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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전 / 사랑과 예술, 그리고 혁명

이선영

사랑과 예술, 그리고 혁명

‘프리다 칼로-절망에서 피어난 천재화가’ 전 (6.6--9.4, 소마 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라는 프리다 칼로의 말처럼, 사랑과 예술, 그리고 혁명이라는 단어는 프리다 칼로와 관련된 역사적, 비평적 담론에 곧잘 딸려오는 화려한 단어들이다. 평범한 삶에 극적인 불연속의 지점들을 알려주는 세 단어는 예술가의 진정성을 결정짓는 요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에게 (정치적)혁명가의 길은 희망사항이었고, 바람둥이 연인과의 사랑의 길은 험난했으며, 나머지 하나인 예술만이 그러한 희망과 욕망의 흔적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었다. 다친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부스러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치명적 사고의 흔적 또한 선명하다. 물리적, 또는 정신적 차원에서 작가의 영혼과 몸을 뒤흔들었던 큰 사건들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자기 반영적인 작품을 낳았다. 생전에 남긴 200여개의 작품 중 약 1/4이 자화상으로, 작품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서사를 동반한 자전적 요소는 형식주의를 높이 평가하는 주류 미술사에서는 억압된 요소였다. 

 

자화상들에게서 보이는 자의식 강한 굳건한 모습은 소소한 독백이나 자기연민, 자기탐닉, 자기과시 등을 낳는 자기애적 단계를 넘어서, 해체 직전의 자신을 추스르려는 절박한 열망이 담겨있다. 프리다 칼로에게 예술은 단지 예술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치유하려는 마법 같은 것이었다. 작품 속에는 늘 자신이 중심에 앉아있긴 했지만, 멕시코의 민중적 전통이나 진보적 문화운동과의 접속을 통해 자아를 넘어서 타자와 대화하려 했다. 개인적으로 프리다 칼로의 가장 강력한 타자는 디에고 리베라였다. 나타샤 겔만 부부의 컬렉션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미국, 이태리, 프랑스 등지에서 순회 전을 거쳐 한국에 프리다 칼로를 처음 소개한다. 프리다 칼로 뿐 아니라, 그녀와 뗄 수 없는 파트너 디에로 리베라의 작품들, 그리고 다른 멕시코 작가들이 사진, 영상, 패션 등 풍부한 자료와 더불어 전시된다. 1941년 결혼해서 멕시코에 정착한 러시아 태생의 자크 겔만과  체코슬로바이아 태생의 나타샤는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에게 초상화 의뢰를 시작으로, 멕시코 미술의 주요한 수집가가 되었다. 

 


겔만 컬렉션



Frida_Kahlo_-_Portrait_of_Natasha_Gelman


이 전시에서도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는 물론, 다른 멕시코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샤의 초상들이 다수 발견되어 컬렉터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실비아 나바레뜨는 [겔만 컬렉션 속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에서, 나타샤는 의도치 않게 프리다 칼로가 세계적 명성을 얻는데 최대 공헌자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프리다 칼로 신드롬은 큐레이터 빌레터가 1987년 프랑크푸르트 쉬른의 멕시코 미술전을 위해 나타샤에게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몇 점 빌려간 것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는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을 넘어서려는 문화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로, 제3세계 여성 작가였던 프리다 칼로는 돌아온 타자의 전형으로 간주될 법했다. 물론 1939년에 프리다 칼로의 초상화 한 점이 루브르에 컬렉션 되기도 할 만큼 인정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1907년 태생의 프리다 칼로는 방과 후에 독일계 아버지의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을 돕고 판화공방의 견습생이 되는 등 미술과 관련된 소소한 이력은 있었지만, 멕시코의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화가가 아닌 의대 지망생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살벌한 각종 의료기기나 보철기구, 그리고 적나라한 해부학적 형상은 1925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평생 치료를 해야 했던 자전적 기록에만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병원생활 당시에 어머니가 마련해준 이젤과 거울은 작품의 주축이 된 자화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후안 구스만이 찍은 사진 [병원 침대에 누워 거울을 들고 있는 프리다 칼로](1950년경)를 보면,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는 습관은 길지 않은 생애 후반기까지도 지속된 듯하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자료 사진은 [병원침대에 누워 장식된 해골을 들고 있는 프리다 칼로](1950년경)인데, 병원 침대에서 조차 평소의 화려한 머리장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가 거울을 들었던 손에는 죽음의 상징이 들려 있다. 거울은 절단된 신체를 가상적으로 통합해주는 심리적 물건이라는 점에서, 거울과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간의 내재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녀에게 예술에 있어서 치유적 속성은 그 출발부터 선명했다. 

