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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석 / 길 없는 길을 향한 끝없는 여정

이선영

길 없는 길을 향한 끝없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내가 홍원석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2007년경, 그때 그의 주요 매체는 회화였다. 심해 또는 우주를 떠올리는 짙푸른 공간을 가르는 자동차의 노란 써치 라이트, 빛과 어둠, 환상과 멜랑콜리가 공존하는 시적인 그림이었다.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작은 자동차는 자아 및 자아의 연장처럼 보였고, 그 자아의 은유는 고립된 섬을 넘어서 외계를 탐사하는 동력이 되어 낯선 이곳저곳을 비춰보였다. 자동차는 배나 우주선이 되기도 하고, 어두운 공간을 극장화 하는 영사기 같은 역할도 하면서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열어주는 매개체였다. 그림 속 자동차는 캔버스에 국한된 작은 공간을 언제라도 뛰쳐나올 가능성을 탑재하고 있었다. 1982년생으로 당시에 20대였는데, 그림을 팔 수 있기도 했던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회화가 아닌 다른 프로젝트들을 더 많이 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홍원석_어두운  길_130 x 162cm_oil on canvas_2013

 

  

홍원석_낙동강나들이_2012_oil on canvas_130 x 160cm

 

올해 ‘별별 예술프로젝트’(경기문화재단)에 선정되어 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진행하는 전시/프로젝트 ‘p.s. I love U’ 에서도 둘은 함께 한다. 운전을 업으로 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림에 담겼듯이, 그림은 또 다른 출발을 위한 플랫폼이 된다. 한국 미술계에 화가는 많고, 2000년대 중반 이후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 몰두해왔던 이들도 꽤 되지만, 양자를 넘나들며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예는 드물며, 그것이 홍원석의 특징이다. 이번 전시/프로젝트는 2010년 이후 해왔던 ‘아트택시 프로젝트’의 결과물들과 이 택시를 매개로 한 새로운 프로젝트의 참가자를 모집하고, 그 결과물을 다시 회화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제작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전시장에 들어서 보게 되는 가장 큰 설치물은 [다람쥐 여행]이다. 가로 8미터, 세로 3미터 크기로, 뫼비우스 띠 모양으로 얽은 각목들 사이에 모니터들을 군데군데 설치했다. 

 

이 대형 영상설치작품은 한국의 분단현실을 은유한다.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공회전 하는 분단 현실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그 현실은 우리에게 끝없는 과제로 다가옴을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끝없는 길에 대한 비유이다. 홍원석의 작품에는 회화든 아니든 길이 편재한다. 가령 이번 전시에서 2013년에 경기도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720x1000cm의 거대한 영상설치 작품 [아시안 하이웨이]의 일부인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고 새겨진 표지를 양탄자로 삼아 관객의 동선을 유도한다. 동시에 뫼비우스 띠라는 비유는 회화와 다른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에 대한 은유가 되기도 한다. 그는 프로젝트 진행 중에도 1주일에 이틀정도는 그림 그린다. 벽면에는 2012년부터 2014년 사이에 그린 그림들을 걸었다. 그림 속 헤드라이트를 켠 택시는 통일을 향해 전진하려하지만 곳곳에 있는 난관들을 은유한다. 분단현실이라는 맥락에 맞춰, 지인이기도 한 탈북 화가의 그림도 함께 전시한다. 

 


홍원석_아시안하이웨이_2013_영상설치_720 x 1000cm

 

전시와 더불어 온라인에서도 함께 진행하는 ‘p택시’ 참가자 모집은 이전의 방식과 달리 그 인물들이 제시하는 장소를 체험하는 프로젝트이며, 여기에는 북한이탈주민, 건축가, 요리사, 예술가, 소설가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영상, 설치, 과정적 성격을 띈 프로젝트 사이에 한 장의 화면으로 상황을 농축시키는 것은 그림이다. 짙푸른 망망대해에 라이트 켠 차 한대가 떠 있는 [어두운 길](2013), 보다 엷은 하늘색으로 칠해진 강에 자동차가 떠있는 [한강나들이](2012), 황톳물에 떠가는 하얀 택시를 그린 [낙동강나들이](2012)는 나들이라는 설렌 표현과 달리, 길 위에 오른 여정이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길 없는 길을 끝없이 가야하는 상황 말이다. 그것은 그가 여태까지 해온 작업의 성격과도 비슷하며, 앞으로도 확실한 길은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이전 그림과 달리, 물감 덩어리가 떨어져 나올 듯 두텁게 칠해진 부분도 있는 등, 거칠고 자유로운 붓질이 특징이다. 그림 안에도 과정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 안에 다양한 이야기를 접어 넣은 이전과 달리, 상황은 보다 압축되어 있다. 그림들에 깔린 정서는 녹색 습지 위에 녹아내릴 듯 떠 있는 자동차가 그려진 작품 [불안](2014)처럼, 한 치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불확실하다. 심연을 향해 끌어내리는 축축한 기운은 자동차 라이트를 녹여버릴 듯하다. 작품 [불안]에서 보여지듯, 그의 그림은 더욱 회화적으로 변했다.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화면 밖으로 나온 자동차가 더 잘 할 수 있기에 화면 속 이야기는 응축되어 있고, 회화로 할 수 있는 행위는 더욱 강조되었다. 그림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매체가 상호보완적이다. 험난하고 끝없는 여정을 상징하는 나무로 얽어놓은 구조물 사이사이에 설치된 영상작품은 각각이 하나의 작품이자, 작품에 대한 다큐멘타리같은 속성을 가진다. 가령 [P_택시 프로젝트 DMZ](2013)를 보면, 그가 입주했었던 경기 창작센터로부터 출발하여 판문점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홍원석_불안(Status Anxiety)_2014_oil on canvas_130 x 160cm

