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이슬람과 뉴욕의 또 다른 만남
쉬린 네샤트 전 (4.1--7.13,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미술과 영화 양 영역에서 눈부신 활동을 해온 세계적인 작가 쉬린 네샤트의 한국 전시는 마치 회고전처럼 지난 20여 년간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놓고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1957년 이란 태생으로 17세에 미국에 유학 간 후 17년째 고국 땅을 밟지 못하다가 현대화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급변한 이란의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현실을 깔고 있으며, 지금은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망명자의 입장이 된 자전적 체험과 깊이 관련 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이란,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일관되게 발견된다. 제1세계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자유는 ‘이란’과 ‘여성’이라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했을 것이다. 작가는 검은 베일로 감싸여 있는 이슬람 여성의 삶을 현대예술의 언어를 통해 알렸다.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던 것이 말을 만났을 때 퍼 올릴 수 있는 예술적 광맥은 무한하다.
Shirin Neshat, Rebellious Silence, 1994 B& W RC print & ink (photo taken by Cynthia Preston) Copyright Shirin Neshat_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쉬린 네샤트는 그 무한한 원천에 예술적 뿌리 및 촉수를 갖다 댈 줄 알았던 현명한 예술가이다. 자신의 뿌리로부터 시작하는 원초적 감수성은 사진과 영상, 사운드라는 현대적 언어와의 만남으로 빛을 발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도 강렬해진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명암의 대조는 관념적 이항대립의 산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적, 개인적 체험의 발로이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세련된 영상문법과 필립 글래스를 비롯한 현대 음악가와의 협업을 통한 사운드는 매력적이다. 성(聖)스러움 및 성(性) 같은 근원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예술 언어가 만났을 때의 힘은 폭발적이다. 예술적, 기술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대도시가 아니라면 힘들었을 작업들은 뉴욕과 이슬람이라는 두 극의 만남을 극적으로 만든다. 양자의 만남은 테러 같은 파국적 사건만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문화적, 물리적 억압에 대한 진정 대안적인 해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배치된 10분 분량의 2채널 비디오, 오디오 작품 [격동-부름과 대응]은 관객들이 이후에 만나게 될 많은 요소를 예시한다. 마주보는 두 스크린, 남과여로 분리된 세계, 서로를 관찰하는 상호 반영적 구조가 그것이다. 대치적 국면을 조성하는 이 냉랭한 평행의 지대에서 관객은 가운데 서 있다. 고개를 계속 움직여야 이야기가 이어지므로, 이미지의 소비를 부르는 아늑한 동일시는 방해되고 비판적인 거리감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한 이란의 법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직도 저런 법이 있을까 싶을 만큼 신기하지만, 그것은 ‘알라신의 의도’--유구한 세월 동안 각 시대의 석학들과 민중들에 의해 가다듬어진 문화적 규칙으로서의 종교는 자연의 순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와 달리, 세계의 절반인 여성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을 침묵시키는 가부장적인 종교 관행의 단면일 뿐이다.
리타 M. 그로스는 [페미니즘과 종교]에서 세계의 주요 종교 속에서 여성의 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위를 매긴 바 있는데, 반(反) 페미니즘적인 순서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꼽혔다. (참고로, 저자는 도교를 가장 페미니즘적으로 평가했다.) 기성 종교에서 신격은 보통 남성으로 규정했지만, 거기에서도 신격의 여성적 측면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리타 그로스는 여성 신격이 없는 종교에서 여성 신격이 많은 종교 순으로는,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도교, 불교 등을 꼽았다.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를 인정한다 해도 이슬람교는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은 이슬람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즘 이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작가 자신도 그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슬람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이들은, 문제는 하나의 종교로서 이슬람이나 쿠란의 가르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 이름 아래 더욱 강화되고 영속화되고 있는 가부장제에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페미니즘과 종교]에 의하면, 이슬람의 몇 안 되는 페미니스트 학자인 리파 핫산은 ‘쿠란은 남성과 여성이 신 앞에서 전적으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구성원이며 서로의 보호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쉬린 네샤트가 학업을 마치고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유례없는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들을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성차관계를 유지하려는 압력이 증가했고, 그 결과가 남성과 여성이 엄격히 분리되는 전통의 강화였다. 작은 차이를 거대한 차별로 변화시키려는 모든 전략 속에는 분리주의가 존재한다. 가령, 작품 [열정-욕망에 관한 이야기]에서 작가는 공공적 종교 집회조차 남녀의 자리가 엄격히 구별된 세계에서, 쿠란의 우화를 대중에게 설교하는 교조적인 종교지도자의 선전 선동에 매도되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쉬린 네샤트는 1세계에서 활동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지만, 1세계와 그 나머지 세계 간의 격화되는 대립은 서로의 세계를 더욱 보수화시켰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을 읽는 한 축인 페미니즘을 서양의 영향으로 간주하여, 이슬람 세계에서는 더 억압적인 여성 정책이 펼쳐지고, 9.11테러 사건 이후에 제 1세계도 타자에게 비관용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생겨났다. 맨 마지막 동선에 배치된, 비교적 최근의 작품 [투바-혼돈 속의 안락]에서는 고대 이란에서 담으로 둘러친 정원인 에덴처럼 타자를 품어주는 신비스러운 큰 나무가 바로 여성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를 통해, 남/녀는 물론 동일자와 타자 간의 차별이 없는 이상적 세계는 보다 ‘여성적’일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다시 처음 작품으로 돌아가자면, 이란 남성이 공공의 무대에서 전통가요를 부르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서 차도르를 둘러쓴 여성은 검은 그림자처럼 빈 무대를 응시한 채 서 있다가 구음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남성의 노래가 그냥 듣기 좋은 편이었다면, 맞은 편 여성의 가사 없는 육성은 심금을 울린다. 타자를 입막음 하려는 시도들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반항의 목소리를 낳는다.
