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김나연---‘빛의 저편’, 빛과 그림자만으로 연출된 우주
김나연이 ‘빛으로 그린 그림’은 추상화에 속한다. 어둠의 요소로 포함된 다양한 계열의 그림자 또한 ‘빛을 가지고 쓴다’는 의미를 통해 사진과 연결된다. 빛과 그림자의 양태는 시시각각 달라지며, 그때마다 같은 세상도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준다. 작품 속 추상적 장면은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사진이라는 틀로 잘려진 장면은 모호하다. 색을 비롯한 잡다한 요소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조형적 요소가 최대한 감축됨에 따라, 구성의 미는 최대한 발현된다. 구성은 흩어진 것을 모이게 하거나 모여 있는 것을 흩어지게 한다. 구성에는 해체의 계기가 있으며 그 역도 성립된다. 사진적 프레임은 다양한 공간적 관계를 파생시킨다. 어떤 공간을 선택하는 만큼이나 시간대도 중요해서 그 변수들에 따른 미묘한 차이들을 담아냈다. 그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관념적 우주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사진이 지시대상과 무관할 수도 있는 예술의 반열에 오른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진은 인덱스로서의 실증성을 갖고 있다고 믿어지며, 또 그것이 사진의 힘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인물도, 사물도, 서사도 없이 빛과 어둠으로 분절된 공간을 담은 김나연의 사진들에는 분명한 지시대상이 있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빛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의 한 부분들이다. 그러나 그는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구석들을 선호한다.
전체에 대한 지도가 없이, 빛이 들어오고 나가는 부분들만 암시되는 공간은 그 자체의 자족적 우주를 이룬다. 공간은 어떤 기능을 넘어서 순수한 심미적 차원으로 재탄생한다. 작품은 인공적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 또는 드라마가 된다. 어떤 작품에서는 벽의 모서리라든가 원근감이 느껴지는 깊은 공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단면들로 잘려진 화면들은 무채색의 기하학적 추상화 같은 느낌이다. 물론 이 기하학에는 직선만 포함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하얀 액체가 쏟아지는 듯한 빛줄기나 공간에 잡힌 주름들은 더 고차원적인 부드러운 기하학 또한 예견한다. 어둠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분할된 화면에서 꽤 큰 영역을 차지하면서 빛과 그림자만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에 무게감을 준다. 어둠은 빛의 보조적 요소가 아니라 빛이 태어난 곳이며 또한 언젠가는 회귀해야 할 원초적인 시공간으로 현전한다. 빛은 모든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이자 모든 색의 근원이기도 하다. 김나연은 빛을 희망으로 상징하며, 현실에 더 많은 절망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의 작품에 어둠보다 더 가중치를 두었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한 현실의 양면으로 양자의 경계는 가변적이며, 뫼비우스 띠처럼 파동 치면서 다양한 우주의 풍경을 그린다. ‘빛의 저편’이라는 부제는 빛이 여기가 아닌 저곳으로부터 오는 절대적 타자임을 알려준다. 빛은 인간에게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희망에 속하는 것이다. 김나연의 작품은 흑백의 계열이 원색보다 더 풍부하고 깊을 수 있음을 알려주지만, 중간단계들이 생략되고 흑과 백이 절벽처럼 대립각을 세운 작품들도 꽤 발견된다. 빛과 그림자는 음양이나 밤과 낮처럼 상보적이긴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서감각을 일깨우는 이원대립의 원형적 상징이다. 그래서 빛은 명백한 진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본다. 그래서 빛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기미를 띄고 있었다. 그것은 이론적인 명확함과 가시성을 인식의 중심에 놓게 했다. 그것은 계몽의 역설이 예시하듯 점차 폐쇄적이 된다. 작품 속 추상적 빛은 관념으로서의 빛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편재하는 빛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 관념적 우주 바깥으로 열린 창문을 낸다.
김영수---‘신의 지문’, 이미지에 새겨진 성스러운 코드
김영수는 사진 한 장을 보는데 몇 초 밖에 걸리지 않는 이미지 소비의 폭주를 지연시키려 한다. 지연의 한 방식은 사진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읽어야 하는 것은 짧지만 큰 울림을 주는 메시지여야 했다. 그런 메시지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종교일 것이다. 여기에 과학적 기술과 예술적 감성이 더해진다면 보편성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작품에는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두 종교의 상징들과 더불어 QR 코드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수평을 가로지르는 수직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의 방식같이 동서고금의 보편적 구조들이 편재한다. QR 코드는 종교적 메시지와 관련된 정교한 수비학(Numerology)적 상징에 따라 배열되기도 하고, 중층적으로 배열된 이미지와 구성상의 상호보완을 이루기도 한다. 정사각형 코드들의 배열은 촘촘한 그리드를 이루거나 핵심적 부분에 단독으로 배치되어 구성의 묘를 더한다. ‘신의 지문’은 QR 코드 지문과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신이나 지문처럼 부재하는 현존의 흔적이다. 작품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삽입된 QR 코드는 텍스트 뿐 아니라 소리나 이미지 등의 정보로 읽혀지며, 세계 공통어(인터넷)와 연결되는 입구가 된다. QR 코드가 삽입된 사진은 한 장의 이미지를 넘어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가령 작품 [에밀레]는 분석된 음파 스펙트럼을 보면서 종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간결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만, 중층적으로 읽혀진다. 그것은 사진을 찍음으로서 더욱 확신하게 된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의 표현이다. 세계는 보이는 것이 전부이거나 단번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읽혀지는 구조 속의 구조, 텍스트 속의 텍스트, 기호 속의 기호 등으로 나타난다. 김영수는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스스로 ‘독실한 유신론자’로 생각하며, 그의 사진은 성스러움의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다차원적인 시도들이다. 작품 [창세기]는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빛과 어둠의 이미지 위에 고대 문자와 QR 코드를 배열했으며, 작품 [잠언]에서 QR 코드들은 지혜의 문이 되고, 작품 [마태복음]에서 QR 패턴은 십자가 형상으로 배열된다. 작품 [천지 창조]에서 화면 중심부의 QR 코드가 강력한 구조를 이루면서 유동적으로 생성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 작품 [아멘]은 수백 미터 지하의 탄광 속에서 스며든 십자가 형상의 빛을 통해 요한 계시록을 떠올린 작품이다. 삶과 죽음같이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개념의 상보적 연결과 순환은 [반야]와 [금강경]같이 동양의 경전이 등장하는 작품에도 이어진다.
