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미술을 통해 세계를 듣다
소리공동체(Sound of Community) 전 (9.23--11.15, 아르코미술관 제1,2 전시실)
이선영(미술평론가)
청각적인 것에 연결된 삶
‘소리공동체’ 전은 시각적인 것보다 청각적인 것에 연결되어 있는 삶에 더 집중한다. 미술 전시에서 소리는 대개 공감각(synesthesis), 즉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이 시각으로 번역되는 차원에 집중하곤 한다. 그러나 이 전시는 가장 고차적이고 추상적인 감각으로 간주되는 시각으로 그 ‘아래의’ 감각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시각을 더 원초적인 감각과 만나게 함으로서 시각의 맹목(盲目)성을 수정하려 한다. 인간의 오감은 촉각-맛-냄새-청각-시각 등으로 서열화 되며, 오른쪽으로 갈수록 감각은 자연과 육체로부터 멀어지곤 한다. ‘여러 감각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던 상태’(맥루한)는 분화되고 계층화 된다. 인간 사회 또한 분화와 서열화를 가속화한다. 그러나 감각이든 사회든, 극단적인 분화와 서열화가 야기한 한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한계가 안전한 경계가 아님을 폭로하는 것이 바로 예술에 있어 위반과 역행의 역할이다. 이 작품 저 작품에서 소리가 나오거나 새어나오는 전시장은 ‘눈으로만 보시오’, ‘만지지마시오’라는 침묵의 계율을 위반한다.
이러한 위반은 미술관에서 지켜져야 할 규칙 뿐 아니라, 침묵 속에서 나열된 항목들을 훑어 내려가는 시선, 그리고 항목을 선택하는 손가락만이 분주해진 시각중심주의에 역행한다. 시각중심주의는 주체의 관점으로 대상을 명확하게 읽기를 요구하지만, 소리에 방점이 찍히면 타자의 소리를 듣고 말해야 할 것이 고무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들은 독해와 의미의 이해, 그리고 내면화나 독백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관심과 대화를 유도한다. 지배적 규칙의 위반과 역행을 통해 지금 여기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사회를 되돌아보는 이 전시는 감각의 전환을 통해 문화 비평을 행한다. 소리 공동체 전은 거의 모든 작품에 스피커나 헤드폰이 달려 있어,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이 전시의 주목할 만 한 지점은 전시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소리와 공동체와의 관계다. 어디서부터인가 들려오는 소리들은 타자들의 현존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란 타자들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삶의 울림, 인간의 언어’(1전시실), ‘대지의 리듬’(2전시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다양하다. 소리는 시각과 달리 하나에 초점을 맞출 수 없고, 전체로부터 들려오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일상에서 공인되어 교환되는 말과 글의 소리, 신체와 사물이 공명하는 진동의 음파, 땅과 인간이 함께 엮어내는 화음과 잡음’ 등이 있다. 먼저 자연과의 교감이다. 장민승과 정재일의 작품 [上林]은 함양에 있는 ‘천년의 숲’ 상림의 풍경을 영화 같은 화면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숲 안팎에서 들려오는 (자연의)소리와 (인간의)음악의 조화를 꾀한다. 숲의 다채로운 요소들과 그 속에 푹 파묻혀 연주하는 청소년 관현악단의 모습은 노동과 이성이 이전에 유희와 감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의 작품은 클래식 음악과 자연과의 어울림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 소리와 음악의 조화, 느릿함과 침묵을 전한다. 조혜진의 작품은 보다 가까운 곳에서 소리공동체를 찾는다. 작품 [길음 뉴타운] 연작은 재개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았다. 오래 된 마을이 새로운 개발계획에 따라 위로부터의 변화가 강제될 때, 뭔가 부시는 소리나 재개발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집단의 함성들이 들려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도배된 벽체와 각목들이 서 있는 조혜진의 작품은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아무 소리도 안 난다. 대신 작가는 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목소리들을 무늬로 만들었다. 작가는 소리의 파장을 형태화한 무늬의 벽지를 실제 집과 동일한 비율로 재현한 벽면에 발랐다. 재개발 현장에 관련된 물리적인 음 대신에, 삶의 터 무늬가 구조의 표면들에 응축된다. 작품 [이용 가능한 나무]는 중산층의 장식물로 수입되었으나 이제는 유행이 지나 버려진 열대식물을 각목으로 조각하여 정원을 만들었다. 벽지에 리듬이 있다면, 각목들에는 박자가 있다. 유적지, 또는 폐허를 닮은 구조물은 그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김다움의 작품은 관객들이 서있는 여기의 소리를 의식한다. 작품 [흩어지는 속삭임, 포개지는 눈짓]은 색색의 필름을 층층이 널어놓은 가설무대 같은 공간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소리들이 들린다. 거기에는 대학로라는 주요 문화 공간을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들이 담겨있다.