후자는 즐겁게 따라 부를 수 없는 노래 아닌 노래이며,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ethnic+techno 음악의 조합을 떠올리는 사운드는 몽환적인 흥겨움을 자아내며, 노래하는 주인공을 360도로 빙글빙글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는 몰입의 체험을 더한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유난히 리듬을 잘 탄다. 그것은 여성의 몸을 지배하는 주기적인 리듬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적 저항의 언어가 환상의 언어와 만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리와 영상은 합세하여 검은 그림자를 서서히 카리스마 넘치는 실체로 고양시킨다. 단순한 현실 고발을 넘어서, 깊은 절망이 여성적 열락(悅樂)으로 변화하는 극적 순간을 담아낸 힘은 지극히 세련된 현대예술의 언어이기도 함을 강조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현실 같지만, 결국은 정도의 차이만을 가지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나타내는 보편적 소재들과 정교한 시청각적 형식의 만남은 쉬린 네샤트의 작품을 세계화 시키는데 공헌했다.
Rapture stills(Shirin Neshat, Rapture, 1999 Production Still Copyright Shirin Neshat.)
[격동], [황홀], [열정] 3부작으로 이루어진 비디오 작품 [흑백의 젠더(사회적 성)]에서 남자와 여자의 세계는 흑백처럼 대립 한다. 요새 속의 남자들과 돌멩이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해변 가의 여자들은 문화와 자연으로 대조된다. 남자들이 성곽과 그 내부에서의 행사로 상징되는 문화를 집단적으로 창조할 동안, 여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황폐한 자연에 묶여있다. 엄격한 구조주의를 생각나게 하는 갖가지 대조 항들--남/녀, 동양/서양, 전통/현대, 명/암, 느림/빠름 등--은 [독백-둘 다인 혹은 둘 다 아닌]같은 다른 작품 속에도 선명하다. 남성들은 고등학생이나 회사원, 또는 관료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갖추어 입고 모종의 규칙에 따라 일관성 있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여성들은 검은 베일을 둘러쓰고 까마귀 떼처럼 움직인다. 여성에게 ‘근대화’를 비롯한 시간의 흐름은 멈춰있다. 가부장적인 종교와 근대화는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 서로의 코드를 맞추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배제되고 또 다른 버전으로 갱신된 억압에 당면한다.
여성들이 그 앞에 놓인 문화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은 소리 같은 언어 이전의 언어나, 손바닥에 적힌 글자들을 내보이는 일일 뿐이다. 쉬린 네샤트의 또 다른 작품 제목처럼 여성은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유기적 관계]에서 작품들에 나타나는 이슬람 여성들의 장식인 꽃문양을 말로 정의되기 이전의 자연의 상태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연/문화의 대립에 내재된 여성 억압을 인식한다. 미국의 대학에서 미술 뿐 아니라, 이론을 함께 공부한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작가는 자연과 여성을 등치시키는 것에 내재한 난점을 모를리 없다. 그러나 ‘오래된 미래’인 자연을 버릴 수도 없다. 두 가지 자연이 있을 수 있다. 상징화, 대상화, 도구화되어 착취 될 대로 착취된, 우리에게 익숙한 그 너덜너덜해진 자연과 보다 미지의 원초적 자연. 대안적 여성성은 당연히 후자의 자연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관점은 [여자들만의 세상]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에 편재해 있다.
[흑백의 젠더(사회적 성)] 마지막 장면에서, 남성들의 세계와 대치된 여성들은 자신들을 타자화 하는 세계를 뒤로한 채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것이 죽음의 항해인지 해방의 항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성들은 구조적으로 분리, 대상화 된 ‘자연’을 벗어나 대양과도 같은 더 깊은 실재계로 떠나는 것이다. [왕의 서] 같은 사진 연작을 비롯하여,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서 흑백 사진작품에 많이 나오는 신체에 새겨진 글자들은 자연이 아닌 텍스트로서의 육체를 보여준다. 동양의 서예처럼 기(氣)가 느껴지는 이란어는 고대의 문헌부터 현대 이란의 반체제 인사들의 시와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천을 가진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서 글자는 몸과 결합함으로서 서로의 의미를 고양시킨다. 의미의 원천이자 의미가 각인된 장소로서의 몸은 상징적 권력 투쟁의 장이다. 뭔가 가득 적혀있는 몸은 ‘자연’과 달리,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은 몸을 문화적으로 직조되는 자연의 산물로 본다.
