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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희 전 / 그림이 아니고서는 잡을 수 없는...

이선영

그림이 아니고서는 잡을 수 없는... 

도윤희 전 (2015. 6.12~7.12, 갤러리 현대)

  

이선영(미술평론가)

  

같은 전시장에서 4년 만에 열린 도윤희의 개인전 ‘Night Blossom’은 우주 또는 미지의 자연으로부터 발신되는 ‘Unknown Signal’(2011년, 갤러리 현대)을 수신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 이전의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연필로 그려졌던 모노톤의 흐릿한 신호들은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먼 곳보다 더 먼 곳은 총천연색이다. 시야를 넘어선 영역에서 실재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시야를 넘어서 있다고 해서 비현실은 아니다. 그림이 단지 환상과 상상에 머문다면, 그것은 결코 평생의 업으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 권태로운 현실과 장단 맞추는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윤희를 포함한 어떤 부류들에게 그림은 실재다. 물론 피상적인 현실을 순간적으로 고정시켜 놓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땅과 바다, 무의식과 육체와도 같은 실재다. 실재는 두텁고 깊지만 고정되지 않고 과정 중에 있다. 


 

도윤희,무제,2013,캔버스에 유채,160x135cm,YHT_NB_1306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160x135cm,YHT_NB_1412



도윤희,무제,2013,캔버스에 유채,160x135cm,YHT_NB_1307


이번 전시의 그림들에서 최초의 중심, 또는 덩어리는 여전히 가려져 있지만 그 원초적인 시공간에서는 색과 형이 탄생한다. 그것도 연이어, 또는 다양한 국면으로 탄생한다. 한 그림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색-형태는 다른 작품에서 화면의 전면을 차지하며, 그 역의 관계도 성립된다. 탄생은 또한 소멸이기도 하다. 이전의 잔해가 뭉쳐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생겨난 것은 다시 잔해로 돌아간다. 가로가 긴 이전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선 모두 서있는데, 그것은 관조를 넘어서 현재 진행형의 과정에 몰입하는 양상이다. 수평에 비해 수직적 구도는 좀 더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도윤희는 미술사가이자 독립기획자 이은주와의 대담에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관조적인 작업을 할 때에는 가로 캔버스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뭔가 추구한다거나 미지의 길을 찾는다거나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세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땅과 바다, 무의식과 육체와도 같은 실재 

  

벌떡 일어나있는 것 같은 새로운 작품들은 침전이 아니라, 한껏 들떠있는 분위기이다. 이전 작업이 오랜 세월 층층이 쟁여진 식물의 화석 이미지라면, 이번 작업은 발생하는 만발하는 단계를 다룬다. 어느 순간 폭발이 일어났고, 화산재처럼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밀도 높은 입자들의 무작위적인 운동은 그동안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꽤 됨을 알려준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그린 새로운 작품 20여점은 생성의 무한한 계열로 펼쳐져 있다. 마치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을 그린 듯 장면들은 폭발하지만, 요란스런 폭죽이나 폭격 같은 실제의 폭발에서와 같은 굉음은 없다. 본래 그림은 소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폭발적 이미지는 꽃의 피어남을 말하기 때문이다. 개화(開花)가 연속성을 단절하는 폭발이되, 그것이 재난이나 파괴가 아닌 점은 문화 및 예술의 본질을 말해준다. 1985년 첫 개인전 이래, 꾸준히 이어온 30년 화업 중 이 전시에서 보여준 변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만개한 꽃들의 소리 없는 폭발을 목도할 때와 같은 잔잔한 경이로움을 준다.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250x195cm,YHT_NB_1401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250x195cm,YHT_NB_1402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250x185cm,YHT_NB_1404


그러나 ‘Night Blossom’이라는 부제가 붙었다고 해서 밤에 피는 꽃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꽃이라는 지시대상으로 한정한다면 다소간 기기묘묘하게 그려진 꽃무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꽃’이 들어가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꽃구름 같다고나 해야 할까. 만발한 꽃들은 구름처럼 모서리도 경계도 없다. 꽃-구름-그림은 하나의 형태나 색채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변신을 위한 잠재성으로 충만할 뿐이다.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려진 그림들에서 재현을 가능케 하는 거리감은 사라진다. 대상만큼이나 그와 마주하는 주체도 녹아버린다. 2008년 몽인 아트센터에서의 전시 ‘눈이 없는 시선’전에서는 그림을 그릴 뿐 아니라, 생각하고 쓰는 주체를 위한 나무 책상이 전시장 한켠에 따로 놓여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모든 단단한 토대는 사라지고 지속적인 생성, 또는 소멸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나타난다. 생성과 소멸은 재현될 수 없으며 사건의 흔적으로 남겨질 뿐이다. 화가는 그림이 아니고서는 잡을 수 없는 무엇을 잡으려 한다. 

