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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희 / 선들 사이의 유토피아

이선영

선들 사이의 유토피아

 

이선영(미술평론가)

 

한대희의 작품 속에는 고래들이 인간을 대신하여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반적으로 고래는 그러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에는 거리감을 가진 동물 같다. 그것은 개나 고양이처럼 인간과 가까이 있는 동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래는 공룡처럼 환상 속에서 친근한 그런 동물도 아니다. 그러나 고래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암각화같은 선사시대 유적지에도 나타나고, ‘고래등같은 집’이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와 같은 전래의 비유나 속담이 있을 만큼 친숙한 면도 있다. 다만 지금은 모든 야생이 그러하듯 수족관이나 해양 관광지, 다큐멘타리 등에서나 자연의 한 샘플처럼 접 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가 처음 고래를 만난 것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잊혀진 것들은 문화와 예술에서 회귀한다. 가수 송창식은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라고 노래했으며, 고래는 아니지만 삭막한 도시에서 생선가게나 털며 사는 삶을 벗어나 자유로운 바다로 떠나겠다는 체리필터의 노래 [낭만 고양이]도 있다. 

 

 

  한대희_nonvocal_장지위에 분채, color pencil_99x55cm_2015

 

 그러한 대중문화 속의 고래나 바다는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원초적 존재를 응집하는 실체로 다가온다. 우리와 유연관계를 가지는 고래는 인간과 같은 포유류이면서도 바다로 되돌아간 존재의 상징이다. 자신이 비롯된 바다로 돌아간 존재는 무조건 자유로워야 할 것이며, 지금 여기 같은 실낙원이 아닌, 복낙원이어야 할 것이다. 고래는 한대희의 작품 속에서도 무한자유를 구가해야할 낭만주의의 상징이다. 고래는 동양화의 여백같은 무한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여백은 하늘이기도 바다이기도 융통성 있는 공간이다. 화면이 크든 작든 여백은 무한하다. 작가는 작은 화면을 벽면에 여러 개 설치하여 작품과 작품 사이에 하얀 벽 또한 그러한 여백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고래와 함께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선들이다. 완전히 자대고 그은 직선은 아니지만, 수직 수평으로 그은 직선은 유기적인 선으로 구성된 고래와 대비 된다. 

 

직선들은 명확한 좌표나 관계를 설정하는 기호들, 분리할 수 없는 실체를 코드화 하는 듯한 추상적 힘, 때로는 고래가 발신하고 수신하는 음파들처럼 보인다. 선은 매우 많은 선들로 복제되며, 유기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도한 질서 감각이나 그러한 과도함이 야기하는 헝클어진 질서를 표현한다. 그물에 걸려 고통받는 물고기처럼, 고래는 선들에 갇혀 있곤 한다. 물론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고래는 선으로 표시되는 어떤 틀에 의해 보호되거나 인간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는 천연 자원으로 간주될 것이다. ‘제한된 유토피아’라는 전시부제처럼, 고래에게 바다는 유토피아에 해당되지만 그 유토피아는 제한적이다. 수족관같이 사각형 유리관 속의 고래 또한 마찬가지다. 정전이나 어항 파손 등,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수족관처럼 제한된 생태계에서는 인간의 힘의 더욱 크게 작동한다. 그러나 바다 또한 만만치 않다. 

 


 한대희_limited utopia:distance 1_pencil on paper_100x70cm_2015

 


 distance 0 detail

 

무분별한 남획이나 대규모 유조선 침몰같은 해양 오염같은 사건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자연의 가장 큰 적대자가 자연에게 가할 수 있는 해악을 보여주곤 한다. 자연재해의 상당수는 자연에게 가한 폭력이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경우다. 요컨대 고래가 불행하면 인간도 불행할 것이다. 한대희의 ‘limited utopia ; 관계의 은유’ 전은 제한된 유토피아에 사는 존재들을 규정짓는 여러 관계들을 다룬다. 선은 그러한 관계망을 직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선은 그림이라는 2차원을 넘어서 실제 공간 속에 구현되기도 한다. 중력의 작용에 의해 위 아래로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설치물은 타자와의 관계가 중력처럼 보편적임을 알려준다.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 속에서, 관계의 성패에 따라 유토피아의 여부가 갈릴 수 있을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타자들은 상호부조적인 공동체를 이루지만, 합리화, 개인주의화 되는 근대에 타자의 위상은 달라진다. 가령 실존주의자들에게 ‘타인은 지옥’(사르트르)으로 간주되었다.