알라의 여인들_각성하는 충성(Courtesy of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몸은 동물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와 재현체계가 직조, 구성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전(前)문화적, 전사회적, 전언어적인 순수한 몸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담론적인 대상으로의 몸을 환기시키며 몸을 욕망, 의미화, 권력의 질서에 밀착된 것으로 파악한다. 몸은 불변의 틀이 아니라, 글자들처럼 간격으로, 순수한 차이로서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서 몸은 기록된 텍스트로서, 결코 백지 상태가 아니다. 얼굴과 몸에 새겨진 글자들은 ‘원시’ 종족들의 장식문양도 생각나지만, ‘텍스트로서의 몸’은 일방적인 억압관계를 벗어나 스스로를 조절하는 현대에도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다. ‘자유세계’의 여성들은 이슬람 여성과 달리, 가슴이고 허벅지고 훤히 내보이고 다니지만 푸코가 ‘자아 생산의 테크닉’이라 불렀을 감시와 검열이라는 점에서 이슬람 사회 못지않다.
글자가 새겨진, 텍스트로서의 몸은 ‘권력의 대상이자 권력을 작동시키는 장’(푸코)으로, 이때 몸은 억압적 또는 해방적인 문화적 요청에 의해 조율되는 것이다. 쉬린 네샤트의 사진 작품에서 여러 부류의 몸에 새겨진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글자체는 종교적 경전을 떠오르게 하는데, 작가는 종교 공동체에서 신성하게 받아들여지고 행동의 규범이 되는 것들을 변형시킨다. 후대에게 내려오는 경전은 그것이 텍스트인 한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경전이 아니라 텍스트로 간주되면, 다시 씌여질 수 있는 것이 된다. 리타 그로스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들은 경전을 매우 중시하는데, 이 경전들을 신에 의해 계시된 것으로서 신앙을 위한 유일하고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 헌장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본다. 성스러운 텍스트로서의 경전은 누덕누덕 기워진 것에 불과하며, 때로는 인간 저자들의 문화적 경험에 기반 한 주장들이 뒤섞여 있는 자기모순적인 문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적 경전 해석은 ‘의심의 해석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전이 침묵하는 것, 경전의 행간, 경전 바깥에 있는 여성 영성의 체험을 두루 포함해야 한다.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서, 몸이든 경전이든 텍스트는 다시 읽혀지고 다시 씌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가령 [왕의 서]는 이란의 고전에 바탕을 둔 제목을 차용했지만, 그 중 ‘애국자’ 부분에는 현대 이란의 시인과 반체제 인사들이 쓴 시가 새겨져 있다. 여성은(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다. 베일에 감싸인 몸, 그 위에 새겨진 글자, 응시하는 눈과 앞을 겨눈 총은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인데, 그 모두가 권력과 관계 된다. 베일은 몸을 보호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자처럼 허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화된 사회에서 중산층 여성들의 자유가 결국 제3세계에 모순을 전가해서 생겨난 것이기도 한 만큼, 이슬람 여성의 베일을 반드시 무지와 맹목으로 간주할 수 없다. 총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했을 때 이란 여성들은 스스로 총을 들었다.
Women Without Men_still_11
글자가 담론의 형태로서 권력을 발휘하고 응시가 간접적인 공격성을 암시한다면, 총은 보다 직접적이다. 예술작품도 총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의 극단적 투쟁에서의 총과 다른 맥락이지만 말이다. 적대적인 사회는 그 어떤 총이든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가부장제를 비롯한 현실에서의 부당한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예술가의 권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가부장적 권력처럼 위에서 지배하지 않으며, 작품에 대한 공감을 통해 관철된다. 쉬린 네샤트의 예술은 지배적 문화를 언급한다. 가령, 여성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남성 중심적 문화의 관점은 여러 작품에서 지적된다. [패시지-융합의 작품]에서 장례라는 인류 보편적인 행사를 치르는 방식에 있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남자들이 천에 싸인 사람을 매고 바닷가를 걷는 동안 여성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는데, 독특한 리듬감을 가지는 맹렬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상징적 의례를 치루는 남성과 달리, 마치 자신들 스스로를 묻을 듯이 맹목적이다. 리타 그로스는 남성이 종교상징, 신화, 의례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의미를 창조할 필요가 있는 반면, 그 생물학적 특성과 동일시되는 여성은 식물과 같이 자연적으로 정해진 일생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 있어왔음을 밝힌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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