소리, 타자들의 현존
김다움의 또 다른 작품 [세계는 가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전시장 여기저기에서 치는 박수소리를 녹음하여 재생한다. 그 앞의 영상은 마치 먼지들이 브라운 운동을 하는 모습인데, 소리를 들으며 보면 멀리서 포착한 대규모 공연장 같은 열띤 분위기다. 바로 옆에서 또는 뒤에서 친 듯 실감나는 박수 소리에는 환호 소리가 섞여 있고,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광선에 비춰진 입자들은 축제 속의 군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 [상호간접]에서는 전시장 또는 작품으로 간주된 이미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전시회에 관련된 담론이 자막으로 나온다.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희미하게 토론 또는 대화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음악, 글, 말들이 교차하는 인터페이스는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담론들을 종합한다. 작가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 넣은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은 후 들려오는 소리들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 소리들로 인해 작가는 다음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김준의 <피드백 필드>
김준은 수집된 소리들을 서랍에 넣어 열어서 듣고 볼 수 있는 독특한 장치를 전시장들 뿐 아니라, 2층 아카이브 라운지 등에 설치했다. 인간들이 사는 장소라면 반드시 들릴 소리들을 수집하고 그 장소에 대한 이미지와 설명, 때로는 사물까지 함께 한다. 가령 작품 [가공된 정원]은 도시 근교의 슬럼화 된 공간들을 찍은 사진들을 나무 액자에 담고, 그 아래 공간에는 흙을 담아 그런 곳에서 흔히 발견될 법한 텃밭을 연출했다. 작품 [장소의 발현]은 서랍을 열면 흑백 사진의 장소에서 수집된 소리들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소리가 수집된 장소들은 런던, 베를린, 난지도, 남이섬, 철원 DMZ 남방한계선 접경지대 등 다양하다. 작품 [숨]에서 사각 공간 안에 들어가 직면하는 4개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작품 [템페스트]에 나오는 소리처럼, 김준의 작품 속 소리들은 노이즈에 가깝다. 큐알코드가 탑재된 작품 설명을 봐도 각 작품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차이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정보혁명 이후, 허공은 사라졌다. 모든 공간에는 전자 통신 기기에서 발생하는 신호들로 가득해진 것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공기같이 편재하는 실체를 구체화한다. 그러나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의미가 그만큼 풍부하지는 않다. 의미로 고양될 수 없는 정보가 노이즈인 것이다.
백현주의 작품 [말이 되는 소리]는 화면 앞뒤로 각각 한명씩의 아나운서를 출연시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뉴스와 그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계몽적 메시지를 전한다. 귀에 익은 옛 ‘대한늬우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집단적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대한늬우스는 영화를 볼 때, 오늘날 광고를 보듯이 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했던 국가의 메시지였다. 아나운서가 전하는 좋고 나쁜 소식들은 무엇보다도 얼마 전까지 우리들이 같이 들어왔던 것이다. 백현주의 또 다른 작품 [들은 소리, 하는 말]은 몇안되는 출연자들 간의 얽히고섥히는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주요 줄거리를 이루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에 대한 의견들이, 그런 드라마들을 잘 볼 것 같은 시청자들에 의해 개진된다. 시청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들리는 소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공중파에 대한 의미심장한 피드백을 예술의 장이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준범의 <대피소 리허설>
박준범의 작품 [8개의 언어]는 4개 채널에서 작가가 제시한 매뉴얼에 따라 여러 국적의 참여자들이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위에서 찍은 카메라의 전지전능한 시점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전달한다. 그 시점은 움직이는 사람들과 기구들을 마치 짜맞춰지는 퍼즐처럼 보이게 한다. 러시아어, 몽골어, 인도네시아어 등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8명의 출연자들 사이의 공통 언어는 공동의 상황 속에 놓여 진 몸뿐이다. 공동체가 사라진 현대에, 주어진 과제는 일시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상황 속에 놓여 진 몸은 보편적 언어로 통용될 수 있다. 작품 [대피소 리허설]은 CCTV처럼 크고 작은 화면들의 구획 속에서 일련의 과제를 수행하는 이들을 보여준다. 기존의 건물을 다른 용도로 변형(해체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개미굴을 건설하는 개미떼처럼 일사불란하다. 