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미술에서 미술로 이어지는 대화
페르난도 보테로 전 (7.11--10. 4,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2전시실)
이선영(미술평론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다소간 낯선 남미 미술을 세계화 한 콜롬비아의 화가이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유명한 작품은 [12세의 모나리자](1959)이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유명하며 지금도 겹겹이 둘러쳐진 박물관적 장치에 의해 먼발치에서나 접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작을 만화같이 귀여운 형태로 변형시켜 대중 앞으로 확 당겨온다. 원작의 친근함이 문화사적 교육과 교양 학습의 무한 반복에 의한 다면, 보테로의 작품에서 친근함은 저 멀리의 성스러운 광휘에 잠겨있는 도상을 일상적 친근함으로 옮겨온 것에 있다. 물론 그의 작품도 이제는 유명해져서 미술사의 반열에 올라 ‘살아있는 거장’으로 칭송되고, 그가 참고했던 작품만큼이나 어떤 분위기(aura)를 가지게 된 점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보테로는 모나리자 뿐 아니라, 미술사적 전거를 가지는 유명 작품들을 참고로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통한 스타일로 각색한다. 페르낭 레제 같은 종합 입체파의 그림처럼 굵직굵직하고 단순화된 인체표현은 조각적이면서도 기념비적이다. 뚱뚱하고 귀여운 이미지들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코드를 통해서 그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사실이다.
발레 바의 무용수 DANCER AT THE BARRE
2001년
캔버스에 유화, 164 x 116cm (사진출전; 예술의 전당)
엽기문화나 코미디 물이 아니면 등장하기 힘든 뚱뚱한 여인들은 보테로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된다. 여성 뿐 아니라 등장하는 무생물까지도 모두 통통하지만, 여성의 표현이 유독 유머러스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가지는 여성에 대한 상과 관련된다. 원시시대의 돌조각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미인은 원래 현재 대중문화의 여주인공들 같이 말라깽이들이 아니었다. 루벤스나 르느와르의 작품 속 풍만한 여인들은 투명한 피부 아래에 약동하는 생명력을 화사한 색채로 표현했다. 현재처럼 마르고 키 큰 여자들이 미인의 기준이 된 것은 시각성이 강조되는 스펙터클의 문화에 힘입은 바 크다. 가장 근원적인 감각인 촉각과 달리, 시각은 시선이 훑어 내릴 수 있는 시원한 비율을 원하는 것이다. 가장 지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시각성은 이데아적 원형을 가지면서도 시대의 미의식에 따라 변화한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과 눈만 남겨놓는 경향이 있는 정보사회에서 시각적 차원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그림 역시 그러한 시각문화의 일부에 속해 있지만, 색채와 촉감이라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
인간이 아직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을 가진 존재인 한, 창백한 안색보다는 통통한 장밋빛 볼살을 가진 여인들이 더 사랑스러운 존재임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기쁨’의 유래를 ‘생의 기쁨’에 놓는 보테로는 명화 속 주인공들의 매력을 유머 감각에 실어서 극대화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발레리나처럼 중력을 거스르는 고도의 반(反) 자연적 자세를 취하는 진지한 인물들이 체격에 비해 무리한 동작을 취하는 코미디처럼 변형된다. 작품 속 영부인과 대통령은 권력의 잔혹함과 화려함은 물론 서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도 다가온다. 과거 초상화의 주인공이었던 까탈스러운 왕족이나 귀족들은 이웃의 수더분한 아줌마나 장난기 넘치는 아이같은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단지 보여지는 존재를 넘어서 관객에게 농담을 걸어올 것 같다. 2009년 서울에서의 첫 전시 이래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보테로 전은 고전의 해석 뿐 아니라, 정물과 라틴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90여점 선보였다.
거리 THE STREET
2000년
캔버스에 유화, 204 x 177cm
정물 STILL LIFE WITH BLUE COFFEE POT
2002년
캔버스에 유화, 122.5 x 102.5cm
그가 고전을 해석한 작품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주변성에 있었다. 보테로는 식민지 체험을 제외한다면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지역의 출생인데다가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작가는 ‘세계의 명화’ 도판을 모델로 하여, 독학으로 거장과의 대화를 이어가면서 화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테로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작가 간, 작품 간의 대화는 예술사의 주요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예술사에서 타자와의 대화는 새로움을 낳는 원동력이었다. 보테로의 전략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새로움의 창출이다. 이전의 것은 알아볼 만한 형태로 남겨지며 그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다. 참조대상이 희미한 흔적 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한 형식으로 남겨짐으로서 차이가 가늠된다. 자신이 올라선 사다리를 걷어참으로서 전무후무한 독창성을 과장하는 이들과 달리, 자신이 통과한 여정을 남겨둔다. 그러한 방식으로 보테로는 예술사에 관통하는 원칙인 대화를 대중과의 소통까지 확대시켰다. 보테로의 주된 대화방식은 패로디이다.
