덩이 속에 빠져있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구덩이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 같다. 작가는 일전에 사람들을 고릴라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고릴라에서 원숭이로의 이행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이행은 이후 양이며 늑대로의 전이를 예비할 것이었다. 여하튼, 여기서 원숭이는 아마도 제도에 길들여진 존재를 의미할 것이고, 그렇게 남들 사는 대로 따라 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는 뒤늦은 자각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구덩이로부터 빠져나오라고 주문한다. 달아나라고, 다가가라고, 돌아서라고, 쓰러지라고 명령한다. 그 주문이며 명령은 사람들이며 아마도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도 작가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구덩이 속이라는 한계를, 그리고 구덩이와도 같은 닫힌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닫힌 공간(아마도 일상 아님 길들여진 공간) 속에서 주문이며 명령을 수행하는 듯한 제스처를 반복할 뿐. 작가는 그렇게 달아나기를, 다가가기를, 돌아서기를, 쓰러지기를 반복해 보여주는 사람들의 헛몸짓을 그렸다. 아마도 현대인의 무기력한 초상이며 암울한 메타포일 것이다. 여하튼 그 제스처에는 한정적이고 반복적인 것이지만 이행이 있고 과정이 있고 패턴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이행이며 과정이며 패턴을 일종의 겹쳐 보이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흔들리는 대명사 시리즈는 바로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있었다. 이, 그, 저라는 대명사로 호명되고 익명으로 호출되는 사람들, 이름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 그리고 그 상실감으로 꿈꾸듯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 자체가 마이브리지의 연속촬영사진, 미래파의 동시성의 표현, 그리고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와의 형식적 유사성 내지 상호 영향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 모두가 형식논리의 결과란 점이며, 서사에 바탕을 둔 작가의 그림과는 처음부터 다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며 차이는 흔들리는 대명사 시리즈의 사실상의 계기가 됐고 출발점이 됐던 그림(문득, 깨어있는 밤)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작가는 어스름한 새벽에 잠이 깬다. 처음엔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사물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저 있을 법한 시지각적 경험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여기서 시지각적 경험을 의식의 층위로까지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 비록 어둠 속이지만 시각을 공간 이동시킬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몸은 비록 여기 현실에 붙박여 있지만 의식을 공간 이동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시야의 권역에 들어와 있는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사각지대와 같은, 시야를 벗어나 있는 사물들이며 공간마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갈 수 있고 만질 수가 있다. 그렇게 의식을 훨훨 날려 보낼 수가 있다. 바로 이런 의식의 공간이동이 사회학적 문제의식 내지 자의식(이를테면 억압적인 현실과 일탈욕망 그리고 그 실현불가능성에 대한 씁쓸한 인정과 같은)과 만나진 것이 다름 아닌 흔들리는 대명사 시리즈였던 것. 그리고 흔들리는 대명사 시리즈에서는 이런 의식의 공간이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며 흔들리는 삶의 좌표를 위한 표상으로 정박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병적인 웃음과 혼잣말. 흔히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말이 있다.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작가는 위선적인 사람이며 사회를 그리기 위해 그림에 양을 등장시키고 늑대를 불러냈다. 위선의 반대말이 위악이다. 위악은 피하면 그만이지만, 그리고 때론 연민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위선은 피할 도리도 없고 공감의 여지도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위선적인 삶을 산다. 바로 탈 곧 가면 곧 페르소나를 또 다른 얼굴이나 되는 양 쓰고 사는 것이다. 페르소나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주체이며, 내가 보여주고 싶은 주체이다. 그렇게 나는 항상 이중적으로 분열된 삶을 산다.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항상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야 한다. 페르소나 뒤에 숨은 얼굴을 들키는 순간 나는 여지없이 정상성에서 비정상성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페르소나를 오래 쓰고 있으면 마침내 페르소나가 얼굴이 된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얼굴이 들킬까봐 불안하고 얼굴이 없으니 공허하다. 그러므로 불안과 공허는 어쩌면 현대인이 공유하는 치유 불가능한 징후이며 치명적인 증상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그리면서 이처럼 이중적으로 분열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그린다. 나에게 양은 거대한 권력, 모순덩어리, 과장된 몸짓이다. 그래서 내가 죽여야 할 놈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바로 위선의 실체이며 양의 실체를 겨냥한 말이다. 