  


David Alfaro Siqueiros - Portrait of Natasha Gelman


Rufino Tamayo - Portrait of Natasha Gelman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미술에 관련된 정규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기록과 탐구적 면모를 가진다. 거울 속의 자아는 사실만큼이나 환상이 깃들어져 있다. 작품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1949)은 이 전시의 백미로, 환상적인 요소가 극대화 되어있다. 붉은 색 민속 의상을 입은 어머니 여신 같은 자화상은 눈이 하나 더 있는 그녀의 사랑을 아기처럼 무릎에 앉혀 놓는다. 화면의 반씩을 차지하는 밤/낮의 우주적 도상 속 해와 달, 동물과 식물이 그 둘을 감싸고 있다. 대지의 여신과 프리다 칼로의 가슴으로부터의 젖과 피는 벌어진 상처로부터 흘러나오는 여성적 체액을 보여준다. 안고 있기에는 다소간 버거운 몸집의 아이는 한 손에는 시바의 불꽃이 들려있고, 이마에는 파괴 신 시바의 제3의 눈이 달려있다. 신화적 요소가 있는 환상적 작품은 자신이 깊이 사랑했으나 자신을 파괴하기도 했던 남자 디에고 리베라와의 애증에 찬 관계가 잘 드러나는 사실적 작품이기도 하다. 

 


부서진 자신을 곧추세우는 자화상들


 

Frida_Kahlo_-_Self-Portrait_with_Monkeys


작품 [목걸이를 한 자화상](1933)은 장식이 많은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심플하지만, 사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진한 일자 눈썹에 남성처럼 강조된 콧수염은 단지 한 남성에만 의지하면서 울고 웃는 연약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사랑하는 양성적 기질을 보여준다. 칼로는 1941년 미술학교 라 에스메랄다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작품 [붉은 무늬의 금빛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41)은 머리카락을 학사모 모양으로 땋고 머리 위에 이름도 큼직하게 새겨 넣었다. 자존감 있는 표정과 자세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작품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1943)을 보면, 프리다 칼로의 추종자 내지 학생들을 상징하는 네 마리 원숭이들은 학사모 모양의 머리 스타일을 풍자하는 듯이 보인다. 작품 [땋은 머리의 자화상](1941)에서 털실과 함께 땋은 머리 장식은 머리 올이 군데군데 빠져나오는 등, 뒤숭숭한 모습이다. 리베라와의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는 상처 입은 자아는 포도나무 잎사귀가 가리고 있는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현 상황을 여러 도상들이 동원된 알레고리적 그림은 기표와 기의 간의 멀찍한 거리 때문에 수수께끼로 다가오고, 그래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초현실주의라는 맥락으로 자주 소개되곤 했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임을  강조하였다. 작품 [드러난 삶의 풍경 앞에서 겁에 질린 신부](1943)는 정물화에 내재된 메멘토 모리라는 전통적 주제를 남미의 과일을 통해 표현했다. 위를 향해 날카롭게 잘려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 붉은 과육 뒤로 겁에 질린 신부 인형,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는 베짱이와 올빼미 등은 죽음만큼이나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사고로 불완전해진 몸은 어머니가 되고 싶은 희망사항을 매번 좌절 시켰다. 세 번이나 닥친 유산에 관련된 피폐해진 몸은 작품 자주 등장한다. 작품 [유산](1932)과 [프리다와 유산](1932)에서 세포분열을 통해 태아가 성장하는 그림과 그것이 프리다 칼로의 뱃속에서 핏물이 되어 떨어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하늘과 별이 칼로와 함께 울며 눈물은 핏방울과 함께 흐른다. 

