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왜 그런지 모르지만 과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과, 거의 과일의 대명사처럼 들리는 그 흔해빠진 대상이 30개가 넘는 캔버스 가득히 펼쳐져 있다. 갤러리 안팎을 막론하고 여기에도 사과 저기에도 사과...공황상태를 야기할 법한 사과의 무리는 반복 속에 차이를 내장한 채 그렇게 관객을 둘러싼다. 사과들은 정물화의 전형적 수법이 아니라, 얼마 전 열린 전시에 붙은 ‘지근풍경(close landscape)’이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공기원근법에 둘러싸인 풍경처럼 아련하다. 사과는 캔버스 틀에 약간 외곽선이 잘려져 있을 만큼 가까이 당겨져 있으면서도 멀리 있어 보인다. 그의 작품은 한국 미술계에 친숙한 또 다른 작품 스타일이 겨냥하듯이, 관객이 집어 올려 한입 베어 물고 싶은 것, 즉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극사실주의적 환영과는 거리가 있다. 고진한의 작품 속 사과는 화면 가득히 포착되어 있지만 베일처럼 드리워진 두터운 공기층 뒤편에 놓여있는 가상으로서의 위상을 숨기지 않는다.
흐린-그림, 2014, 170x170cm, Oil on Canvas
사과는 신비한 아우라를 품고 있지만, 베일 뒤에 숨겨진 비밀이 대단한 것 같지 않다. 굳이 말한다면 공허하고 투명한 비밀이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구석구석 차곡차곡 쟁여지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텅 비어있음은 빈곤이나 박탈이 아니라, 어떤 여지 특히 변화에 대한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화면 가득한 대상은 명백한 드러남과 동시에 은폐가 있다. 캔버스라는 사각 공간 속의 거대한 사과는 단순함과 불가해함을 공존하게 한다. 사과라는 이 중성적 대상은 캔버스 네 면을 통해 약간씩 잘려있다. 그것은 대상이 한정될 수 없음을 알려주며, 한정되지 않으므로 익숙하게 알려진 것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린 면은 관객의 관심을 바깥으로 환기시킨다. 그것은 그림으로만 귀결될 수 없는 바깥을 암시한다. 현실의 사과를 400배 가량 확대한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오래된 기억이나 해상도 떨어지는 희미한 사진처럼, 일정한 시공간적 간격을 유지한다.
존재의 확실성과는 거리가 먼 이 사과는 구름처럼 모호하게 떠 있으며, 정방형의 화면 틀이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아슬아슬함마저 있다. 귀퉁이만 나온 배경은 사과가 놓인 맥락을 철저히 차단시킨다. 그것은 현실과의 연속성 속에 놓인 대상이 아닌 것이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잡기 힘든 그것들은 풍경을 정물처럼 그렸던 ‘풍경을 더듬다’ 전(2011)과 반대되는 선택이다. ‘풍경을 더듬다’ 전에 나왔던 [더듬은-그림]들은 멀리 있는 자연 풍경에 눈앞에 놓인 정물 같은 촉각성을 극대화했다.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놓든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놓든, 거기에는 대상(의미)와 그림(형식)에 경쟁구도를 설정하고 후자에 유리한 선택적 방향이 있다. 독특한 대상의 선택이 작품 의미에 주는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고진한이 그려왔던 특징 없는 풍경과 정물들은 그림에 강조점을 두려는 선택이다. 대상과 의미가 부각되면 그림은 그것들을 그저 실어 나르는 도구, 투명한 창과 거울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흐린-그림, 2014, 200x200cm, Oil on Canvas
그러나 대상에 괄호치고 언어와만 유희하려는 추상미술은 회화를 사물로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회화라는 사물보다는 사물자체가 더 흥미롭다. 서사(깊이)보다는 묘사(표면)에 치중하는 초현실주의, 네오리얼리즘, 누보로망 같은 현대의 미술, 영화, 소설은 이러한 사물의 세계를 발견했다. 고진한의 사과는 주변에 편재하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알려하면, 뒤로 쓱 빠지는 사물의 면모가 있다. 자명한 것들일수록 모호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고진한의 방식은 동종요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인간적 상식은 물론, 예술가 주체라는 기성의 고정관념을 죽여야 한다. 