그리고 그 실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넘어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된다. 개인이 페르소나 뒤에 숨듯이 국가는 만국기 뒤에 숨는다. 그렇게 숨는데도 당연히 스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스킬을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살면서 사실은 이처럼 그 이면에 두려움을 감추고 있었다. 민낯을 들키는 순간 맨붕이고 끝장이다. 그렇게 숨고 숨기는 숨 막히는 삶이 꼭 전쟁 같고 전장 같다. 그래서 어쩌면 병적인 웃음과 혼잣말은, 실없는 웃음과 공허한 메아리로 흩어지는 독백은 그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베르그송은 웃음이 사람들 사이의 서먹한 관계를 해소시켜줄 사회적 장치라고 했다. 어쩌면 베르그송은 이미 웃음이 더 이상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닌, 사회에 위탁되고 위임된 것임을 간파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그렇게 양의 탈을 쓴 늑대를 그리면서 헛웃음 짓는 사람들이며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흔히 동물들로 하여금 사람을 대신하게 한 이야기 형식을 우화라고 한다. 그리고 우화에서 헛웃음 곧 블랙코미디는 핵심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블랙코미디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황홀과 절망.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날개가 없다면 추락도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절망의 순간은 그 속에 황홀한 기억이며 황홀할 비전을 내장하고 있다. 그 기억이며 비전이 없다면 절망도 없다. 첫 키스의 추억이 달콤했기 때문에 아님 달콤할 것이기 때문에 아픈 것이고 그리운 것이다. 황홀과 절망은 비례한다. 황홀했던 순간의 꼭 그 강도만큼 절망의 순간도 크거나 작다. 황홀과 절망은 짝패다. 황홀은 기대치고 절망은 현실인식이라고 매도하지는 말자. 어쩌면 황홀도 절망도 하나같이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며 꿈꾸게 하는 이상일지도 모른다. 황홀은 아름답고 절망은 장렬하다. 작가는 그렇게 황홀하고 절망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었고, 아름답고 장렬한 순간을 그리고 있었다.
곰 인형이 불타고 있다. 아마도 애인이 선물한 것이거나, 애인에게 선물할 것이거나, 할 것이다. 여기서 애인이 누군지 따져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곰 인형에 애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탑재돼 있다는 것이며, 그렇듯 각별하게 의미 부여된 물건이며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 의미심장한 곰 인형이 불타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그 곰 인형에 불을 지른 사람이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왜 곰 인형에 불을 지른 것일까. 그리고 양 팔이 절단된 사람들(사실은 마네킹을 소재로 그린)이 주변을 서성인다. 불타는 곰 인형을 보고도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 무기력한 시대에 대한 메타포? 그렇게 무기력한 시대를 보는 작가의 진단 내지 현실인식?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곰 인형도 마네킹도 작가 자신의 자조 섞인 자화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곰 인형에 불을 지르는 작가의 행위에는 일종의 자기살해 내지 자기정화의 신화가 탑재돼 있다.
정황적으로(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멀쩡했을 그리고 더욱이 화목했을 집이 불타고 있다(三界火宅). 그리고 아버지와 등에 업힌 아들이 화염에 감싸인 집을 먼발치서 바라본다(아버지와 아들은 또 다른 버전의 그림에서 화염과 함께 추락하는 별을 본다). 땅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아님 산불이라도 난 듯, 아님 화산 폭발이라도 난 듯 대지는 연신 불과 연기를 뿜어내고, 세상은 순식간에 온통 화염에 감싸인다. 그리고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쳐오는 화염을 피해 혼비백산 도망치는 사람들이며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붕괴되는 일상과 허물어지는 이상? 세상이 불타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갈아엎었으면 좋겠다? 이 일련의 불타는 그림들은 작가의 현실인식을 그린 것일까, 아님 욕망이며 비전을 그린 것일까. 안젤름 키퍼의 그림에 의미심장한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그림이다. 불에 타 재가 된 숲을 배경 삼아 그 위에 거대한 팔레트를 그려 넣은 그림이다. 바로 예술가를 화전민에다 비유해 그린 그림인데, 알다시피 화전민은 농사를 위해 불을 지르고 삶을 위해 불을 지르고 재생을 위해 불을 지른다. 아마도 애틋했을 곰 인형을 불태우고 화목했을 집을 불 지르는 작가의 행위에는 이런 화전민의 절실함이며 예술혼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사람들이 떼 지어 줄지어 가만히 몰려왔다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망부석이 된 그림이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아귀처럼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무슨 방파제나 되는 양 딛고 서 있다. 그렇게 그들보다 먼저 몰려왔었을 죽은 사람들 아님 이미 반쯤은 죽은 사람들을 딛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그 길 끝에서 그들이 맞닥트린 현실은? 하고 반문해오는 것 같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서사적이고 실천적인,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염처럼 황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칠흑 같은 절망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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