 

Frida_Kahlo_Self-Portrait_with_Braid



Frida_Kahlo_Self-portrait_with_Necklace


그러나 그 와중에도 왼팔에는 화구가 들려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지만 작가에게 그림은 아이를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드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목에 걸려있는 민속 장신구의 둥근 형태들은 세포로부터 천체에 이르는 차원에서도 반복된다. 인간은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신성한 연쇄 고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 연결망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비극적이다. 비극적인 장면에 충격을 더하는 것은 해부학적 형태들과 사방에서 넘쳐나는 체액들이다. 유산은 출산에 버금가는 충격을 모체에 안겨주며, 주체도 객체도 아닌 과도적 단계(abject)에 직면하게 한다. 이 전시에서 또 하나의 해부학적 장면은 작품 [발색단과 조색단](앞면, 뒷면)(1944)이다. 여성은 섬세한 신경계로 표현되어 있고 남성은 소화계로만 표현되어 있는 점이 재미있다. 해부학 책자의 도표를 꼴라주한 작품에서 여성은 한쪽 발이 잘려있다. 교통사고로 으깨진 발은 나중에 오른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전시에는 많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통을 의료기기나 보철기구와 함께 충격적으로 보여 주곤 했다. 민속의상과 장식을 걸친 자그마한 몸집의 혼혈 여인과 금속성 기구의 낯선 조합들은 그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는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그러나 기형을 보정하는 기이한 장치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상처와 실증적으로 연관된다. 전시의 스케치나 꼴라주 작품은 의학이라는 중성적 자료를 활용할 때조차 자신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를 접어 넣는 감각을 보여준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전시에서도 다양한 자료와 함께 제시된다. 후안 구스만의 사진 [무제-미술궁전에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전쟁의 악몽, 평화의 꿈’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프리다 칼로](1952)를 보면,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화면 아래쪽에 등장한다. 작자 미상의 사진 [디트로이트의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1933년경)를 보면 프리다 칼로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디에고 리베라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Frida Kahlo - Self-portrait as Tehuana or Diego in my mind, 1943



Frida_Kahlo_-_The_Love_Embrace_of_the_Universe,_the_Earth_(Mexico),_Diego,_Me_and_Senor_Xolotl


그들은 시대의 격동기에 화가로서의 길을 함께 간 동료였던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이혼 후에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한다는 조건으로 그와 재결합한 것은 연인 및 부부로서는 끝났지만 동료로서의 관계는 지속됨을 알려준다. 프리다 칼로가 다니던 학교에서 프레스코 벽화 [창조]를 제작중인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난 때가 15세였다. 1929년, 22세에 21살 연상의 리베라와의 결혼은 프리다 칼로가 진보적 예술가들과 혁명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 전에 이미 두 번 결혼했던 디에고 리베라는 거의 아버지 또래의 남자였고 아버지 같은 역할도 했지만, 작품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1949)에 나타나듯이, ‘칼로 역시 그에게 어머니 역할’(헤이든 헤레라)을 했다. 미술을 독학한 어린 여성작가의 선배였다고 할 수 있는 이 유명 남성 작가와의 고단한 사랑은 연인으로서 막장까지 간 상황에서도 쉽게 끊어질 수 없었던 예술적, 정치적 매개 고리가 있었다. 


작품 [내 마음 속의 디에고](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1943)에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칼로의 이마에 선명한 초상은 디에고 리베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한다.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이다’라고 말했던 프리다 칼로는 결혼 후 디에고 리베라의 취향인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어왔고, 곧 프리다 칼로를 알아 볼 수 있는 대표적 특징이 되었다. 그녀가 그와의 사랑이 달콤할 때 보다 씁쓸했을 때 더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예술이 비롯되며 필요한 진정한 자리를 알려준다. 프리다 칼로의 정치적 행보는 작품보다는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한 자료 사진으로 더 많이 확인 된다. 플로렌스 아르퀸이 찍은 사진 [무제-낫과 망치가 그려진 석고 붕대를 두른 프리다 칼로](1950년경)에서는 겉옷을 위로 올리고 드러난 석고 붕대위에 소련기가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 미상의 사진 [시위에 참가한 프리다와 디에고](1940년대)에서는 그가 구호를 외치며 팔을 들고, 옆의 그녀도 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교통사고 이후 평생 아팠던 프리다 칼로지만, 결정적 사인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과테말라 좌파 대통령의 지지 집회 참여 때문이다. 무리하게 참여한 이 행사에서 얻은 폐렴으로 열흘 후 46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은 진보적 정치운동이 그녀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Diego__Rivera_-_Portrait_of_Natasha_Gelman


