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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정 /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설정을 위한 소우주 속 실험들

이선영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설정을 위한 소우주 속 실험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소설가 보르헤스는 완벽한 지도 제작을 위해 온 영토를 다 덮어버린 지도를 만든다는 유명한 우화를 쓴 바 있다. 제국의 온 영토를 다 덮은 지도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 가고 몇 개의 지도 쪼가리들만 폐허에 나뒹군다는 줄거리다. 보르헤스는 이 우화가 담긴 [과학에 대한 열정]에서 잔해만 남은 지도보다 더 근본적인 땅이라는 실재를 강조하지만, 현대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그의 우화를 인용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지도는 건재하고, 실재가 사라진다는 역전의 신화를 말한다. 그러한 담론들은 땅(자연, 사물, 현실)이 먼저이든, 지도(문명, 언어, 허구)가 먼저이든, 하나의 차원만이 지배적일 때의 부조리함을 말한다. 실물크기의 지도라는 이상은 실제와 언어 사이의 간극 없음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적 열정은 불가능하면서도 뭔가 묵시록적인 결과를 야기한다. 제국은 지도 때문에 멸망했고, 영토가 사라진 지도는 또 무슨 소용인가. 

 


 [무간/공간/현간]

 

그리고 이 같은 과도한 열정은 과학 뿐 아니라, 작품으로 완전히 대치되는 삶에도 적용되는 바가 있다. 작품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몰입의 체험이 강할수록, 일상적 현실로의 되돌아옴은 낯설어진다. 작품만 열심히 하고 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작가는 난관에 봉착한다. 어떤 작가들은 반환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끝까지 감으로서 고난을 자초한다. 어쨌든 가야만 한다면, 그가 만들어낸 허구를 현실자체로 관철시킬 만큼 충분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몰입은 위험한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낳는다. 몰입하지 않을 거면 애초에 진입하지를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이다. 몰입이 야기하는 환상과의 거리 상실은 역설적으로 현실과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최수정의 작품에는 거리와 거리의 상실이라는 두 차원 간의 게임이 있다. 작품 [무간無間/ 공간空間/ 현간玄間]은 말과 사물, 인간과 인간...그 모두에 해당될 수 있는 어떤 간격, 또는 간격의 부재에 대해 말한다. 

 

공간에 겹쳐 쓰여 진 단어들이 하얀, 붉은, 노랑의 서로 다른 네온 색으로 빛나는 이 작품은 무간, 즉 간격이 부재했을 때, 글자는 현실을 조망하는 창이나 거울이 아니라, 한데 엉켜진 사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글자 자체가 물질성을 획득하고 지시대상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은 간극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시대상와의 간극을 완전히 없애버릴 정도로 강한 진리에의 열정은 오히려 읽거나 들을 수 없는 글과 말을 생산할 따름이다. 빠른 속도가 오히려 정지 감을 낳듯이, 표현에의 광란은 표현 자체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차이의 인정은 다채로운 삶과 예술을 위한 조건이지만, 현실은 어느 한쪽으로의 강한 쏠림과 환원이 지배적이다. [무간/공간/현간]은 최수정의 작품을 특징짓는 블랙 코메디같은 역설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작가는 무간(無間)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 팔열 지옥의 하나’를 본다. 적절한 거리의 상실, 즉 차이 없음은 열락이기보다는 지옥으로 다가온다. 

 