 

판문점에서 연주할 뮤지션들을 만나는 과정, 차안에서의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진다. 공연 중에 작가는 둥근 지구 위를 도는 차를 그린다. 시작과 끝은 지구 위를 둥글게 도는 차는 원래 지구에는 38선이든 무엇이든 경계가 없는 곳임을 강조한다. 끝없는 떠남은 목가적인 유랑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그어진 경계를 위반하는 도전이다. 그의 영상작품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영역을 허무는 듯, 매우 자유롭다. [아트 자동차_바람](2012)에서는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말하는 장면부터 화장실 가는 장면까지 소소한 일상사를 드러내 보인다. 회화에서는 한정된 공간에 응축해야 하는 시간성(또는 서사)을 영상매체에서 최대한 담는다. 영상에 의해 무한대로 도입된 시간(서사) 덕분에 말 못해서 억울할 일은 없을 듯하다. 회화보다 긴장감은 없지만 촬영된 영상 안에는 작업실에 붙어있는 ‘외롭지 않다’, ‘야간 운전 조심’같은 문구 등, 그의 영상에는 노출하고 엿보는 재미가 있다. 

 

[홍반장 아트 택시 프로젝트](2011)에서 제주도의 어르신들이 주로 탑승했던 아트 택시에 예쁜 여학생이 탔을 때의 설레는 표정도 아이폰 카메라는 다 잡아냈다. 이참에 그림이라는 사각 공간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모두 담아내려는 듯이, 또는 지극히 사사로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예술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이 말이다. 홍원석의 프로젝트들은 공공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분리된 공적/사적 영역사이의 경계를 침범하고 위반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공공예술이다. 영상은 자신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는 매체이기도 하다. 택시 안에서의 대화가 여러 프로젝트의 주축을 이루었듯이, 타자와의 대화는 독백으로 기울기 마련인 그림에서의 갈증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전시/프로젝트에 부분적으로 공개되는 손글씨로 꼼꼼하게 써내려간 탈북 여성과의 편지 교환도 공/사를 넘나드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중의 하나이다. 

 


홍원석_홍반장아트택시 프로젝트_싱글채널비디오_5분41초_2011

 

영상은 회화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느슨하게, 회화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한다. 회화는 풍경이 주를 이루지만 영상은 인물들 간의 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동차안의 대화이다 보니, 마주보는 대화가 아니라 목표 지점을 함께 보면서 하는 대화이며, 어떤 결론의 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흐르는 대화이다. 미지의 관객을 향해 말할 때 그는 자동차 앞 유리창을 보고 운전하듯이 카메라를 본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그동안의 프로젝트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지역(P택시 노선은 승객이 원하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으며, 주로 남북 접경지역이 중심이다)과 주제(전시 기간 동안 P택시에 탑승하고 싶은 이들의 사연과 함께 접수 받는다)를 좀 더 압축한다. 요리왕 비룡, 똘이장군, 소설가 구보씨, 전우치 등, 작가가 선정한 가명의 동승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직업은 탈북화가, 전통시장 예술감독, 요리사, 사진작가, 소설가 등 종류도 다양하다. 