이러한 정치적 지향에 있어 디에고 리베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 지향성이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았다. 전시된 작품 중 정치에 관련된 것은 [자유의 여신상](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1945년경), [자유](1946), [무제-원자폭탄](1951년경) 등 인데, 스케치 형태로만 있지 완성된 작품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작가 자신에게 큰 필연성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해 몰입의 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출생연도(1907)를 멕시코 혁명--16세기 스페인에 정복된 뒤 수 백 년 간 이어진 식민착취에 반발한 독립운동이 1810년에 있었고, 1910년 독립운동 100주년은 맞았을 때 부정선거를 시발점으로 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농민 주체의 사회혁명을 말함--이 일어난 1910년이라 기입하기도 했고, ‘내 그림이 무언가에 소용이 닿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지금까지는 당에 유용하게 쓰일 그런 것과는 다른 극히 개인적인 감정만을 표현해왔다. 이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삶을 지속할 유일한 이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정치에 관련된 작품들은 자신의 초상이 가지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비한다면 미약하다.

 


멕시코 혁명과 벽화운동


 

Diego__Rivera_-_Landscape_with_Cacti


프리다 칼로가 수없이 겪은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디에고 리베라와 지속적인 동반자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에 대한 스스로의 결핍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비아 나바레뜨는 [겔만 컬렉션 속의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에서, 디에고 리베라는 1920년대 민족주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벽화가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멕시코와 미국의 공공건물과 기업 건물의 벽에도 작업했으며 타고난 활동가적 기질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혁명 이후 정치 사회 운동에 전념한 화가들의 조직과 대화기구를 건설하는 과정에 적극 나섰다고 서술한다. 미술사가 조은정은 전시 서문에서 멕시코 벽화미술의 배경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의 정부가 사회주의적인 방식인 공동작업과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의식을 소유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근대기 국가 만들기가 그러했듯이, 멕시코 또한 민족을 내세워 통합을 꾀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멕시코 벽화운동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까지도 문맹률이 높았던 탓에 벽화는 국가의 이념을 민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국정 교과서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진보적 정부의 대대적 지원을 받는 공식 문화로, 이를 통해 백점이 넘는 대형 벽화가 탄생했고, 1930년대 들어서는 벽화 작가들이 미국까지도 진출하여 농민혁명 뿐 아니라 산업자본주의를 소재로 작업하였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에고 리베라로 대변되는 벽화운동이 시대의 부침에 따라 역사로만 남아 있고, 개인의 실존에 보다 투철하고 투명하게 반응했던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지금도 생생한 울림을 주고 있음이 이 전시에서도 확인된다. 이 전시에서는 당시의 진보적 벽화가들 사이에서 부르주아 미술이라고 지탄받기도 했던 캔버스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선인장이 있는 풍경](1931)은 여성처럼 가슴이 볼록한 선인장에 추파를 던지는 듯한 두 선인장을 포함한 사막 풍경인데, 그들 부부 사이에 끝없이 끼어들었던 남녀들로부터 비롯된 삼각관계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역사와 민중을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그려왔던 그도 작은 캔버스 작품으로 작업할 때는 프리다 칼로 작품 못지않은 초현실주의 풍의 알레고리가 담겨있음을 알려준다. 

 

Diego__Rivera_-_Last_Hour



Gunther Gerzso - Figure in Red and Blue


일간신문과 책, 꽃병, 악기 등이 등장하는 큐비즘 스타일의 작품 [마지막 시간](1915)은 파리에서 브라크, 그리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과 함께 어울리며 지냈던 디에고 리베라의 이력을 반영한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미 프리다 칼로가 태어났던 해인 1907년부터 유럽에서 모더니즘을 동시대적으로 흡수했고, 그것은 이후의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더니즘부터 사회적 리얼리즘까지 지치지 않는 그의 편력을 복잡한 여자관계들로까지 비약한다면 너무 냉소적인가. 실비아 나바레뜨에 의하면 파리 유학시절의 작품 [마지막 시간]은 1914-17년까지 행했던 형식적 실험을 보여 주며, 이 실험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미술과 건축과의 통합이이라는 비전이다. 그러한 비전은 1921년 멕시코에서 귀국해 제작한 프레스코 벽화의 뛰어난 구성능력으로 전환된다고 본다. 전시는 작품 뿐 아니라, 풍부한 자료들을 통해 프리다 칼로의 위치를 맥락화 한다. 한때 프리다 칼로의 연인이기도 했던 니콜라스 머레이의 사진들은 섬세한 얼굴선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담한 혼혈 미인인 프리다 칼로의 매력을 잘 살려준다. 