그래서 현대 미술사에는 회화의 종말만큼이나 작가의 죽음이 많이 논구되었고, 그것은 진짜 물리적, 생물학적 의미의 종말이나 죽음이 아니라, 회화와 화가에 대한 기성의 관념을 해체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고진한의 그림에서는 불확실만이 확실하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은 ‘탐구이며 불확정성으로 확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탐구는 ‘삶을 잊고 있는 것 같으나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 경계선도 형태도 없는 공간, 머나먼 것의 무질서한 부름을 견뎌야 하는 공간’이며, 작가란 ‘마치 확실한 무엇에 다가가듯 열려진 세계에 다가가는 것, 존재의 미 확정성, 그 힘에 몸을 맡기는 자’이다. 작가는 최소한의 참조 점으로 현실과의 관련을 두면서, 회화 자체의 현실성을 탐색한다. 이 전시에서 사과는 흔한 대상일 뿐 아니라, 많이 있다. 이러한 많음은 중요함이기보다는 평범함, 독특함이기보다는 익명성을 말한다. 그것은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것이고, 사람으로 치면 철수나 영희 같은, 또는 알파벳만으로 호명되는 카프카적 인물이다. 고진한은 이 작품들에 ‘깊은-그림 Deep-Painting’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인류에게 원죄와 지식을 일깨운 아담과 이브의 사과도,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게 한 뉴턴의 사과도, 현대미술의 개막을 알린 세잔의 사과도 아닌, 그 흐릿한 사과들은 깊이—종교적, 과학적, 예술적 의미—가 아니라, 표면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형용모순이다.
무엇이 그려져 있건 회화란 수세기의 전통을 가진 언어로, 그 자체의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깊은-그림’은 동어반복일 수 있다. 작품 제목은 일괄적으로 [흐린 그림]으로 붙여졌다. 그림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에게 사과를 그려보라고 했을 때 전형적인 동그란 형태와 그 안을 채우는 붉은 색은 사과의 실체보다는 그에 대한 개념과 더 가깝다. 동그랗고 붉은 사과는 사과에 대한 관념이거나 사과의 한 국면일 뿐이다. 상식과 지식은 사물의 순간적 우연성을 고착시켜 이해하려는 악습이 있다. 작가는 명확함 속에서 불분명함을 들춰내는 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고진한은 명확한 개념(그리고 그것의 상징적 의미)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관념은 재현과 쌍을 이루며 대상을 관객 앞에 가져다 놓고 그것을 인지시킴과 동시에 소유(소비) 지배하게 한다. 앎을 통한 지배 또는 소유가 정물화나 풍경화를 비롯한 회화사를 추동한 주요 동기가 되어주었지만, 진보된 복제기술이 편재하는 현대에는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
작가는 기존의 회화를 위협했던 복제매체를 낳은 과학기술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점에 근거한 명료한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고진한은 이전 작품 [빠른-그림](2001)처럼 명확한 지점이 아닌 점과 점 사이의 풍경—요즘의 [흐린 그림]을 포함한 2008년 개인전 부제가 바로 ‘사이 풍경’이었다—에 주목한다. 코드화된 현대사회는 점과 점의 관계로만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 하지만, 그 사이에는 간과된 나머지들(주변, 바깥, 타자)이 있다. 점은 다름 아닌 자기동일성의 중심을 말한다. 점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들에서 재현을 넘어선 생성이 가능하다. 고진한의 그림에서 윤곽선은 흐릿해졌고, 화면을 꽉 채운 사과의 표면은 무한대의 뉘앙스로 가득하게 되었다. 우리는 납작한 동물처럼 그 유한한 부피의 무한한 표면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2차원으로든 4차원으로든, 3차원적 현실을 소격시키는 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중요하다. 회화라는 포괄적 매체는 그러한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탐색-방황을 악(惡)무한이 아니라, 즐길만한 유희로 만들 수 있을 때, 관객 뿐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위한 작품이 성립될 수 있다.
