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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영 / 현대의 일상적 삶과 예술

이선영

현대의 일상적 삶과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심은영의 작품에서 그림의 바탕 면을 이루는 천은 여느 그림처럼 한 겹이 아니다. 밑바탕은 하나지만, 화면 여기저기에는 덧대어 바느질한 천들이 평평하고 중성적인 바탕을 넘어서 형태화 된다. 중첩된 천들은 바탕/형태라는 이원구조가 아니라, 바탕이자 형태이다. 그 위에 그려지는 이미지나 뿌려지는 물감이 없다면 표면에 굴곡이 있는 부조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평탄하지 않은 삶’이라는 일상적 표현이 있듯이, 평평하지 않은 바탕 면은 생활인이자 작가로서의 조건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예술은 모든 것이 괄호 쳐진 중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의 굴곡과 함께 하는 것이다. 가다가 보면 멈춰야 할 때도 있고 땜질이 필요할 때도 있다. 건너뛰기에는 너무 깊어서 한참을 복구해야 할 때도 있다. 심은영의 작품은 잘 닦인 바탕을 매끄럽게 나아갈 붓으로는 양이 안차서 바늘까지 동원된다. 일반 바늘은 물론, 공업용 바늘부터 그물을 꿰는 도구까지 다양하다. 

 

바탕과 함께 들어 올려 져 이러저러한 주름과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바느질이다. 바느질이라는 방식은 그녀의 작업을 그리기 보다는 ‘짓다’라는 행위와 연관시키게 한다. ‘짓다’는 집을 짓다, 옷을 짓다, 밥을 짓다, 그리고 이야기를 짓다 등에서 활용되는 바와 같은 공통된 어미를 이룬다. 그것은 그림 그리기라는 특별한 활동을 일상과 근접시킨다. 공적영역에서 행해지는 임금노동은 아니지만, 사적영역에서 삶을 재생산하는데 꼭 필요한 전 방위적 노동이 바로 생활이며, 이는 흔히 여성이 담당한다. 물론 지금은 바느질을 여성성과 연결시킬 수 없을 만큼 광적인 소비의 시대다. 너덜너덜한 빈티지 스타일의 청바지를 새로 사 입을지언정 헌 옷을 기워 입지는 않는 시대에, 바느질은 여성이 아니라 특정 직업인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심은영의 작품에서 바느질은 분리된 것들을 이어주는 관계적 행위로 다가온다. 그것은 형식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여성이 담당하곤 하는 사적 영역에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자식과 부모, 남편, 일가친척 등과의 관계망은 봉건적 구속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망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성들이 즐겨보는 연속극은 온통 그러한 인간관계에 집중되곤 한다. 그러한 관계망이 잘 작동돼야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시되기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적 관계망은 고독한 개인의 생존투쟁이라는 오늘날의 경향 속에서 어느 시대보다도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한 관계망은 자명한 출발이 아니라 목표가 되었고,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거품 같은 공간 속에서 열렬히 추구되는 바가 되었다. 여성은 바느질이라는 방법론 뿐 아니라, 생활의 소재들이 다수 등장하는 심은영의 작품은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연스럽고 솔직한 반영이 있다. 반영이란 작품의 최종 결과물까지는 아니어도, 출발은 되어준다. 

 

대개 그 출발을 감추어지지만, 심은영은 그것을 드러낸다. 예술 역시 주체와 마찬가지로 자체 검열과 승화의 과정에 의해 좀 더 그럴듯한 개념으로 포장되곤 한다. 교훈과 배움의 장으로까지 고양된 예술은 겉으로는 현대미술이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고전적 가치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예술조차 위선과 허세의 장이 되고 있다는 심각한 회의가 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깊이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심은영에게 바느질이라는 방법적 요소는 일상과 예술이 교차되는 지점을 알려준다. 바느질은 부조적 바탕, 때로는 드로잉과 같은 선이 되어주며, 붓질 못지않게 이미지와 서사를 추동하는 방식이다. 바느질은 이야기를 담은 형태의 조각을 이어준다. 한국 전래의 조각보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조각 잇기를 시도했다면, 심은영은 현대의 일상을 잇는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생의 중요한 시기에 예술적 경력이 단절되곤 하는 여성 작가에게 가장 시급히 이어져야 할 것은 삶과 예술이다. 

