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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실비 전 / 공전하는 사이비의 세계

이선영

공전하는 사이비의 세계

김실비 전 (2015. 6. 26--7. 26, 인사미술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2005년 이래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작업해온 김실비의 개인전 ‘엇갈린 신(들) / Misread Gods’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이미지가 떠도는 거대한 사이비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사이비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은 의미와 권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방에서 들려오고 보여 지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이다. 딱 봐도 웃기고 얼토당토않은 것부터, 그럴싸하고 아리 까리 한 차원까지 수위는 다양하다. 그녀의 작품은 계몽의 시대가 무지와 몽매를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 개명천지의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계몽이 미몽이 되었다는 역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제이기도 했다. 계몽의 역설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치밀한 권력의 전략이 발휘된 결과이다. 그것은 강제가 동의가 되고, 누군가 명령하기 전에 자기 검열과 조절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시대를 반영한다. 왜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의 몸짓을 취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그래서인지 3개 층에 걸쳐 있는 다양한 작품들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각축장처럼 다가온다. 


내장-속-우주-ASMR_2015-(인사미술공간-1층-전경)



엇갈린-신(들)_2015-(인사미술공간-지하-전경)


그러나 무거운 현실--허위이지만 강력하기 때문에, 그리고 허위도 현실에서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에--을 다루는 작가의 방식은 심각하지는 않다. 김실비의 작품에서 재미는 의미에 가닿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다. 특히 사이버 세계가 펼쳐지고 나서, 재미가 없다면 어느 것도 관심 대상으로 선택되거나 지속될 수 없음이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미디어 생태계의 한 복판에 있는 젊은 세대의 작품 표면에는 유머러스한 코드들이 다수 박혀있다. 황당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작가 또한 어수룩한 형식, 가령 전시 독본에 제시된 바와 같은 ‘가난한 이미지’(히토 슈타이얼)로 대응한다. 전시된 작품은 여기저기서 찍은 것을 초벌 편집한 듯한 영상부터 되는대로 오려 붙인 삐라에까지 이른다. 거기에는 스펙터클과 관련된 엄청난 기술이 축적되어 있는 시대, 젖과 꿀이 흐르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기름지고 윤택한 화면을 발견할 수 없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공짜로 배포되는 이미지나 음원을 그냥 갔다 쓰며, 일련의 서사를 가지는 연출된 화면들도 거친 가위질 흔적이 역력하다. 



디지털 생태계 속 가난한 이미지


이러한 태도는 작가가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권을 문제 삼는 것과도 관련된다. 디지털 세계 역시 자연처럼 거대한 생태계가 되었다. 정확히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정보들이 떠다닌다. 작가는 큐레이터 이단지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의 ‘시각화의 법칙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2015년에 재현하려 했을 때, 디지털 이미지 제작 기술과 유통망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나의 세대를 전후로 디지털과 인지자본주의는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시지각적 세계 인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영리 공개 도판, 동영상 등을 대거 활용한 것에 대해, ‘최첨단 고급 기술을 동원한 완벽한 만듦새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예산도 없거니와 이 전시의 목표가 아니다’고 밝힌다. 형식만을 세련되게 매만지다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흐릿해질 수 있다. 어떠한 비판적인 태도도 느긋한 소비로 귀결될 수 있다. 작가는 최소한의 것들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향해 날렵하게 나아간다.   


인사미술공간-지하-전경



인사미술공간-2층-전경


1층에 들어선 관객은 스피커 두 대만 달랑 놓여 있는 공간에서 무엇을 봐야할지 당황스럽다.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 작가는 미술 전시장에서만이라도 눈을 쉬게 하려는 배려일까.   [내장 속 우주 ASMR]은 15분 정도의 음향이 스테레오 시스템에 실려 무한반복해서 들려오는 작품인데, 음원은 유튜브에서 발췌된 ‘ASMR(자율 감각 쾌감 반응)’을 바탕으로 작가가 다시 만든 것이다. 낮게 지글거리는 소리들은 귀에 거슬리고 뭔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다. 그런데 이 소리는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는 효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치유법이 그렇게 인기가 있다니, 24시간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어지간히 불면을 권하고 있나보다. 백색소음의 필요성은 시청각적으로 과포화 된 상태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오히려 비가시성과 침묵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상 속에서 그것은 홀로 거처에 돌아온 직장인은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놓곤 한다. ‘스마트’ 세상이 열린 이후에는 불특정 다수와의 ‘소통’으로 고립감을 상쇄하기도 한다.


온 우주에 가득한 메시지는 고립된 주체에게 퍼부어지며, 플라시보 효과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편재하는 메시지가 실제로 우리의 ‘내장 속 우주’도 편안하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내장 같은 통로로 이동하는 관객에게 편안함은 있을 수 없다. 일반 주택을 개조한 3개 층으로 구성된 건축구조의 동 선을 따라 붙어있는 삐라들은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 걸쳐 살포된 것들을 수집한 것으로, 사방에서 주체에게 침투하는 사이비의 세계를 소리보다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시 층을 이동할 때 한번 이상은 다시 들려오는 1층의 소리들이 추상적이라면, 가시적인 것은 보다 구체적이다. 몇몇 삐라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투항하면 살려 주겠다; 이라크가 이란에게], [5.16군사혁명 특집화보; 독재정부가 시민에게], [핵실험 일시 비공개; 미국 에너지국이 네바다주 시민에게]...그것들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만큼이나 대량으로 살포된 선전물들이다. 