 

정보혁명이 일어난 탈근대 시대에 타자들은 어떨까. 관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그래서 유령 같은 존재는 아닐까. 유령은 실체는 없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다. 한대희는 이 보이지 않는 관계를 낯선 존재인 고래를 끌어 들여 은유 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타자와의 관계도를 나타내는 선들은 대자연의 생태의 그물망 같은 유연성을 가지지 않는다. 직선, 즉 추상적 선들은 고래로 상징되는 자연과 긴밀한 역학관계 속에 있다. 이성은 체계적으로 그러한 추상의 힘을 점차 늘려왔다. 거기에는 앎으로서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원칙이 깔려있다. 앎은 선적이다. 마치 생산력의 발전처럼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알 수 있고, 타인은 아직 모르고 나만 아는 지식은 이익 창출에 활용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이익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선들은 유기체가 속한 우주를 가득 메우며, 자기들끼리 상충작용을 보이기도 하고, 한번 엇나간 선이 오류를 반복하기도 한다. 

 

한대희_untitled_pencil on pape_each 30x21cm_2015

 


 한 대희_관계의 은유 5(cabbage)_장지위에 분채_60x60cm_2015

 

선들 간의 간극은 보는 이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한 단절은 누군가에게는 시급히 메꿔져야할 극복 과제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꽉 짜여진 체계 속의 숨통처럼 다가올 것이다. 어떻게 보이든, 틈과 간극은 변화의 여지로 중요하다. 한대희의 작품에서 온 우주를 촘촘히 메워가는 선들은 산수풍경같은 실루엣을 만들고 고래는 그 안에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고래는 선들 뒤에 숨어 있기도 한다. 고래와 선은 상호작용한다. 선은 고래에게 자유의 한계치를 설정하고, 때때로 선은 고래로 인해 배열을 바꾸기도 한다. 그것은 미시적인 변화이지만 나비효과처럼 증폭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계는 한계의 돌파와 함께 한다. 고래나 여백 뿐 아니라, 선 자체도 한계 돌파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가령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전방의 장대를 넘기 위해 지지대로 사용하는 또 다른 장대를 생각해보자. 질서의 상징인 고전주의도 낭만주의 못지않은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근대 시대에 과학과 고전주의는 어느 때 보다도 가까웠다. 프랙털, 카오스, 카타스트로피 같은 용어가 횡행하는 현대과학은 어느 때보다도 낭만주의에 가깝다. 

 

한대희의 작업이력에서 고래 이전에 고래에 상응하는 존재는 식물이었다. 식물도 자신을 가두는 경계를 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전시 작품 중, 공중에 붕 떠있는 벽돌 벽의 창문 안팎으로 식물과 고래의 모습이 부분으로 보이는 작품은 두 존재의 공통적 생태를 암시한다. 벽돌의 구멍 같은 것을 상징되는 선과 선 사이의 간극은 얼마 되지 않는 자유의 몫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식물은 나무처럼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현대 문명 속에서 작은 틈을 비집고 뻗어가는 뿌리 줄기같은 모습이다. 망망대해의 고래 역시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경계들과 길항작용을 통해 살아가야 한다. 포유류이면서 어류와 같은 생태계에 속한 고래는 경계위의 존재를 상징한다. 수면 위에서의 호흡이 필요한 고래는 종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경계의 안팎을 넘나든다. 고래에게 선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일 뿐 아니라 내재적이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괴물같은 존재는 위험하면서도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경계 위의 존재는 괴물처럼 독특하고 소수이지만, 소수는 곧 다수가 된다. 

 


 한대희_limited utopia : untitled_장지위에 황토,먹_24x32cm_2014

 


 한대희_관계의 은유 2_장지위에 채색_24x32cm_2015

 

바탕색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래들을 화면 가득히 바글바글 그린 작품은 마치 공기처럼 편재하는 소수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2014년 청주미술창작 스튜디오에서 열린 ‘freedom ; limited utopia’ 전에서는 수면 위로 올라갈수록 푸른 기운이 강해지는 고래 떼들을 묘사한 작품도 볼 수 있는데, 심해에서 호흡하기 힘든 고래의 생태를 생각해본다면 탈색(?) 된 고래 떼들은 ‘유토피아’ 보다는 ‘제한’ 쪽에 방점이 찍혀있는 듯하다. 문명은 자연에 널리 퍼져있는 것들을 한곳에 밀집시킨다. 선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선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자신의 규칙에 따라 나누고 구획하곤 한다. 세상의 어떤 미물도 관계망 없이는 생존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 그것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어떤 생물보다도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크 라깡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타자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강조한다. 