 

궁극적으로는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 예술도 있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 예술과 삶은 균형을 잘 맞추지 않으면 안 될 미묘한 관계가 돼버렸다. 그래서 예술은 일상을 감추고, 일상은 예술을 억압한다. 삶이냐 예술이냐 라는 양단간의 결단이 삶과 예술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순간 이러한 갈림 길에서 갈등한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 삶이 종교를 몰아냈듯이, 현재의 물질 지향적인 삶은 예술에 불리하게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삶에 필요할 뿐 충분하지 않기에, 예술 같은 것이 존재한다. 최대 공약수가 아니라 최소공배수로 작동되는 사회는 예술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 예술은 결국 개인적으로 예술에 절실한 사람들의 몫이며, 그들에 의해 수행되고 지속된다. 이러한 실존적 조건 때문에, 예술이 사회화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지점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은영의 작품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억압되곤 하는 생활의 면면이 드러나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광목에 천으로 바느질하고, 물감이 칠해지거나 뿌려졌다. 용이한 바느질과 이를 통한 자연스러운 구겨짐은 캔버스 천과는 다른 광목의 특징이다. 생활 감각과 어우러지는 누리끼리한 광목천은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광목천으로 만들어진 소박한 에코백이 명품백이 줄 수 없는 어떤 감성과 태도를 보여주듯, 심은영이 활용하는 광목천은 화려함과 세련됨은 없지만, 완벽한 밑칠이 되어 있는 캔버스와는 다른 감성을 발한다. 광목천에 바느질되는 광목 실은 민속전통에서 액땜같은 주술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광목천과 실은 바느질이라는 일상적 도구이자 생활 및 생활의 안녕함을 바라는 소망을 포함한다. 작품은 하나의 바탕천에서 시작되지만 덧대어 바느질된 천은 많게는 5개에 이른다. 여기에 물감을 뿌려 요철 진 표면에 얼룩을 만든다. 얼룩은 작품을 우연적 요소에 개방시킨다. 위로 쌓여 올라가는 천의 층들과 바탕에 스며든 얼룩은 상호작용하면서 화면의 층들을 늘린다. 

 

작품은 바늘로 짓고 물감으로 그리고, 쌓이고 스미는 등의 복합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상하 구별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미지들이 바탕 면에서 붕 떠 있는 듯한 자유로운 구도다. 천에 스며든 얼룩은 깊이의 가상을, 천위에 덧대어 바느질한 천들은 높이의 가상을 만들어낸다. 바느질과 드리핑은 번갈아가며 수행되면서 화면의 깊이를 만든다. 지형지물과 자연물이 표기된 지도 같은 모습이다. 그 안팎에 김치트럭, 버스, 집, 장난감, 오리 등 일상의 소재들이 흩어져 있다. [일상], [일기], [기억 읽기], [독백] 등으로 붙여진 제목들은 중층적 화면에 전제된 시간성을 강조한다. 전시된 작품은 크기만 다를 뿐, 시리즈 작품처럼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관계에 있다. 시리즈라는 방식은 딱히 그릴게 없어서 몸부림치는 작가의 알리바이가 되기도 하지만, 반복과 차이에 근거하는 현대적 일상을 반영한다. 가령 성당이나 낟가리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조건을 화폭에 생생하게 담으려 했던 근대화가 모네에게 차이의 감각을 위해 대상을 한정시키는 선택이 필요했다. 

