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변화를 위한 빈 바탕
이선영(미술평론가)
그 유구한 역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동양화하면 어쩐지 고풍스러운 산수풍경에만 어울릴 것 같은 선입견이 있다. 박병일의 풍경은 그 선입견을 깬다. 그의 작품 소재는 도시, 그것도 번잡하기 그지없는 도시 한가운데다. 그런데 그가 단지 화선지와 먹을 수단으로 하여 도시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면 별다른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먹을 단순한 재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 매체의 가능성을 축소하고 오도하는 것이다. 화선지에 수묵으로 그려진 풍경은 도시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여백이 주는 고요함 같은 동양화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다. 오색으로 표현될 수 있는 먹빛은 무채색 도시에서 번잡함은 빼면서도 풍부함은 남겨두었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색과 소리를 걸러내고 차분한 흑백 톤으로 전치된 화면에서, 우연적으로 맞닥뜨렸을 것 같은 순간은 영원으로 고양된다. 어수선한 간판들이나 지나가는 차들조차도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차가운 도시풍경에 스며있는 따스함, 때로는 신비로움이 기이하다. 이러한 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오늘을 읽고 싶어 한다. 영원함이 길을 잘못 들면 무역사와 추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시대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적지 않게 박혀있다. 빠른 생산/소비 주기에 의해, 불과 몇 년 만 지나도 낯설어지는 관례는 많이 있다. 1차적으로는 시대감각을 압축하는 간판 글씨가 그렇고, 그 지역사람들이라면 금방 알아 볼 수 있을법한 구체적 지형지물이 그렇다. 그의 작품은 상상이 아닌 실경에 근거한다. [오늘을 읽다]라고 붙은 작품 제목들은 국내외의 대도시가 비슷한 모습을 가짐도 알려준다. 도시야 말로 근대의 보편적 질서가 관철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심하지만, 간판들로 가득한 풍경은 모든 사물이 기호로 전치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한 기호화는 자연을 인간적인 질서로 바꾼 거지만, 그러한 경향이 자연이나 예술에게, 또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조차 두루 조화롭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자연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사회의 질서다. 그러나 지배적 질서는 더욱 촘촘해진다. 작가는 여기에 어떤 간극을 두려한다. 그는 우리를 이리로 가시오 저리로 가시오라고 명령하는 각종 신호들을 하얗게 지워버린다. 도심 속의 나무나 길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특히 나무의 자연스러운 실루엣은 격자 형식의 사물로 가득한 도시에 모세 혈관 같은 통로를 마련한다. 이 공백은 이전 작품에서 제목으로 사용하곤 했던 ‘breath’가 가능한 공간이다. 공백은 작가에게 심신의 휴식을 가능하게 했던 것들과 비워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동시에 관철된 것이다. 2004년 첫 개인전 이후, 그의 풍경은 작가의 관점에 따라 변해왔다. 초기의 작품에서 도시는 멀리서 바라본 거시적 풍경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풍경 속 한 요소인 광고를 변형시키거나 부각시켜서 풍경에 개입했다. 요즘은 작가가 늘 다니는 동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풍경을 큰 변형 없이 그리고 있다.
오늘을 읽다_115x115cm_화선지에 수묵_2014
거시적 조망에서 미시적 탐사로 갔다가, 그 중간 정도로 다시 왔다고나 할까. 일상은 그자체로도 경이로운 면이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닦아온 실경산수의 방식에 따라, 작업 중인 장소를 수도 없이 다녀온다.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풍경은 육안과 신체감각에 의해 이해된 구조가 있다. 그것들은 주체와 대결하는 객체라는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각적으로만 가능한 풍경이 아니다. 화면에서 텅 비어있는 길과 하늘, 나무는 그가 통과했으며 심리적으로 휴식을 가능하게 했던 작은 해방구들이다. 어떤 작품에서 길은 나무와 연결되기도 한다. 빼곡한 건물 앞 미세한 그물망처럼 펼쳐진 나뭇가지들은 그자체가 길이다. 큰길이든 샛길이든 흐름이 막혀서는 안 된다. 박병일이 사용하는 종이와 먹이라는 섬세한 도구가 요구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에게 먹과 종이는 살아있는 재료이다. 그의 그림은 서양화처럼 덧칠도 수정도 안 된다. 한 번에 가야하고 그만큼 하나하나의 획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든 작품에는 밑 작업이 있다. 모든 배치와 구성이 밑 작업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선으로 완성된 그 이미지 위에 휴지보다 얇은 화선지를 놓고 신속하게 작업한다. 도시는 선으로 되어있고 밑 작업도 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의 도시풍경은 자연처럼 정확한 선이 발견되지 않는다. 스펙터클로서의 도시는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성에 호소한다.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명료하다. 도시는 서로의 영역을 면밀하게 구분 짓는 날카로운 선들이 지배한다. 박병일은 그러한 선을 하얗게 비워둔다. 선의 연장으로서의 문자, 가령 간판 글자도 하얗다. 행인이자 잠재적 소비자에게 소비를 촉구하는 메시지들만이 가득한 도시 공간은 모든 것을 눈으로만 보며 조용히 서로를 스쳐지나가길 원한다. 갑작스런 사고가 아니라면 서로 부딪힐 일도 대화할 일도 없는 곳이 도시이다. 바네사 슈와르츠는 [구경꾼의 탄생]에서 농촌의 삶이 서사적이라면, 도시의 삶은 시각적이라고 말한다.