대피소라는 설정과 공간에 비해 과도한 수용인원이라는 가정은 공동체가 집단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자연, 또는 사회적 위험은 공동체를 만든다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태초에 지구에 흩어져 살던 인간은 사회로는 가족 사회만을, 법으로는 자연법만을, 언어로는 제스처와 몇몇 분절되지 않은 음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루소에 의하면 따뜻한 기후와 기름지고 비옥한 지역은 가장 먼저 사람들이 정착하여 산 곳이며, 이런 곳에서는 국가는 가장 나중에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는 서로 돕지 않고도 쉽게 살 수 있어서 사회를 발생시킬 필요가 더 나중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초의 욕구가 그들을 분산시켰지만, 또 다른 욕구는 그들을 결집시켰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만 그들은 말을 하며 자신들에 관해 말을 하게 된다. 인간사회는 대부분 자연 재난의 작품이다. 자연 재난은 인간을 서로 다가가도록 했다. 루소는 에스키모 인들은 겨울에는 그들의 얼음 동굴 속으로 모여들지만, 여름이 되면 서로 알지 못하는 관계가 된다고 비유하면서, 더 문명화되면 그들은 항상 모여서 살게 된다고 본다. 루소의 가설은 과거에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고, 현재에는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실낙원 풍의 서사를 무색하게 한다.
개인은 위험에 직면해서야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공동체는 문명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다. 공동체는 훈훈한 것이지만 공동체가 필요한 상황은 그 반대인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공동체, 또는 사회에 대한 생각은 프로이트가 사회의 기원에 대해 ‘집단, 역사, 언어의 탄생에 범죄가 자리 잡고 있다’고 성찰한 것과 유사하다. 현대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도 [액체 근대]에서, 현대사회에 만연한 위험에 대한 불안이 공동체에 대한 필요를 낳는다고 말한다. 상위 계층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요구하며, 하위계층은 부의 편중에 의해 나날이 줄어드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집단적 소리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과거에 공동체가 있었다면 자연의 위협과 위험에 대응할 필요로서의 협동이었으며, 생산력의 진보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현재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적인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협동은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인간이 자연의 정점에 서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 또한 위험해진다. 사적인 이익을 중시하며 무한경쟁을 추동하며, 그 경쟁이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된 현실이 바로 위험한 사회인 것이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란 개념이 성립되고 중시됐던 시기는 근대라는 짧은 물마루에 불과했다. 근대예술은 근대적 개인의 신화에 근거한다. 고립된 주체의 관점이 중시되는 시각중심주의의 시대는 분화된 감각 중 시각만을 물신화하는 편파적 예술을 낳았다. 청각을 비롯한 다양한 감각을 차례로 배제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들은 타자화 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어떤 이들에게 우주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적으로 파악된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회전하는 별무리에 대한 이미지는 삶의 이미지가 아니라고 본다. 사람들이 우주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주는 하모니, 즉 함께 소리 내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음이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生)에 속한다고 강조한다.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그들이 처한 물리적 세계에 음을 첨가한다는 것이다. 귀에 들려오는 음성 신호들은 우리에게 우리와 닮은 존재가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소리들로 가득하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세계의 소리를 듣고자 했을 때, 그것은 곧 인간의 삶에 주목하는 것을 말한다. 소리에는 공동체가 공동체에는 소리가 내재해 있다. 귀를 틀어막은 고독한 개인만이 가혹한 경쟁사회를 응시하는 현대에 공동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전시는 소리와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구체화한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거시적 차원이 아닌 개체발생의 과정을 봐도, 인간이 사회 속 인간이 되기 위해 언어를 배울 때, 그 시작은 타자(대개는 어머니)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현대미술에서의 절박한 소통의 필요성 때문이다.
출전; 웹진 아르코 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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