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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순 /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선영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영순이 최근에 하고 있는 ‘시간일기’ 시리즈는 자신의 삶과 예술의 여정 가운데서 멈췄으면 싶었던 충만의 순간을 그린다. ‘시간일기’라는 제목은 그 시간을 일기처럼 기록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간일기에서 예술은 삶의 정점에 놓이며, 회귀하고 싶은 모든 순간을 상징한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다시금 붙잡아 놓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림의 위대한 힘이다. 인생은 행복한 순간이든 불행한 순간이든 계속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인 반면, 회화는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원래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이후 14년 가까이 그려온 그림과 더불어 [카톨릭 사진회]의 회원으로 사진도 즐겨 찍는 작가에게 순간과 영원 사이는 너무도 밀접하다. 그 밀도 높은 시간의 배경을 이루는 공간은 대개 바깥이다. 그것은 여행과 운동을 즐겨하는 작가의 외향적 성향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올해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한 작품 [시간일기 2014_space_5]에서 낡은 여행가방과 오후의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 시계 뒤편으로 가득 펼쳐지는 들꽃, 그 뒤에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는 푸른 하늘은 바깥이면서도 안인 상징적 풍경이다.

 

늦은 오후의 햇빛과 산들바람을 받는 작은 꽃 가득한 땅에서 작가는 한참을 서 있었을 것이다. 그자체로는 특별히 눈에 띄거나 멋진 풍경이라 할 수 없는 그 잔잔한 시공간에서 작가는 그림 속 시계에서 지고의 행복감으로 멈춰버린 시간을 표현한다. 그 옆의 여행 가방은 그때그곳으로의 시간 여행을 제안한다. 그것은 그림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충만했던 그때를 향유했던 작가의 부재하는 자리를 암시한다. 가방은 작가를 대신하여 그 시공간에 서있는 것이다. 다른 그림에서는 그 자리에 악기나 스피커 등이 놓여있기도 하다. 음악은 시간을 타는 매체로, 그 또한 밀도 높은 시간의 향유를 가능케 한다. 작품 [시간일기 2014_space_6]에서 하얗게 쌓인 눈, 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습지를 배경으로 전경에 놓인 낡은 스피커는 소리 없는 그림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바로크 풍의 음악을 들려주는 듯하다. 음악과 회화의 상호 조응은 밝고 어두움의 대비가 강하면서 모든 것이 서로 뒤섞여 함께 휘몰아치는 환영으로 나타난다. 

 

지평선 근처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것들은 오디오의 이퀼라이저처럼 소리의 강도를 시각화한다. 소리의 출렁임은 작품 속 공간에 미동을 남긴다. 이영순의 그림은 그곳에 있었을 때, 또는 그곳을 회상하며 그림을 그렸을 때 공간을 가득 채웠을 바로 그 음악이 들려오는 듯하다. 음악은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완전히 변모시킬 수 있는 밀도 있는 시간의 상징이다. 움직이지 않은 그림이 생생한 현재(present)성을 증거 한다면, 음악은 깊은 몰입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현존(presence)성을 야기한다. 순간과 지속의 만남은 그림 속의 악기, 또는 시계 뿐 아니라, 그녀의 그림에 잘 등장하는 들꽃에서도 발견된다. 식물은 짧은 순간의 개화를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하며, 시들어 죽은 듯 하다가도 이듬해 다시금 부활하는 삶의 주기, 즉 순환하는 시간관을 알려준다. 지금 여기의 행복은 이러한 영원회귀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향유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도 친숙한 순환적 시간관은 처음과 끝을 가지는 단선적 시간관에 비해 긍정적 세계관을 내포한다. 

 

한 번에 끝나버리는 삶은 얼마나 과도한 인생의 도박을 야기하는가. 현대를 지배하는 단선적 시간관은 현재를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 속에 방치하며, 궁극적으로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단기적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하도록 강제한다. 이러한 불가역적인 시간 속에서 매번 다시금 시작되어야 할 예술이란 것이 자리할 틈은 별로 없다. 그 공허한 시공간을 맹렬한 생산과 소비가 채우고 있을 따름이다. 작품 [시간일기 2014_space_3]에서 둥근 돌 연못 위에 떠있는, 또는 반영된 듯한 들꽃 무리는 마치 시침 없는 시계처럼 둥근 외곽을 둘러싸며 떠 있다. 그것은 시간의 환(looping)을 이루면서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오게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는 중층적이다. 이영순의 작품은 아크릴로 작업하기 전에 캔버스에 한지를 발라서 도톰하고 깊은 질감을 부여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한지는 두께 감, 질감, 정감, 동양적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다시금 피어날 야생화, 집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여행가방, 시간여행의 동반자인 음악 등은 일기처럼, 반복해서 펼쳐 채워나가는 그림처럼 지나간 시간을 호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 과거형 기록이 아니라, 매순간 갱신되면서 미지의 시공간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사회적 편의를 위해 약속된 보편적 시간으로부터 초월하게 한다. 작가는 연속적이고 객관적으로 간주된 시간의 한 토막을 잘라내 또 다른 시간감각으로 확장한다. 절대적 시간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현대 과학의 상대성 이론을 인용하면서, 시간은 상이한 체계에서는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되고 준거 기준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한다고 지적한다. 멘딜로우는 절대적 시간 간격으로부터 초월한 시간대를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조건은 심장의 박동을 격렬하게 만들 수도 있고 느리게 변화시킬 수도 있음과 비교한다. 예술작품에서 시간은 고무줄처럼 신축적이다. 매 순간의 강도는 다르다. 그림이라는 형식 자체가 현 순간에 대한 의식을 고양한다. 

 

작가는 무심히 지나가는 것들을 현 순간에 붙잡아서 ‘그것이 이해에 의해 완전하고 밝고 깊게 빛날 때까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그것을 완전히 채워 넣을 수 있기를’(버지니아 울프) 바란다. 회화는 기승전결이 아니라, 계속적인 현재로 제시된다. [시간과 소설]에 의하면 소설에서 이 효과는 문법상으로 현재 시제를 취하는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의 수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은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현재 위에 솟아오르는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을 묘사한다, 그것은 지난 현재들을 단순 과거가 아니라, 현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말한다. 멘딜로우는 매순간이 지나간 역사의 응축이며 과거는 별개의 완성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재의 발전적 부분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의 시간은 어떤 선을 따라 나가는 점의 전진, 또는 단순한 집적에 의해 전진이 아니라, 매순간에 의해서 증가되고 부풀어 오르는 파도의 전진과 비교된다. 맥락은 매번 변화한다. 파도의 이미지에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무한한 반복, 그 반복 속의 차이가 있다. 이영순의 작품은 이러한 자연의 시간과 예술 및 삶의 시간을 중첩시키려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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