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일상과 성스러움
수보드 굽타 전 (9.1-10.5,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일상을 승화에의 강박관념 없이 표현할 수 있을까. 진지한 작가라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진실이 따로 있어서 그것만을 예술로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특별한 맥락은 있다. 단순함 가운데 깨달음을 주는 경우도 그러한 경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서울과 상하이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인도 태생의 작가 수보드 굽타(Subodh Gupta)의 작품들에는 솔직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직접적이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단순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반복되지만 고갈되지 않는, 그리고 작가 뿐 아니라 모두에게 절박하게 당면해 있는 보편적인 주제가 있다. 서울 전시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작가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소모품에 불과한 일상적 물건은 황금이나 대리석 같이 영원성을 기념해왔던 재료들로 다시 만들어지곤 한다. 원래 물건과 다른 재료로 각색하는 방식은 키치적이다. 삶의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는 키치는 그의 작품에서 새로운 사물의 반열에 올랐다.
2014, Two Bullets, two life-sized Royal Enfields, cast bronze, chrome plated life- size
지하 전시장에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오토바이 두 대는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달 오토바이를 브론즈로 캐스팅, 도금한 것이다. 평범한 배달용 오토바이는 어쩌면 황금보다 더 값질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감자들을 캐스팅하여 도금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수단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관심을 알려준다. 작품 [Two Mechanized Cows]는 우리나라의 중국집 철가방을 연상케 하는 배달용기를 양쪽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배치한 생활의 지혜가 돋보인다. 13억 명의 인구, 그래서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인 인도에서 배달을 위해 복잡한 도심을 누비는 이 오토바이의 원형은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설립된 로얄 엔필드사의 제품으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러나 정작 이 회사의 본사는 문을 닫았으며, 인도인의 대중교통 수단이 된 후 영국으로 역수출까지 한다는, 외래종이 토종이 된 예다.
수보드 굽타가 작품에 활용하는 물건들은 그 기원이 어떻든 토착화 된 것들이 많다. 역사적 우연이 삶의 시험을 거쳐 필연이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삶에 내재한 보편적 구조의 힘을 일깨운다. 그의 작품에서 구조적 범례 중의 하나는 인도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있는 종교로, 삶이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미술로도 전이되었다. 세계미술계에 통하게 된 그의 독특한 조형언어는 이러한 보편성에 기댄다. 그의 작품에서 보편성은 물질과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일상 문화에서 온 소재들은 종교적 보편성과 연관된다. 근대화를 통해 세속문화가 성스러움을 몰아내는 역사의 보편적 과정이 있어왔지만, 일상과 성스러움을 다시 이으려는 종교적 희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전시에서 거대한 바늘과 실로 벽을 꿰매는 듯 연출된 작품은 분리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려는 작가의 지향을 암시한다.
[블랙 & 화이트 드럼], 대리석, 2013년.
1층 전시장에 있는 한 쌍의 드럼통은 인도의 중산층에서 거실바닥으로 잘 사용한다는 대리석을 재료로 했다. 기름은 현대의 필수품이지만, 시장의 요동에 따라 국가 간, 또는 계층 간의 빈부격차와 갈등을 심화시키는 원자재로, 흑과 백이라는 강력한 이원적 구조 표현했다. 그의 작품이 출발한 일상적 물건들은 원재료와는 달리, 브론즈나 대리석으로 변조됨으로서 그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 가령 종교나 예술에 기대될 법한 영원성을 차용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식기를 비롯한 물건들은 재료의 치환이나, 양적 쇄도를 통해 기념비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특히 빈 용기나 둥근 용기는 기능적 형태를 넘어서 공(空)이나 순환적 시간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떠오르게 한다. 물론 일상은 찬미되지만은 않는다. 순수와 오염의 개념에 입각한 엄격한 힌두교의 논리는 카스트 제도와 맞물려 있는데, 수보드 굽타가 자주 활용하는 기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종교적, 사회적 금기에 대해 질문한다.
용기에 담겨져 때로 먼 거리를 이동하는 우유나 물 같은 식음료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속함과 동시에, 사회의 상징적 질서에 따라 그 흐름이 정해진다. 작가는 방향이 정해진 그 흐름에 이의를 제기한다. 가난한 이에게 제한되는 물과 음식은 작품을 통해 원래의 경로를 이탈한다. 그것은 순수/오염 간의 경계를 넘는다. 금기의 위반은 더러움의 반대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일깨운다. 둥글거나 사각 진 캔버스의 작은 유화들은 바깥으로 내보이기 부끄러울 수도 있는 어릴 적 경험에서 왔다. 30개의 작은 캔버스, 때로는 접시처럼 보이는 황금색 테를 두른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음식물들은, 먹고 남은 음식을 먹어야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일깨운다. 그것은 영국이,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남자들이 먹은 찌꺼기들이다. 인도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 작가에게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남은 음식들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포만감의 찌꺼기들이 말라붙어있는 접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에너지원이 되었고, 나머지들이 또 다른 음식으로 탄생하는 소외된 타자들의 공간은 신성한 곳이 되었다.