린다 허천은 [패로디 이론]에서 패로디가 인식되고 해석될 수 있으려면 기호 입력자와 해독자 간에 공유된 기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테로에게 미술사는 기호 공유가 일어나는 장이다. 두 개의 텍스트가 교차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상호텍스트적이고 상호주관적이다. 두 텍스트, 또는 두 주체 간의 대화는 두 목소리를 낳는다. 패로디는 두 목소리를 가진(diphonic) 담론인 것이다. 거장이 있고, 그 거장과 성공적인 대화를 통해 또다른 거장이 된 이가 겹쳐 있다. 이중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패로디는 ‘다음(polyphony)과 대화(dialogism)’(바흐친)를 야기한다. 보테로에게도 패로디는 미술과 미술이 교통하는 한 방식이다. [패로디 이론]에 의하면 패로디는 인생보다 예술을 모방하는 자의식적이고 자기비판적인 형식이다. 텍스트의 자기반사(self-reflexivity)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패로디는 창조와 재창조, 창작과 비평이 교차하는 장이다. 보테로의 작품은 작품의 유일한 근원으로서의 작가라는 근대의 낭만주의 신화를 거부하며, 창조주를 닮은 전능한 작가를 상대화하고, 그 대신에 그것과 대화할 관객을 중시한다.
실내 INTERIOR
2004년
캔버스에 유화, 123 x 99cm
보테로는 은밀한 자기참조성이 아니라, 적나라한 참조를 통해 예술을 감싸고 있는 신비주의를 유쾌한 대화적 상상력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통통한 주인공들이 독방에 갇힌 음울한 주체가 아니라, 축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점은 대화가 가지는 개방성을 예시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할 원작들은 보테로에 의해 ‘공인된 위반으로서의 패로디’(린다 허천)로 변형된다. 인류가 공유할만한 훌륭한 예술작품들은 무조건 수용해야할 원형이 아니라, 매번 다시 씌여질 수 있는 개방적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벨라스케스, 루벤스, 반 고흐, 반 아이크 등은 즐겨 호명되는 거장들이다. 유럽의 고전이 세계의 고전이 된 상황 자체가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전제하지만, 근대 이후 중심이 점차 해체되어가는 상황은 남미의 출중한 화가들에게도 세계 문화사의 한 장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가 1970년경 이라는 점은 문화의 중심 이동 및 다중심화라는 탈(post)근대적 상황과 관계된다. 그러나 그가 고전의 해석에만 머물렀다면 그저 재미있는 패로디 작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 획득한 언어로 그는 자신이 속한 현실도 그려냈고, 이는 그의 ‘라틴’ 시리즈에 잘 나타나 있다. 성스러움이 일상화된다면, 일상 역시 성스러움으로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라틴의 일상들은 조각적이고 기념비적인 양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근함이나 탄탄함조차도 환상적이다. 그것은 대중에게 친숙한 캐릭터들이 사실주의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럴듯한 환상이 일관 된다면 그것 역시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나 예술이 현실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원작이 가지는 치밀한 구성에 독특한 형태 변형, 그리고 화려한 색채는 보테로의 작품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는 ‘왜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는가’에 대한, 그가 수도 없이 받았을 질문에 대해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실이 아니라, 그림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현실,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은 비슷해보여도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통통하다 못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인물들과 그들이 세팅된 방식은 환상적이다.
대통령 THE PRESIDENT
1989년
캔버스에 유화, 203 x 165cm
영부인 THE FIRST LADY
1989년
캔버스에 유화, 203 x 165cm
보테로가 구사하는 환상적 장치 중의 하나는 스케일의 변조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정물적 대상은 본래보다 크게 확대되어 있다. 과일이나 꽃같이 자그마한 대상들은 이러한 변형에 의해 관능성과 기념비성을 획득한다. 꽃과 과일, 악기 등이 놓여있는 정물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고전적 소재지만, 지역 산물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국적’ 연출이 가능한 장르이기도 하다. 변형은 그의 작품의 주요 원리인데, 여기에는 규모의 변형도 포함된다. 작품 [피에로 델라 프렌체스카를 따라서](1998)에 나타나듯이, 작가가 흠모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은 원래 47×33cm의 크기였는데, 204×177cm로 확대했다. 원작의 밀도는 확대를 통해 더 강조되고 있다. 당시에 중요한 특정 인물이라는 도상의 의미를 넘어서 초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세부에 대한 후대 화가의 재해석이다. 보테로의 왜곡된 표현 방식은 정치적 권력은 물론 화가의 권력까지 변화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권위 있는 작품이 다시 그려질 수 있듯이, 정치적 권력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밝은 동화같은 현실만 표현하지 않는다. 유럽에 전거를 두는 작품들보다 더 중요한 보테로의 작품 목록은 라틴 아메리카의 뿌리가 드러나는 소재들이다. 그는 밝은 색채로 고향 마을의 집들과 바로크식 성당, 작은 교회, 성직자들, 거리의 사람들과 춤추는 사람들을 담아낸다. 압축된 원근법은 배경과 인물, 사물들을 동화 속 삽화처럼 붙여 놓는다. 투우나 서커스는 유럽의 근대 화가들도 즐겨 그린 소재지만, 남미에서 삶의 일부를 이루는 중요한 문화이다. 어린 시절 투우 학교를 다니기도 했던 보테로에게 투우는 그림과 현실 모두에 걸쳐 있는 소재였다. 마법의 원 안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무대인 서커스 역시 고향 마을 메데인에서의 추억을 되살린다. 그의 작품에서 예술의 역사를 비롯한 기억은 중요하다. 개인적 기억이든 문화적 기억이든,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보테로의 작품은 과거가 현재에도 지속되며, 새로움을 낳는 오래된 미래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출전; 설화수 매거진 7-8월호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