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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반투명 우주

이선영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반투명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장에 여러 겹으로 설치된 모기장은 여름방학 때 시골할머니 집에 놀러가서 대청마루에서 함께 자던 친척들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해주던 아늑한 느낌을 기억나게 한다. 작품에 사용된 작은 텐트도 그렇다. 그러나 해충이니 익충이니 하는 분류법은 인간중심적인 것이며, 자연에 대한 과도한 반작용은 자연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연은 대화와 공존의 상대이지 완전한 조정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완벽히 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빅 브라더스’의 사회를 만들 것이다. 타자를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반투명한 망들 사이에 투명한 반구 안에 수놓아진 벌레들은 올 3월 울산 북구예술창작소에 입주하며 그 주변에 서식하는 곤충들인 개미와 지네들로부터 온 것이다. 같이 표현된 민들레, 쑥, 들풀 같은 식물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그것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불굴의 생명력을 생각하게 했다. 


김경선 본()-울산문화예술회관 설치 2015

 

설치 작품 제목인 ‘본(本)’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생명들의 근본적 뿌리에 대한 생각을 담는다. 공간에 드리워진 망은 그 투명성으로 인해 복잡한 층들을 보여주고 사이사이에 설치된 투명구들은 망과 상호작용하는 작은 생명들을 확대하는 효과를 주며, 묘사된 개체들에게 단독의 존재감을 부여한다. 구들은 오롯한 자신만의 세계이면서, 허공이나 거품같이 부질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대여섯개 크기의 투명 구는 작은 생명의 이미지를 수놓은 판들을 포함하고 때로 거울이 끼워있기도 한다. 거울은 투명한 재료들이 넘쳐나는 설치물에 확장성을 부여한다. 또한 생명이 가시화된 경이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객 또한 비추면서, 개미나 지네가 나를 침입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개미나 지네의 세계를 침입한 것일 수 있다는 상호적 사고가 있다. 공존이라는 메시지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타자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항시적으로 치루고 있는 현대의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대한 시각적 메아리의 세계는 각기 단절된 소우주를 연결시킨다. 여러 계열을 가진 구의 연결망은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생태적 사고부터 ‘존재의 대연쇄’라는 이전시대의 종교적 세계관까지 아우른다. 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우주의 체계와 구조에 대한 관념, 즉 존재의 대연쇄로서의 우주관. 무한한 수의 위계질서 속에 배열되어 거의 비존재에 가까운 가장 미소한 종류의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수의 연쇄의 고리들로 구성되었다는 세계관을 소개한다. 물론 현대의 작가인 김경선에게 이 연쇄는 군데군데 끊어져 있으며 계층적 질서도 붕괴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은 그 이전의 연결망을 생각하게 하고, 다시 그러한 신성한 연결망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이끈다. 인간 또한 그러한 연결망에 속해 있었지만, 비약적인 생산력의 혁명을 이끈 근대의 산업혁명과 그 이후의 ‘진보’는 인간의 비중을 크게 했다.  


김경선_()시리즈_,_2015


 

김경선_()시리즈_,_2015

 

작가가 구 속에 설치한 거울은 그물망에 속한 인간과 그 그물망을 바라보는 인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품 속 거울의 역할은 다양하다. 바느질한 투명 구 안에 거울을 앞뒤로 두 겹 붙여서 넣어서 투명 구 위에 바느질한 뒷면이 거울에 비춰짐으로서 표면의 이면까지 살펴볼 수도 있다. 개미는 세 개의 타원형으로 지네는 그 이상의 타원형이 연결된 단순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은 복잡하다. 여성은 바느질을 좋아한다는 편견과 다르게, 김경선은 개미나 지네만큼이나 바느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서 바느질은 여성적인 섬세함이나 화려한 장식적 효과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구체적 이미지를 지시하는 앞면도 대략 처리되었지만, 뒷면은 더욱 거칠다. 앞면이 기호라면 뒷면은 기호를 가능하게 하게 하지만 그 자체는 기호가 아닌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기호라면 투명한 기호가 아니라 불투명한 기호일 것이다. 