글자 형태들은 어두운 배경 탓에 더욱 묵시록적으로 빛난다. 최수정의 작품에서 썰렁한 세상은 더욱 썰렁하게 표현되지만, 거기에는 기묘한 낭만주의가 스며있다. 예술은 세상의 차가움 속에서도 체온을 유지하고 싶은 본능을 보호해준다. 그러나 최수정은 이러한 체온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을 등장시키지는 않는다. 작품 [무간]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칠해진 두 개의 정방형(1m x 1m) 캔버스이다. 캔버스 표면은 마치 블랙홀처럼 어떤 빛도 빠져 나올 수 없을 만큼 칠흙 같다. 이 작품은 검은색 안료로 뒤덮인 캔버스, 그리고 투명한 색들(녹색 보라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을 계속 겹쳐 칠한 또 다른 검은색 캔버스를 대조한다. 두 검은색끼리의 간격은 마주한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 드러난다. 빛과 달리, 색들이 합쳐지면 검정이 된다. 그래서 검정에는 그 안에 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 두 검정은 물감 얼룩들이 남아있는 가장자리에서만 그 미세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차이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끝까지 가볼 수 있는가. 본질과 핵심이 사라진 시대, 끝없이 표면을 탐사하는 유희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수정의 작품에서, 여러 색으로 만들어진 검정은 무수한 세월 동안에 겹쳐 쓴 양피지(palimpsest) 같은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알레고리는 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하지 않고, 기원과의 먼 거리 때문에 의미가 불투명해지는 상황을 말한다. 오랜 유적지나 폐허에는 알레고리가 잠재해 있으며, 새로움과 진보의 신화가 시들해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억압되었던 알레고리는 복귀’(크레이그 오웬스)한다. 알레고리(allegory)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allos’가 ‘다른’을 의미하듯이, 최수정의 작품에서 하나의 색은 다른 색으로 끝없이 이동한다. 무한히 겹쳐지는 차이들은 검은색으로 수렴되지만, 차이의 흔적은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남겨진다. 여러 번 칠해진 표면은 마치 잘 무두질 된 가죽처럼 질기다. 

 


 [무간](부분사진)

 

이 검은 사각형은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비추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도 비교될 수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서양미술사에서 서구미학의 오랜 전통인 재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검은 사각형]은 1913년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 무대의 가림 막으로부터 영감 받은 것이다. 관중석이 텅 빈 무인의 소우주인 극장에 그림을 설치한 바 있는 최수정의 [확산 희곡]전(2013)처럼, 세상은 축약된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볼 것이라고는 여러 겹 드리워진 막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무대에서는 배우도, 기승전결을 가지는 이야기의 구성도, 심지어는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연출자도 부재하는 이상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무대라면,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사건의 무대일 것이다. 원근법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재현은 원근법적 무대를 전제한다. 

 

무대 뒤에 전지전능한 존재를 전제하는 무대는 형이상학과 밀접하다. 거기에는 무한소실점이라는 신성한 위치가 있다. 여러 매체, 여러 작품을 통해 간격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최수정에게 그러한 무대는 파괴되기 위해서만 건설된다. 역설은 그녀의 모든 작품에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그림은 물론, 소리, 빛 등이 총동원된 그 전시, 또는 무대는 세상을 더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무대 속의 무대, 틀 속의 틀, 그림 속의 그림을 위한 비유의 장이다. 꼬리를 무는 메아리에서 메시지는 불확실해지고, 구조적 장치만 모습을 드러낸다. 장치들 안팎에 산포되어 있는 작은 도상들은 자기의 명확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 묵시록적으로 쇄도하는 도상들은 그들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한 들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번 털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깊이 없는 그림들이다. 메타픽션의 특징을 가지는 최수정의 작품에서 환영은 사라지고 표면만 남지만, 그것은 깊은 표면이며, 모든 것이 혼융되는 어떤 판을 비유한다. 

 

작품 [묵시]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문구들--‘땅에서 금을 캘 것’, ‘좋은 징조’, ‘반가운 손님 올 것’, ’고목에 꽃피는 형국’, ‘절호의 찬스’ 등--과 재난의 이미지들, 그리고 부서진 조각상들의 이미지를 바느질로 합친 것이다. 바느질한 실이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희망과 현실, 그리고 허구 간의 간극이 있다. 현실은 변증법적인 종합이나 화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봉합이다. 니이체가 객관성과 권력에의 의지를 대조시켰듯이, 봉합하는 것도 힘이고 봉합을 터트리는 것도 힘이다. 역사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쁜 결과를 맺은 역설적 사건들이 넘쳐난다. 암흑을 걷어낸 계몽의 시대가 열린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계몽자체가 신화가 되었고, 특히 재난의 신화가 되었음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 속 낡은 조각상처럼, 전대미문의 새로움이라는 외양을 취하지 않는다. 