오늘을 읽다_100x162cm_화선지에 수묵_2013
오늘을 읽다_80x130cm_화선지에 수묵_2014_1
한편으로 그는 간판들이 과도하게 있는 곳을 집중 선택함으로서, 각자 나대는 소리들이 서로 상충해 결국 침묵과 다를 바 없게끔 한다. 공백은 광고 메시지들을 공허하게 울려 퍼지게 하거나 흡수한다. 도시를 특징짓는 기표들의 혼합과 쇄도는 다양성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생산/소비 시스템의 제국주의가 깔려있다. 그의 작품에서 소음과 다를 바 없는 다양한 메시지들은 동일한 계열로 표현된다. 그것은 자연처럼 ‘사물의 단순한 단일함’(하이데거)을 회복한다. 이러한 단순함에서 무한과 신비가 가능하다. 그것은 인식되기도 사유되기도 힘들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이 상품으로 변모하기에 단순함이 사라져 간다. 현대의 예술이 단순함을 회복할 수 있는 한 방식은 상품이 아니라 사물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빠른 변화만을 요구하는 현대도시, 그 ‘뜨거운 사회’(레비 스트로스)는 그 열기를 식힌다. 선적 양식으로 공격적이고 딱딱하게 서있는 것들은 다소간 부드러워진다. 인공물의 지워진 선들은 나무나 길 같은 흐름과 합세한다. 자연과 문명이 격돌 한다기 보다는, 문명이 자연화 된다. 또는 자연이라는 맥락에 문명이 놓인다.
작가의 일상에의 주목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거시적 관점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지금 여기의 지배적 질서는 변해왔고, 변해온 만큼 변해갈 것이다. 변화에 필요한 것은 불연속, 또는 공백이다. 어떠한 시공간이 연속적이기만 하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박병일의 그림 속 공백은 액체나 기체와도 같은 유동성(fluidity)을 띈다. 지그문트 바우만는 [액체 근대]에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 바우만은 근대 역사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의 속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유동성이 적합한 은유라고 주장한다. 박병일의 작품 속 고요함은 죽음과도 같은 정지가 아니라, 존재들의 미동을 말한다. 이러한 잔잔한 운동은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게 한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알리는 미세한 단서들이 이곳저곳에 박혀있는 그의 그림은 미시적 변화가 모여서 만들어낼 거시적 변화를 예시한다.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큰 맥락을 만들고 그것은 모든 것이 서있는 대지로 모여들 것이다. 이때 대지는 바다 같은 위상을 가진다. 모든 것이 모여들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곳은 바로 공백이다. 작품 속 건물과 자동차는 중력의 작용을 받기 보다는 부력으로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서 땅(바닥, 도로, 길)은 하늘처럼 텅 비워져 있고, 나무나 빌딩 같은 수직적 요소는 양 공백을 잇곤 한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어떤 시간적 흐름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일종의 네가티브 스페이스라고 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포지티브 스페이스 역시 고정된 구조는 아니다. 붓질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의 입자처럼 일시적으로 그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의 원자론자들처럼, 그의 작품 역시 입자와 허공으로 되어있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원자론자들이 존재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산재한다는 자연학 위에 그들의 철학을 세웠다고 말한다.
오늘을 읽다_80x80cm_화선지에 수묵_2014_2
원자론자들에게 미립자들은 모든 현실의 씨앗이다. 원자는 그리스 건축가들이 말한 하나의 길이/단위인 모듈과 비교된다. 이전 작업까지도 통틀어 동서고금의 건축물이 등장하는 박병일의 작품에서 건축에서 발견되는 구축적 과정은 중요하다. 그의 작업실에는 레고로 만들어진 조립건축물이 있으며, 자신의 작업에서의 ‘터치감은 레고 블럭과 유사하다’고 밝힌다. 레고 블록으로 이루어진 축소모델은 그의 개념을 보여준다. 그림 역시 레고 블록같은 일련의 작은 단위들이 축적되고 조합되는 장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서양화식으로 그려진 그의 밑그림은 일종의 건축 설계도에 해당한다. 장 살렘은 레고라는 단어는 덴마크어 ‘leg(놀다)’와 ‘godt(좋은, 잘)’를 축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lego’는 라틴어로 ‘잇다, 선별하다, 그리고 읽다’를 의미한다. 레고는 원자와 비교된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관점에서 우주는 거대한 일종의 레고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지각하는 물체들 사이의 차이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형태, 배열, 위치의 차이로 귀결된다.
원자론자들은 존재가 하나인 동시에 산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다. 원자론자들의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만물을 이루는 근본입자인 원자 뿐 아니라, 원자가 운동하는 허공의 존재였다. 레고와 자신의 붓터치를 비교하는 박병일의 작품에서 이 텅 빈 공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원자라는 존재가 산재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상관물인 무(허공)이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공백은 원자들이 영원히 운동하는 공간인 허공과 같은 맥락에 있다. 원자론에 따르면, 자연과 문명 역시 원자들과 허공의 우연적 사건들에 불과하다. 박병일의 작품 속 우연은 막연한 자의성이 아니라 필연과 상호작용한다. 여기에서 우연은 자유이다. 근대라는 거대한 기계적(mechanic) 체계를 거쳐 온 현대인으로서는, 역사의 시점과 궁극적 목적을 가정하는 필연이 우연보다 더 질서 있거나 바람직한 것이라 단언하지 못한다. 박병일에게 세계의 형성 및 조직을 주재하는 원리와 사회의 원리는 동일하며,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출전 ;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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