Maria Izquierdo - Alive Still Life



Frida_Kahlo_-_The_bride_who_becomes_frightened_when_she_sees_life_opened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프리다 칼로 

 

니콜라스 머레이의 작품 [파란색 새틴 블라우스 차림의 프리다](1939)에서, 프리다 칼로는 붉은 머리띠에 푸른 옷, 금색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정면을 응시한다. 옛날 패션이지만, 지금 봐도 전혀 구닥다리로 보이지 않는다. [하얀 벤치에 앉은 프리다](1938)는 꽃무늬 벽지에 꽃무늬 의자. 꽃무늬 옷에 머리에 꽃 장식까지, 완벽한 꽃 코스프레다. 이러한 모습은 당사자의 비극이나 예술성과 무관하게, 재미나 엽기를 추구하는 현대의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에도 어필 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래서인지 프리다 칼로에 대한 영화계나 패션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전시장의 한켠을 차지하는 칼로의 의상들이 이채롭다. 타래머리 위에 여러 장식을 꽂는 것이나 긴 치마에 수놓아진 무늬 같은 것은 우리의 전통도 떠오르게 한다. 전시장의 한 일본 작가는 프리다처럼 분장하고 ‘디에고를 사랑한다/증오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기이한 영상작품을 보여주기도 했고, 이 전시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엽기 코드로 유명한 한 화장품 가게에서 일자 눈썹을 한 프리다 칼로의 얼굴을 이용한 마케팅을 발견하고 프리다 칼로라는 아이콘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됨을 느꼈다. 

  

큐레이터 박윤정은 심플한 블라우스와 단정한 치마를 즐겨 입었던 프리다 칼로가 결혼 후 전략적으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전통의상을 입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패션은 땋아 올린 머리와 화려한 꽃 장식, 그리고 멕시코 전통의상과 큼직한 목걸이로 각인되어 있다. 박윤정은 땅에 끌릴 정도의 긴 치마에 하얀 레이스 망토로 얼굴을 둘러싸 꽃처럼 보이게 만든 테우아나 여인의 전통 의상을 지적하면서, 협곡마을에서 큰 소리로 흥정을 하며 행상을 하고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던 테우아나 여인들이 지닌 파워풀한 여성성은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에 지친 그녀가 본능적으로 꿈꿨던 세계였다고 해석한다. 전시장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를 제외한 10여명의 멕시코 화가들에게 할애되어 있다. 그 중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벽화운동의 주도자였으며, 1950년에는 디에고 리베라, 오로스코, 타마요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멕시코 대표로도 참가했던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시케이로스가 그린 시케이로스](1930)가 특징적이다. 

 

Nickolas Muray - Frida with Olmec Figurine_ Coyoacan


디에고 리베라보다 정치적으로 더 급진적이었던 시케이로스는 이 캔버스 그림에서 지치고 우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루피노 타마요를 비롯하여 많은 멕시코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양식은 모더니즘과 멕시코 민속 장식의 요소와의 조화로운 만남을 예시한다. 이 전시를 가능하게 했던 멕시코 미술의 유력한 컬렉터의 초상이 다수 발견되는데, 같은 대상을 다른 작가가 표현함으로서 각각의 개성을 더 가늠할 수 있었다. 초상화라는 장르를 부르주아적이라 여겼던 시케이로스도 나타샤 겔만의 초상을 남겼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하얀 꽃에 둘러싸인 나타샤는 매우 관능적이다. 프리다 칼로가 그린 현대적 의상의 나타샤는 자기 초상만큼이나 도도하다. 루피노 타마요가 그린 나타샤 겔만의 초상은 세부묘사가 거의 없는 추상적 방식이지만, 그녀와 닮았다. 가장 최근에 그려진 라파엘 시돈차의 작품 [나타샤 겔만의 초상](1996)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완연한 초상 뒤에는 칼로의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걸려있다.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나타샤 겔만의 초상화는 그녀의 부와 아름다움 뿐 아니라, 컬렉터로서 예술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까지 알려주고 있다. 

(사진 출전; 베르겔 재단, 소마미술관, 조선일보사)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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