종교가 그러하듯이, 그의 작품에는 논리와 합리를 넘어선 신비스러운 결합이 있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단순한 물질적 대상을 넘어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 덕분이다. 이 세계는 ‘보이게 현현된 비가시적인 것들의 체계’(바울)로, 보이는 것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촘촘하게 구성된 상징의 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적인 상형문자나 성스러운 기호로 나타난다. 세계는 신의 서명이 새겨진 성스러운 기호로 뒤덮여 있는 신비로운 것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기호를 해석해야 한다. 사진 찍기 역시 QR 코드를 찍는 것처럼 창조된 자연의 비밀스러운 형식을 읽는 방식이다. 현대인의 실증적 사고를 넘어서는 심층적 상징의 세계를 표현하는 무한한 연상과 해석의 연결고리를 촉발시키는 것은 유사한 것들 간의 융합이다. 코드와 세계는 유비적 관계를 가진다. 세상은 의미작용의 보편적 관계가 새겨진 성스러운 경전 같은 것이며, 코드화된 기호체계로 읽혀질 수 있다. 기호와 사물이 분리되어 각각 파편으로 떠도는 현대에 그는 기호와 사물의 질서를 다시 융합시키려 한다.
김상미---‘아버지의 땅’, 기억의 장소
돌아가신지 20여년이 지난 아버지의 문패가 아직도 걸려있는 처마 밑에는 ‘아버지의 땅’을 지키고 가꾸는 어머니의 존재와 이를 지켜보는 딸의 시선이 겹쳐진다. 얼마 전에 붙었을법한 도로명 주소나 푸릇한 풀은 그 뒤의 벽과 담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김상미의 사진은 반복되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것들을 담는다. 사진은 차이 속의 반복을 증거하는 이상적인 매체이다. 그것들은 작품 속 금색 틀에 넣은 기념사진처럼 어떤 순간을 기념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다. 가령 명절 때 모인 가족들의 신발들, 다음 작업을 위해 깨끗이 말려놓은 장화, 선반위의 대광주리들, 뚜껑이 제각각인 장독대 등이 그렇다. 정작 아버지의 땅을 지키고 가꾸는 주인공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은 집안에 자리 잡은 어떤 것들도 소중히 다루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사진 속 물건들은 보여준다. 그것들은 빈자리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모두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방 헌 것이 되어 새것에 밀리는 쓰레기 천지에 살고 있는 현대 소비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거의 유물 급이다. 문화유산이 고이 전수돼야 하듯, 김상미에겐 가족사가 오롯이 담겨진 사물들 또한 그래야 한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도 작동하는 사물들이지만,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기 보다는 그 소우주의 주인공과 더불어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의식된다. 일상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다루듯 그렇게 하나하나 사진이라는 상자에 담겨지며, 때가되면 다시 호출되어 생동했던 삶을 추억하는 단편들로 작동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김상미에게 사진은 향수이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사라진(질) 것이 주는 감흥이 있다. 아버지의 땅에 남아 있는 것이 지은 지 70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며, 지금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도 90세를 바라본다는 점은 매순간 남아있는 시간을 생각게 한다. 그 집은 스무 살 무렵에 결혼한 부부가 평생을 보내고 3남 3녀가 자랐던 곳으로, 얼추 한 인간의 생애와 비슷한 시기를 보냈다. 시간의 흔적을 포착하는 사진 예술은 그러한 고고학적 장소를 애호한다. 주거 안정성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현대적 삶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이러한 터전이 아직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러한 각별한 장소를 가진 이가 만약 사진을 찍는다면 자신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그 장소가 사진적 대상의 1순위가 되지 않겠는가.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오래된 사물들이 심미적인 대상으로 재발견되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온갖 정겨운 잡동사니들은 누구에게나 그 기능과 쓸모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작가의 내밀한 곳을 찔러오는 부분적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사물의 주인만이 부분적으로 재현된 것들을 엮어 온전한 전체로 매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추와 깻단, 대추와 양파, 이름 모를 열매들을 심고 가꾸는 이는 작은 뜰 안을 모든 것이 꽃피고 열매 맺는 자족적인 소우주로 만들었다. 그곳은 다음해에 뿌릴 씨를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을 조금씩 갖춘 이상적인 정원이다. 이러한 장소는 자신만의 것을 뿌리고 가꾸는 예술의 모델이 된다. 창호지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들을 비추며 사물에 온기를 유지시킨다. 살아생전에 심어놓은 꽃과 나무들은 해마다 다시 피어나면서 남아있는 다른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징후들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매순간 어떤 감흥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기호들이다. 어머니는 집안 구석구석에 아버지 사진을 확대하여 걸어놓고 아직도 남편과 함께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진은 필요한 모든 것이 자라날 땅을 남긴 아버지와 이를 소중히 가꿔온 어머니를 이어주며, 작가와 가족을 이어주는 각별한 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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