흐린-그림 100x100cm Oil on Canvas 2008
고진한은 지시대상을 몇몇으로 고정시키고 자연의 무한한 뉘앙스에 주목하면서, 자연 뿐 아니라 회화적 언어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했던 근대 미술가의 방식을 취한다. 모네가 생애 말년에 수련에서 우주를 발견했듯이, 고진한의 사과는 한 알의 사과를 넘어서 우주적 차원으로 도약한다. 사과를 닮은 그 둥근 형태는 그 아래에 생명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기층을 품고 있다. 미묘한 굴곡 면과 색채에 실려 오는 사과에는 중력에 의해 휘어진 우주공간, 화이트홀과 블랙홀, 노을과 오로라, 사막과 공백, 피부와 살덩어리, 항성이나 또 다른 과일 등이 숨어있는 듯하다. 단순하고 정적으로 보이는 대상에는 대지나 바다, 하늘같은 변화무쌍함이 있다. 그것은 익숙히 알고 있으며 무엇엔가 소용되는 대상이 아니라, 미지의 사물이 된다. 작가는 ‘매번 그리면서도 늘지 않는’ 사과-그림에 도전과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절망을 희망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이지만, 작가가 장인이 아닌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이 반복적 행위를 추동하듯이, 그러나 반복을 거쳐야만 차이가 생성되듯이, 그렇게 작가는 매번 마주하는 캔버스와 끝없이 대화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현실과 관련은 되지만, 현실은 아닌 또 다른 현실이 창조된다. 회화는 또 다른 현실에 도달하는 매개이자, 그자체가 또 다른 현실이 될 수 있다. 자연은 단조롭고 예술은 풍부하다, 또는 그 반대라는 생각은 부당하다. 작가는 자연의 다양한 국면에 버금가는 예술의 어법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자이다. 고진한의 사과-그림은 자연과 예술을 동시에 풍요롭게 하는 윈윈 전략의 결과이다. 그것은 단순함 속에 있는 풍부함, 하나 속에 있는 여럿, 유한 속에 있는 무한, 확실성 속의 불확실성이다. 사과는 무심한 선택인 듯해도, 단번에 그 적절함이 발견된 것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복숭아나 포도, 꽃도 그렸다. 그러나 복숭아는 여성적 신체의 굴곡이 강하게 연상되면서 상징과 의미가 딸려오고, 포도나 꽃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적 구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모두는 유기적 총체성에 내재된 기성의 의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회화 자체의 위상을 침식할 수도 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감축해 나가면서, 구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익명적 자연이라는 결과가 얻어졌다.
흐린-그림, 2011, 80x80cm, Oil on canvas
고진한이 이 전시에서 하고 싶은 회화에 대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현대예술의 도전 한 가운데 있었던 표상에 대한 거부이다. 대상과 대상이 지시하는 의미로부터 벗어난 그의 회화, 그 뿌옇게 변한 사물의 외곽선과 선에 갇혀지지 않는 색들은 150x150cm를 비롯한, 여러 크기의 바둑판같이 정사각형으로 한정된 공간 속에 불규칙적으로 분포하면서, 무한한 게임의 수를 던진다. 표상의 거부 속에서 진정한 회화의 공간이 탄생할 수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우리는 사물을 표상화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하나의 객체로, 객관적인 현실로 만들려고 하며, 그것을 공간의 순수성에서 끄집어내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고 비판한다. 무심한 선택인 듯 하면서도 홀린 듯이 집착하는 고진한의 대상은 잡다한 인간적 관심사와 연관된 모방은 아니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각적인 것, 순수하게 가시적인 것의 제시이다. 이미지 자체가 언어처럼 대상의 부재를 토대로 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사과인 듯함이다. 이러한 ‘인듯함은 의미를 무한히 풍부한 것이 되게 하고, 이러한 무한한 의미를 전개될 필요가 없는 것, 즉각적인 것이 되게’(블랑쇼) 한다. 이 텅 빈 것 속에서 예술적 언어는 의미의 담지자라는 한정된 기능을 잃고, 유희 속에서 무한히 증식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블랑쇼가 예술적 영감의 가능성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은 무와 순수한 부재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의미와 진리, 노동과 기술을 넘어서 침묵으로 귀결된다. 데리다는 침묵이라는 단어가 ‘모든 단어들 중에서 가장 퇴폐적인 단어이거나 가장 시적인 단어’라 할 때, 우리는 ‘미끄러져 가게 하는 단어들과 대상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바타유의 말을 인용한다.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사과는 명료한 의미로 귀결될 시선의 주파 대신에, 두터운 공기층으로 더욱 매끄러워 보이는 표면을 침묵 속에서 탐사하게 한다. 고정된 관념을 능동적으로 망각하게 하는 이러한 매끄러운 활주, 또는 계속되는 미끄러짐은 경쾌하면서도 위험하다.
흐린-그림, 2014, 150 x150cm,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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