유화작품들
2013, Untitled, oil on canvas, Diameter 15cm
인도인의 다수가 믿는 힌두교의 교리에 의하면, 남은 음식은 매우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부정한 것은 순수하다고 생각되는 무엇을 일깨운다. 또한 이 작품은 그자체가 물감이 이런저런 형태로 말라붙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소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급문화에 대한 패러디처럼 읽혀진다. 작은 유리 상자들 안에 담긴 은제 스푼들에는 해골들과 콘크리트 덩이가 떠내어져 있는 작품들에서, 섭생에 관련된 진실은 냉혹하다. 먹지 않으면 죽고,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다른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일이다. 또한 배설물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과연 현대인이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자문한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사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실을 의미의 차원으로 정리, 충전시켜 주는 완충적 시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인간은 반복으로 인해 고갈되지 않는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은 의식주와 관련된 평범한 것들 역시 성스러움에 참여함을 알려준다.
종교학자 M. 엘리아데는 [종교의 의미]에서 종교라는 용어는 단순히 신, 신들, 또는 유령들의 존재에 대한 신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는 성(聖)을 말하며, 이러한 성스러움은 존재, 의미, 참과 같은 개념에 참여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정신은 성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참되고 강력하며 풍부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즉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출몰—과의 차이를 포착해왔다. 그러나 성(sacred)과 속(propane)은 나뉘는 만큼이나 연결된다. 속은 성현의 변증법에 의해 성으로 변환되며, 그 역도 가능하다. 성과 속이라는 양극적인 두 원리의 연합은 우주적 실재의 총체성을 표상한다. 성스러움은 의식의 역사의 한 단계가 아니라, 그 의식 구조의 한 요소이다. 성/속의 관계를 역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지만, 구조의 관점에서 본다는 현재에도 작동하는 정신적 원리가 된다.
2013, Swallow Everything Whole, Glass vitrine, marble, silver spoon with concrete, 33 (1)
이 지점에서 예술과 종교는 만날 수 있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이 단지 이국취향을 자극하는 골동품 전시장 같은 면모를 벗어나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 삶의 근원적, 실존적 정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거 뿐 아니라, 현대의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기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의 한쪽 날개는 세속적인 것이다. 번쩍거리는 재질의 일상용품들의 쇄도는 세속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빛으로도 다가온다. 엘리아데는 삶의 의식적 차원에서 세속화는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이를테면 낡은 신학적 개념이라든가 교리, 신념, 제의, 제도 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의미가 탈색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삶도 그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한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활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적이고도 은밀한 자기만의 세계와 상상적 우주에 산다.
예술가는 종교학자와 마찬가지로 이 같은 세계를 다룬다. 진보된 과학기술이 추동하는 탈 성화된 세계에서 성스러움은 무의식의 차원에 잠재해 있지만, 예술 또한 공유할 수 있는 제의적 과정을 거쳐 회귀시킬 수 있다. 이러한 회귀가 필요한 것은, 역사주의로 대변되는 직선적 시간에서 파생되는 파국을 치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생성되었던 최초의 시기로 주기적으로 복귀하는 것은 단선적 시간이 야기한 모순과 모순의 집적을 털어내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회귀는 인류에게도 한 개인에게도 일어난다. 역사주의는 그리 오래된 전통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19세기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의한 ‘신의 살해’(니이체)가 일어나고 인간이 전적으로 역사에서만 살게 되었을 때, 인류는 길을 잃었다. 인간의 역사를 발견함으로서 초래된 심각한 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만 이해하는 입장은 어떤 관점에서는 심각한 자기비하를 의미한다.
[Untitled], 로프와 알루미늄 바늘, 가변 설치, 2014년.
어느 나라보다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인도 같은 나라가 식민 지배가 마땅할 빈국이 되는 논리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현대미술의 외곽에 있던 나라에서 수보드 굽타같은 ‘세계적인’ 작가가 나온 것 자체가 역사적 독단론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성공은 물질적 진보를 향해서만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한국사회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19세기의 과학이 획득한 성과들은 당대인들로 하여금 모든 것, 즉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과 활동까지도 물질을 통해 설명하도록 강요했다. 19세기 초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발견은 인간을 역사의 차원으로만 환원시켰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시간의 축이 성공과 패배를 가르는 인과관계로 귀결되는 상황은 생산력의 진보에 의한 물질적 풍요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되 돌이킬 수는 없지만, 역사의 완충제를 도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중의 하나가 신화나 종교이다. 엘리아데는 더 나아가 그것들을 참된 역사로 여긴다. 신화는 사물의 기원을 말해주고 범례적인 모델을 제시해주며 인간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 주기 때문이다.
수보드 굽타가 믿듯이, 일상적인 것이 성스러워지려면 또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 그의 작품에서 일상을 영위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우연적 사실을 넘어서 범례적 모델의 모방으로 여겨진다. 역사는 우주창생 신화에서 이야기된 사건의 반복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드러난 모범적인 범례를 모방함으로서 의미 있게 된다. 이때 초인간적인 범례의 모방은 종교적 삶의 주요한 특성, 즉 시대나 문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구조적 특성을 띠게 된다. 가장 원초적인 문화 단계에서는 인간의 삶 그자체가 곧 종교적 행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식생활, 성행위, 노동 등이 모든 하나의 성례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종교적임을 뜻한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은 역사로만 환원될 수 없는 초역사적 차원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것이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는 진정한 실재이며, 예술 또한 여기에 뿌리를 대야 할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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