 

대화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충돌하며, 같음과 다름이 확인되는 장이다. 작가는 이 이질적인 흐름들을 굳이 하나의 방향으로 조율하려 하지 않는다. 그림은 홀로 하는 것이지만 공공 프로젝트는 바깥으로 열려있다. 물론 그림도 사막과도 같은 바깥을 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유일 따름이다. 그러나 공공 프로젝트는 실제로 다수의 타자들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해야 하는, 어찌 보면 번거로운 작업이다. 그래서 공공예술에서는 작가보다는 감독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 같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은 작품으로서의 밀도나 완성도 보다는 일회성 캠페인에 머물 때도 있고, 공공기관의 들러리가 돼야할 때도 있다. 공공의 장에서의 작업 역시 고립된 작업실에서의 그것만큼이나 소모적일 수 있다. 작가가 주도적으로 하지만 변수가 많으며, 공공의 지원도 필수적이다. 그동안 홍원석은 젊은 작가 특유의 유연성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잘 꾸려온 편이며, 분단 현실 70년을 맞아 기획한 ‘p.s. I love U’는 통일부의 후원까지 끌어낸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이다. 

 


홍원석_p택시프로젝트-DMZ_싱글채널 비디오_24분50초_2013

 

평양과 서울을 암시하는 알파벳, 나와 만나는 불특정 다수인 U(너) 등, 서로 달라 충돌까지 하는 범주들이 부딪히는 장을 마련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회화와 영상설치는 크게 부딪힐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이것저것을 다 보여주려는 욕심이기 보다는 회화 내부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각성과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회화가 가지는 어떤 힘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시간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의 전체 작품 목록에서 회화와 프로젝트의 비중이 가늠할 수 없게 된 이유는 애초에 그의 회화가 삶의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삶의 연장이 아닌 회화가 어디 있겠냐만은 어떤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양자의 단절을 강조하며 ‘순수’를 고집해 왔고, 그것이 현대의 분업사회에 맞는 화가로서의 길이라 생각됐다. 최대한 자기정체성을 찾아 평면으로 귀결된 추상회화 역시 재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재현이란 그 안에서 경험이 발생하는 공간 배열, 곧 어떤 형성, 모형, 추상적인 기하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지엽적인 차이의 드러남만이 존재한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 즉 회화가 모든 것은 아니다. 완전히 자족적인 우주를 창조하여 완벽하게 소통하겠다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완전한 존재에 대한 완전한 경험은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항상 연기된다. 회화에는 완벽한 순간에 대한 기대가 있다. 여기에서 시간은 멈춰 선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순간의 미학]에서 시간은 순간 안에 꽉 조여 있고 두 개의 허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현실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바슐라르가 새로움이란 항상 순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동시에 그는 모더니즘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의 미학]에 의하면 예술가가 꿈꾸는 ‘모든 것이 주어질 수 있는 신성한 시간’은 ‘완전한 시간’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이러한 완전한 시간은 순간이고, 시간으로서의 모든 역할을 갖고 있는 것은 현재적 순간이다. 순간은 그 내부에 지속을 지니고 있지 않다. 

 

홍원석_한강나들이_2012_oil on canvas_130 x 160cm

 

그것은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도, 또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힘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이고 유일한 것이다. 현실의 시간은 고독한 순간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무한히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관찰하고, 순간에 모든 작품의 깊이와 충만함을 체험하여 그로부터 영원한 확신을 얻는’(프리드) 모더니즘적 현재성(presentness)을 강조한다. 짧지만 실로 자족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회화이다. 홍원석의 작품이 추상회화는 아니었지만, 깊은 밤, 우주, 바다를 연상케 하는 광막한 공간을 채우는 색은 추상적이었으며 작품에 내재된 서사의 하이라이트를 강조하는 밝은 빛 역시 순간적이다. 그러나 화단의 호응과 더불어 회화의 밀도를 강화하고 있던 시기에 작품 속 자아의 상징인 자동차는 말 그대로 회화라는 공간에서 벗어났다.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로의 환원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확산됐다. 순수를 보존할 수 있는 순간의 정점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지속으로의 유랑이 시작됐다. 

 

모더니즘적 관점에 의하면 지속은 오염된 순간이다. 특히 홍원석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야간운전의 체험은 지속의 전형이다. 지속은 한순간에 일별하는 무엇이 아니라, 대상이 모호한 가운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체험이다. 그것은 마치 ‘무한하게 펼쳐진 전망 속에서 포착되는 것처럼,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시간의 의미처럼’(프리드) 다가온다. 작품 내의 명증한 논리가 아니라, 상황이 중요해진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전시 구조물인 뫼비우스 띠는 이러한 시간성, 즉 ‘무한성에 대한 예감’, 즉 ‘본질적으로 무한정하고 불확실한 지속에 대한 예감’(프리드)을 보여주는 거대한 몸체이다. 물론 홍원석의 작품은 모더니즘을 넘어서기 위한 현대예술의 흐름 속에 만연한 체험, 즉 홀린 듯한 몰입의 체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우리사회/시대의 거대한 화두를 풀어나가는 그의 방식은 계몽주의적 명료성과는 거리가 있다. 