바느질 된 뒷면의 지저분함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매듭짓지 않고 길게 늘여 놓은 실들이다. 그것은 존재의 대연쇄에서 이탈하여 군데군데 집합되어 있는 구처럼 어떤 단절감을 강조한다. 조화로운 연결망은 끊어져 있다. 미학적 현대는 이 단절감과 부재의식 속에서 출발하였다. 공작용 투명 반구를 붙여서 만든 구에다 마감이 되지 않은 바느질의 결합은 소우주의 자족성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예시한다. 그것은 쉽게 깨질 알 같으며, 그 알에서 나올 것들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한 예상도 빗나가게 할 것이다. 구는 아늑한 존재의 거처라기보다는 변화와 생성을 위한 중간 단계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새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양성을 낳을 것이다. 한 땀 한 땀 해나가는 바느질은 글쓰기나 말하기와 비유된다. 그것들은  텍스트이다. 텍스트는 텍스트들로부터 비롯되며 그 연결 관계는 무한하다. 또한 작가는 ‘本’이라는 제목에서 과거에 북 아트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책이라는 의미도 담는다. 


김경선_()시리즈_,_2015


 

김경선_()시리즈_모기장,_2015

    

이전시대에 세계는 읽혀질 수 있는 책이며, 그것을 쓴 자는 전능한 신이라는 사고방식도 있었듯이, 인간의 의식이나 무의식도 읽기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말하는 존재이며,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정리되고 반듯한 부분보다 거칠고 징그러운 부분이 많이 드러나 있는 작품에서 타자의 몫은 극대화된다. 작가가 투명 반구와 거울 등을 이용해서 강조하고 있는 표면의 이면이란 무의식적인 측면이다. 말하면서 쓰면서 많은 것이 감추어진다. 의식이라는 파수꾼은 억압하고 검열하는 것이다. 승화라는 미명으로 억압과 검열에 순응하는 작가나 작품은 지배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되풀이한다. 사회는 그들을 정체성을 제대로 학습한 ‘개인’으로 인정해 준다. 개인이란 근대 계몽주의자들이 상상한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거시 권력과 미시 권력이 밀집되어 작용하는 전쟁터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전쟁을 동일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개인’이 되지 못하면 타자화 되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산물인 개인은 ‘그렇다’, 또는 ‘그래야 한다’로 끝나는 단조로운 메시지--자기만의 이야기인 듯해도 결국 체계를 재현하기 때문에--를 던져주는 작품, 또는 활동을 한다. 이러한 유순한 예술에 대한 사회의 대답은 예술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과 검열이 완전히 성공하는 법은 없고, 특히 예술에서는 오히려 우대받을 수 있다. 예술은 잘 다듬어진 동질성 보다는 이질성을 애호하기 때문이다. 바늘을 꽂은 자리와 빼낸 자리가 명확한 앞면에서 말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 뒷면은 매듭짓지 못한 말들과 하지 못할 말들이 늘어져 있다. 못다 한 말들은 서로 엉켜 복잡한 덩어리로 남는다. 그것들은 뿌리나 뿌리줄기처럼 표면 아래에 남아서 또 다른 생성을 준비한다. 그것은 의식 이면의 무의식, 현실성 이면의 잠재성을 표현한다. 망, 구, 거울 등 투명한 재료들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불투명한 요소들을 강조한다. 


김경선_()_울산문화예술회관 설치_2015


김경선_()시리즈_투명볼,,모기장_2015



설치는 몇 겹의 모기장으로 되어있고, 투명 반구에도 여러 층이 구별된다. 각 권역들은 차이는 있지만 경계는 없다. 자연에 경계가 없듯이 말이다. 경계란 이성의 산물일 뿐이다. 울산 문화예술회관에 설치된 작품의 경우, 심지에 해당되는 나무 같은 구조물은 겹겹의 층들 속에서도 훤히 보이며, 그 사이를 관객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설치 규모가 커진다 해도 그 관계는 유지된다. 작가는 모기장 뿐 아니라 양파 망, 배추 망, 매실 망 같은 생활 속의 투명 재료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는데, 그 효과는 표면의 이면이 저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통념을 전복한다. 김경선은 재료나 형식을 통하여 이면을 표면만큼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며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이면은 말 그대로 표면 바로 뒤에 있다. 이면이 표면일 수도 있다.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의 면이 출렁거리면서 표면/이면이 되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는 김경선의 설치작품처럼 가변적이다. 이러한 표층적 구조는 주체, 육체, 세계에 대한 모든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출전; 울산북구 예술창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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