 

 [플라밍고](부분사진)

 

전시장 천정에 매달린 자전거와 그 앞에 투사된 영상이 있는 작품 [미래로서의 소여]는 자전거 광이기도 한 작가의 취미가 드러나 있다. 자전거 바퀴살에 카메라를 달고 새벽 강가를 질주해서 만들어진 영상은 가로등 빛과 검은 그림자를 위아래로 계속 회전시킨다. 빛과 그림자의 교차는 매일 반복되는 낮과 밤을 연상시키면서, 그렇게 인생은 진행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인간이 아닌 바퀴의 시점으로 본 세상은 가속페달을 통해서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그것은 앞을 향해 전진하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회귀하는 세계를 말한다. 무한회귀를 풍부함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 고갈을 야기할 뿐인 기계적 반복으로 전락할 것인가의 차이에 따라서 우리 삶은 그 명암이 극적으로 엇갈릴 것이다. 작품 [플라밍고]는 원형 천정벽화의 구조를 본뜬 그림들이다. 작가에 의하면 천정화는 ‘위아래 양 옆이 없는 그림’이다. 벽돌로 나뉜 여러 구역에는 붉은 플라맹고는 불과 연정, 문명의 흥망성쇠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작가는 그 내용보다는 그림의 구조에 주목한다. 

 

하늘로 뚫린 창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환영의 효과가 극대화된 천정화는 현실과 최소한의 접점을 가지면서도 그 내부에 많은 세계를 포용한다. 작품 [달콤한 나의 집]은 조명등 아래 녹아 붙어 있는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광원과 너무 가까운 대상은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넘어서, 녹아내리듯이 그 속성을 변형시킨다. 마치 현대물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하이젠베르크)처럼, 관찰행위가 관찰대상을 변형시키는 것과 비교된다. 너무 가까운 것은 무간지옥을 이룬다는 메시지를 가장 사적인 영역인 집을 무대로 표현한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집은 가장 친밀하고도 기괴한 곳이다. 빛바랜 오래된 엽서에 붉은 색으로 써 있는 ‘곧 갈께!’라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 [Ich Komme Blad!]는 모호해진 시제를 암시한다. 낡은 엽서 속의 ‘곧’은 이미 과거가 되었을 것이다. ‘곧’에 스며있는 기대감도 사라졌을 것이다. 동화책 그림처럼 천진난만한 도상에는 언제나 실망을 주는 현실이 깔려 있다. 

 

그림엽서를 비롯한 작은 키치적 사물에는 달콤한 현세적 행복에 대한 기원이 담겨있지만, 그것은 거꾸로 대부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실이 씁쓸할수록 환상은 달콤하다. 화투크기의 가면 그림을 수 백 개 늘어놓은 작품 [장난꾼Trickster]은 가면을 벗겨보아도 또 다른 가면이 나올 뿐인 광대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변형 그자체가 광대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현실이나 진실처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나 거짓처럼 여럿이다. 그것은 무대 속의 무대, 틀 속의 틀,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최수정의 메타 픽션의 세계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로, 혼돈으로부터 구조화된 세계의 질서를 장난질로 엉클어 놓는다. 화투 크기로 그려진 작은 초상들은 놀이하는 세계 특유의 엄밀한 규칙이 관철되어 있다. 금기는 놀이 공간인 이 마법의 원 속에서 위반된다. 금기 위반이 야기하는 비천함과 신성함은 예술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가능할 뿐이다. 

 


 [곧 갈께](부분사진)

 

그러나 종교나 기타 인간의 여러 정신적 전통이 알려주듯이, 강한 환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17세기의 희극작가 몰리에르는 ‘웃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가장 지혜로운 자들은 아마도 가장 미친 자들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타자를 불러들이는 가면은 광기와 밀접하다. 들고나는 구멍이 불확실한 최수정의 [mineral painting] 시리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런 저런 무대들은 광기의 유폐가 일어나는 폐쇄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색색으로 기워진 옷을 입고 물구나무서서 익살을 떠는 광대는 전도된 세계의 주인공이다. 한 질서와 질서 사이에 잠깐 개시되는 무정부주의적 시공간의 왕으로, 다시 질서가 돌아오면 처형되는 이 캐릭터는 근대까지도 예술가의 비유가 되어주었다. 작가는 부조리한 세계의 주인공을 인간이나 신으로 설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까불면서 금기를 위반하는 타자로 설정함으로서 비극적 분위기를 삭감시킨다.

 

출전; 광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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