 


홍원석_아트자동차-바람_싱글채널 비디오_14분_2012

 

그의 프로젝트는 미로처럼 철저하게 불확실함에 열려있는 것이다. 가령 끝없이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합리적 이성에 의한 의사소통’(하버마스)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가까운 대화는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동원되는 장치들--요컨대 타자의 편지나 그림부터 택시까지—은 모두 지속 돼야 할 이야기를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이렇게 지속하다 보면 ‘합리적인’ 이야기도 포함될 것이다. 택시를 타고 평양까지 스스럼없이 가게 될 어느 시점을 겨냥한 이 프로젝트는 작가로서는 곧 다가올 촘촘하게 짜여 진 계획표가 아니라, 정처 없는 지속에 해당되는 것이다. 홍원석의 작가적 삶이 그랬다. 실제로 그는 제주에서 파주까지 북한 이외의 지역에서 꽤 많은 창작스튜디오와 작업무대를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 갈 것이다. 그것은 부유한 자의 유목이 아닌 가난한 자의 유목이었지만, 유목은 그가 최초에 자동차를 선택했을 때부터의 운명은 아니었을까. 

 

그간의 그의 작품들은 자신이 존재해온 곳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은 것들로, 유목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물론 홍원석에게 유목이란 자동차로 떠난다는 의미뿐 아니라,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될 수 있는’(들뢰즈와 가타리) 다양한 형식 간의 이동도 포함된다. 이렇게 연결접속된 것들은 마치 지도처럼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지도와 책을 대조한다. 이데아같은 초월적 관념을 재현하는 사본으로서의 책의 억압성을 강조하면서 그로부터의 탈주를 권한다. 정착하려는 자는 책이 필요하지만, 유목하려는 자에겐 지도가 필요하다. 유목민의 길은 미로이다. 홍원석에게 이러한 유목의 길의 필수품은 자동차이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에서 유목할 곳이 어디있겠나 싶지만, 뻔히 보이는 길도 복잡하게 꼬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전시/프로젝트가 겨냥하는 분단현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선 잘 포장된 길에서처럼 명확하게 조준된 목표를 향한 속도가 아니라, 미로 여행자의 지혜나 자질이 필요하다. 

 


p양_S에게 보내는 P의 편지_종이에 볼펜_29×21cm_2015

 


오성철_내가 본 명화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8cm_2014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미로 탐사자는 속도라든가 이성, 논리, 투명함 등 산업사회에서 칭송받는 덕목들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로 속에서 유목에 필요한 덕목은 끈기, 느림, 짓궂음, 호기심, 계략, 유연성, 즉흥, 극기, 연대 등이다. 이중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연대이다. 홍원석의 택시에 동승한 자는 일종의 연대의식을 가진다. 여기에서 연대란 비슷한 류가 뭉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굳이 차이들을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한다고, 분쟁이란 비슷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소한 건으로 곧잘 벼랑 끝을 향해 충돌하는 남북관계에서 보여지듯 말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자유를 찾아 떠나왔던 이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떠나왔지만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했다. 가령 이번 프로젝트에서 작품과 편지, 인터뷰, 승객 등으로 등장할 탈북민의 경우, 그들이 한국에 최종적으로 기착했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2만 5천명에 이르는 탈북민은 아직도 얼굴 없이 살아가는 유령 같은 존재, 내부의 유배자들에 속한다. 

 

홍원석의 택시에 승차할 미지의 관객은 신청서를 써서 배 모양으로 접어 소망을 띄우듯이 전시장 바닥에 띄울 것이다. 그는 갈수 없지만 가야하는 그 길을 가려하며, 그것은 작업하는 삶의 고단함과도 겹쳐진다. 자동차로 대변되는, 이러한 유목을 언제까지 계속 할 것인가에 대한 피로감도 언뜻언뜻 감지된다. 그림에는 그 매체 특유의 속성에 의해 그것이 단적으로 보인다. 이번에 걸린 그림들은 물속에 잠겨있는 구도가 대부분이다. 가볍게 떠나야 하는데, 길은 뚝뚝 끊겨있다. 달리거나 날아야할 자동차는 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파란 바다와 노란 불빛의 대조는 작년 이맘때 쯤 침몰한 세월 호를 떠올린다. 무엇 때문에 그 배는 가야할 곳을 가지 못하고 침몰했는가.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린 욕심의 무게 때문 아니었나.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 지키라고 명령한 이는 누구였나. 누군가에게는 질곡 바로 그 자체인 현상유지를 원하는 그런 인간들(또는 구조) 아니었나. 끝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했던 진정한 유목의 정신으로 충전된 예술이 분단 현실을 주목할 때, 통일이라는 화두는 좀 더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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