 

기억과 독백은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되는 것이며, 일상 역시 반복이라는 시간감각에 의거한다. 일상은 유지돼야 하면서도 지겨운 무엇으로 간주된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나른하고도 불안한 일상성은 현대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즉 일상성이란 단순한 일상적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일상성의 장소는 도시이다. 물론 원시나 중세시대에도 삼시세끼 먹고 아이 낳고 기르는 등의 일상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고, 인간 사회는 훨씬 더 많은 규칙이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규칙들이 현대적 일상을 규정한다. 심은영의 작품에서 여러 색과 모양, 기능을 가지는 차들이 등장하는 것은 일상성과 현대성의 교차점을 알려준다. 일상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불가해한 것이기도 하다. 가장 드러나 있으면서도 감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예술의 주제가 될 만하다. 

 

현대미술은 무엇보다도 신화, 종교, 역사, 정치 같은 중차대한 주제로부터 탈피하는 경향이 있다. 소소한 일상이 언제부터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역사조차도 일상성에 주목하여, 아날 학파같은 특정학파가 거시 역사에 치중하는 기성의 학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가령 예술가에게는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보다 민초의 하루살이는 어땠는가가 더 흥미로운 주제일 수 있다. [현대세계의 일상성]은 1900년의 어느 날, 당신은 보잘 것 없는 보통사람들이 그날을 살아간 방식, 즉 그들의 일과 걱정거리, 그들의 노고와 여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 현대예술가들은 일상성의 편린 하나하나를 익명성에서부터 끌어냈다. 저자는 소설 [율리시스]의 예를 든다. 이러한 현대소설은 ‘정형화된 인물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내레이션의 수법, 또는 한 개인의 인격 형성, 한가정의 상승과 몰락, 그리고 한 집단의 운명 등을 그리는 전통적 소설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현대예술은 사소하고 밋밋해 보일만큼 극적인 드라마가 부재하다. 보잘 것 없으면서도 견고한 것인 일상성은 현대성 한가운데에 있다. 

 

일상성과 현대성은 상품과 정보의 소비라는 경제조건을 바탕으로 한다. 심은영의 작품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듯이 자유롭게 떠 있는 대상들은 동시에 상품들이며 기표들이다. 참조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부유하는 기표들은 현대 소비, 정보사회의 조건이며 일상의 특징이다. 그러나 심은영의 작품에서 기표들의 연결망은 자의적으로 변형되었다. 그것들은 시스템에 의해 면밀하게 계획된 상품의 회로를 넘어서 붙어 있을만한 것은 떼어놓고, 떨어져 있을 만한 것을 붙여놓는다. 주름, 접힘, 스밈 등으로 구현된 중층적인 화면은 새로운 연결망을 만든다. 기존의 질서를 재현하지 않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 심은영의 작품은 맥락을 조금씩 변형시킨다. 경계를 넘고 다시 잇기는 드리핑과 바느질을 통해 반복적으로 수행된다. 경계가 터져버려 흘러나온 것 같은 얼룩은 덧대어 연결된 천위에도 선명하다. 상처, 또는 덧난 상처는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 차원을 아우른다. 대개 양자는 연결된다. 물론 경계의 와해는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라는 부정적 측면 뿐 아니라, 기성의 고정된 것들을 변형시키는 잠재적 에너지의 폭발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임계점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는 부족함보다는 과도함 속에서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화면 곳곳을 물들이는 터져 나온 흔적들은 그러한 과도함, 넘쳐 남을 말한다. 얼룩으로 더러워진 누더기까지도 연상되는 화면들은 소외된 일상의 재현이 아닌 변형에 방점이 찍혀있음을 알려준다. 작가는 꽉 짜여 진 일상의 틈을 벌리고, 기계적 반복에 또 다른 리듬을 부여하고, 상품으로서 이미 와있는 코드 위에 덧쓰기를 행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자유롭게 떠도는 공간은 변형이 이루어지기 위한 이행의 공간, 하나의 중심을 거부하는 탈중심화 된 공간이다. 정체성과 의식, 이성 등은 고정된 중심을 요구한다. 특히 몸은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정된 경계를 중시한다. 심은영의 작품에서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경계는 무엇보다도 삶과 예술 사이에서 활성화 되어 있다. 경계가 모호함으로서 중심도 모호해지는 화면은 생활은 물론 예술에 있어서도 보편화된 구조화 된 법칙을 자유로운 놀이의 규칙으로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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