 

언어를 비롯해서 타자를 통해서만 지각될 수 있는 것들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기에 관계는 피해갈 수 없다. 태초의 타자는 어머니이다. 태어나면서 아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타자의 소리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는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닌 언어의 세상에 태어난다. 언어는 친족관계처럼 차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차이는 금기처럼 지켜진다. 차이는 욕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충족을 유예한다. 자연, 상상, 상징 사이에는 틈이 있고, 이 틈이 유토피아와의 합일을 방해하지만 동시에 변화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한대희의 작품에서 유기체를 이루는 곡선과 대조되는 직선은 기하학에서 두 점 간의 최단거리로 정의된다. 직선은 단번에 효율성이라는 은유를 획득한다. 그래서 발전과 진보로 상징되는 근대의 직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단 거리라는 사고에 대항하여 긴 우회로, 즉 유목과 미로의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한대희_관계의 은유 3_장지위에 채색_24x32cm_2015

 


 한대희_관계의 은유 4_장지위에 채색_24x32cm_2015

 

바다와 사막--이전에 바다였던 곳이 사막이다--같은 곳이 바로 유목과 미로같은 공간이다. 한대희의 작품 속에서 고래나 풀은 그 사이를 넘나든다. 직선의 문화는 유목이나 미로적 사고를 낭비이자 방황이라고 본다. 그러나 계의 구성원들이 모두 확정된 직선으로만 가려면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경쟁과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 오늘날 계는 한 지역 사회를 넘어 세계, 즉 지구촌으로 확장되고, 자연 역시 미지의 자원으로 간주되어 낱낱이 계의 한 요소로 환원되곤 한다. 다분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면모가 있는 진화의 도표를 생각해보자. 종간의 유연관계를 일목요연하게 도해하는 계통수는 선적 질서로 이루어진다. 한대희의 작품 속 개체들도 보이는/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작가가 선을 그리는 것은 연속성 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히 작은 화면들은 선들을 잘라버린다. 선들은 계층적이지 않고 또 다른 작품 속 뿌리줄기 형식의 식물처럼 수평적이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제한하는 하나의 단선적 질서를 넘어선 또 다른 관계를 생성한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생각처럼, 한대희에게도 생성은 빈 공간에서 일어난다. 빈 공간은 계층의 질서를 반영하는 촘촘한 재현의 선들을 상대화하거나 해체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경계는 오염된다. 마치 고래가 육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예술은 이러한 애매함을 새로움의 원동력으로 삼아왔다. 그것은 동일한 질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직선의 끝에 있는 새로움이 아니라, 다른 질서로서의 새로움, 즉 이질성이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로 출몰하는 고래는 이러한 이질성을 대변한다. 이때 새로움은 반드시 앞쪽에 있지만은 않다. ‘오래된 미래’처럼 뒤에 있을 수도 있다.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가 이상적 사회를 주제로 썼던 자신의 책제목으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의 outopia와 ‘완전한 곳’이란 뜻의 eutopia사이의 모호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썼다. 

 


 한대희_관계의 은유_털실. 낚시줄_가변설치_2015

 


 한대희_limited utopia : 보일듯 보이지않는경계_장지위에 백토, 136x70cm_2014

 

유토피아라는 어원처럼, 현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이상적인 사회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바깥은 안과 상호작용 한다. 동일자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질서가 혼돈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듯이 말이다. 한대희의 작품에서 고래만큼이나 핵심적인 구성요소인 선이나 간극은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정보화와 결합된 세계화 시대는 관계 항을 거부, 또는 축소하고 하나로 환원되는 세계를 그려 가고 있다. 그것은 이상사회가 아니라, 더욱 소수에게 집중된 이익을 낳는 이상적 시장을 위한 폭력적 비전이다. 풍요로운 원초적 자연 뿐 아니라, 선으로 이루어진 반듯반듯한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의 기원도 고대에 있다. 리차드 해리스는 가장 초기의 유토피아를 소개한다. 그것은 B.C 6세기경의 그리이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이태리 남부의 한마을에 세운 ‘Oder’이다. 피타고라스 풍의 숫자가 지배하는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에서 교육은 엄격하게 통제되며 예술이나 개인적 의견의 지나친 피력에 대해서는 엄정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이곳의 삶은 매우 단순하다. 욕망이나 전쟁도 없다. 플라톤의 이상향에서 집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고 자물쇠가 달린 문은 없다. 이러한 비전은 매우 고풍스럽지만, 우리의 일상과 무의식, 그리고 제도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가령 경찰서 앞에 붙은 포스터에는 ‘선, 선, 선...선을 지키면 행복합니다!’라는 문구가 발견된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대해 완전히 통제된 세상, 어떤 불변하는 나라의 이상적인 건설만이 나타남을 본다. 여기에는 잃어버린 자유 대신에 이루어지지 않은 질서만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대희의 작품 속에서 선들은 여러 기하학적 형상을 그린다. 작가에게 그것들이 펼치는 질서는 완전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여러 양상으로 표현되는 선들은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던 제한적 질서에 대해 말한다. 작가가 선과의 관계 속에 얽혀든 유기체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선들이 만들 그자체 불변하며 동일하고 영원한 구조에 대한 대안적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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