  

그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잡힐 듯 하면서도 저만큼 빠져나가 있는 실재를 붙잡아 두려는 행위의 흔적들이다. 거기에는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생명처럼, 그림이라는 끈을 놓지 않은 화가의 궤적이 남아있다. 충만감은 일순간이고 또 다른 결핍에 의해 추동되는 영원한 과정은 그림이 삶과 똑같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소유에 연연하는 삶에서의 욕망과 달리, 향유되는 예술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지만 허무하지 않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차분하게 연필로 상념을 써내려간 듯한 이전 작품에 비해, 색과 촉각성이라는 회화의 원초적 속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여러 겹의 시공간이 응축되어 있는 방식은 여전하다. 이번 작품은 진공 밀봉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이전의 작업에 비해 공기와 공간이 느껴진다. 그러나 밀도 높은 무엇의 폭발 또는 붕괴가 야기한 먼지 구름 같은 입자들은 시선이 관통할 수 있는 공간감을 은폐한다. 거기에는 깊이를 가늠해보기 위해 단단한 것으로 푹 찔러봤을 때 쉽게 가닿지 않을 만큼의 깊이감이 있다. 

 


잠금 해제된 공간 속의 시간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200x160cm,YHT_NB_1407


도윤희,무제,2014,캔버스에 유채,227x182cm,YHT_NB_1405


도윤희,무제,2015,캔버스에 유채,220x170cm,YHT_NB_1503

보는 이를 향해 한껏 부풀어 올라있지만 뒤돌아서면 연기처럼 푹 꺼져 버릴 듯한 형상들은 설렘과 우울, 매혹과 불안, 아름다움과 애매함이 표면의 이면처럼 낮과 밤처럼 함께 함을 알려준다. 수많은 투명 창에 가려져 있던 또는 가둬져 있던, 잠금 해제된 공간 속에서 운동은 활발하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가설처럼, 허공은 원자들의 운동을 가능케 하고 이는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꽃보다는 먼지와 같은 미세한 입지와 그것들이 엉겨있는 구름 같은 형태, 그리고 그것이 칠흑 같은 밤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주적 광경, 또는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 실험 용기에서 배양되고 있는 세균이나 어둡고 습기 많은 곳에서 피어나는 곰팜이, 오래된 물건을 옮겼을 때 바닥에 눌어붙은 자국들, 비누 거품, 사막의 모래폭풍, 거대한 붕괴도 연상된다. 무엇보다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상을 떠올린다. 도윤희의 작품은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까지, 자연에서 마음까지, 무의식에서 현실까지 여러 계를 아우르며 순간순간 자리를 바꾸며 연동된다. 

 

‘Night Blossom’전은 2004년 이후 억압되었던 색의 복귀는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배경에서 펼쳐진다. 밤을 밝히는 또 다른 빛은 미술사에도 적지 않은 예가 발견된다. 소설가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 삶]에서 그러한 ‘어둠의 화가들’의 예를 든다. 그는 ‘조르주 드 라투르와 르 카라바지오에게 있어서는 밤이 장미빛 광택으로 물들어있고, 엘 그레코에게 있어서는 초록빛 광택으로, 렘브란트에게는 갈색 광택으로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 ‘어둠의 화가들’을 찬미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문명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는 빛의 증가현상’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의 기대처럼 보다 많은 빛이 보다 많은 풍요로움을 가져왔는가. 24시간 돌아가는 현대 사회는 현실 자체를 가능케 하는 밤과 잠과 꿈의 세계를 위축시키고 말소해 간다. 빛을 받아 성장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움이 트고 난 이후의 일이다. 도윤희의 작품에서 색은 모든 것을 삼키지만 어두워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를 위해 소환된다. 무언가를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발산하는 색/빛은 사라짐을 통해 나타나는 세계를 비추기 위해 피어있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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