황금-영토-삐라_2015,-뒷면이-가려진-엑세키아스의-암포라(사본의-사본)_2015-(인사미술공간-2층-전경)



제명-당한-미래-RB,-G_2015-(인사미술공간-2층-전경)


일러스트나 선전문구들은 조악하지만, 명백히 당시의 지배체제가 대중들에게 대량으로 전달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매순간 ‘빨리 지갑을 열라’고 설득하는 일상의 선전선동처럼 부드럽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반공삐라; 남한이 시민에게]에는 ‘농민의 고혈을 짜는 공산당’이라는 글이, [반중국 반소비에트 연합; 유엔이 북한에게]에는 ‘쏘련과 중공을 위해서 죽엄을 택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 밖에 [공습 시 대처방법; 영국정부가 시민에게]등과 같이 심리전과 국민행동요령이라는 매뉴얼을 탑재한 것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역방향도 있다. 작품 속에는 ‘6월 10일을 앞두고 교수님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제하의 장문의 대자보도 발견된다. 학생들이 손 글씨로 쓴 대자보에서 87년 6월을 민주항쟁을 기념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항의 차 청화대로 향하겠다고 선언한다. 저해상도 프린트 물에 출전도 밝히지 않고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수집된 삐라들은 독약인지 치료약인지 알 수 없는 약을 끝없이 살포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의 여러 사례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수집된 선전 선동 자료들은 설득으로부터 세뇌에 이르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공세의 정점에  있다. 작가는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의 선전물에서 선전의 본질적 측면을 전달한다. 인쇄물이 등장하는 작품 말고도, 다양한 기호들이 명멸하는 김실비의 작품은 보기 뿐 아니라 읽어야 한다. 무한반복을 통해서 상식으로 길들여진 권력의 담론, 즉 이데올로기는 복잡한 생각의 필요성을 덜어준다. 체계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총력을 다한다. 올리비에 르불은 [언어와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선전이라는 가장 눈에 띄는 형태 말고도,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에 스스로 답하게 하여 그것의 전제를 사실로 인정하게끔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하는 진짜 술책을 보유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김실비가 택한 전단이라는 형식은 ‘발화자와 수신자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상황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즉석 소통 방식’(르불)이다.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언표가 만들어내는 선동적 효과는 그것이 말하는 것에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언표가 덜 명확할수록 더 효과적이다. 



김실비_엇갈린 신(들)_2015



김실비_엇갈린 신(들)_2015


불명확한 용어와 모호한 구문을 사용하는 것, 즉 비의주의는 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된다. 저자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현대인은 잘 알 수 없는)라틴어로 행해지는 예배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비유한다. 이데올로기적 담화는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불명확성을 이용한다는 점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이 전시의 많은 작품에도 해당된다. 김실비의 작품에서 즉시적으로 반응을 끌어내는 짧은 말/글 뿐 아니라, 장황한 말/글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어두운 무의식의 영역으로 내려가는 듯한 지하층의 작품 [엇갈린 신(들)」/ Misread Gods]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제 급으로, 이상한 옷을 차려입고 있으며, 엄격한 의례에 치중한다. 복잡한 의례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인간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과는 다른 인간사회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대사는 없지만, 신의 전언처럼 울려 퍼지는 방백은 ‘비합리적이기에 믿어야 한다’는 오래된 종교적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등장인물의 엄숙함과 진지함은 어수룩한 상황들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러한 어긋남 또한 현실임을 알려준다. 


벽면과 바닥에 영사되는 수수께끼 같은 영상과 함께 설치된 구, 도자기, 황금덩어리 같은 제의적 사물은 영상과 연동되어 해석된다. 바닥에 놓인 도자기 작품 [뒷면이 가려진 엑세키아스의 암포라(사본)]는 메달린 구가 가리고 있는 달의 뒷면이라는 은유와 함께한다. 작가는 밝혀지지 않는 역사의 이면을 암시한다. 아즈텍 문명이 몰락한 이유는 아즈텍의 마지막 왕이 스페인의 침략을 예언된 구원자(神)의 현신으로 오인하였다는 역사적 오독의 기록이 있다. 작가는 비극의 역사를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유럽인들은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탐험’하며, 미개인들을 ‘개화’시켰고, 심지어 그들에게 환대받고 입성했다는 논리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작가는 그 비극적 역사를 희극적으로 각색했다. 바탕에는 유럽의 번잡한 도시 이미지를 깔아놓음으로서 그 시대부터 이 시대까지 관통하는 어떤 문제를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땅이나 집이라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대상에 대한 키워드가 제시된다. 가난한 예술가로서 주거 불안정자였을 김실비는 도심 재활성화를 위한 개발이 누군가를 계속 쫒아내는 과정임을 체감했을 것이다. 타자의 유입과 유출의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김실비_엇갈린 신(들)_2015



김실비_엇갈린 신(들)_2015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촉구되는 시대에 타자와의 만남은 신비가 아니라, 피해 의식 내지 적대 의식을 낳을 수 있다. 작가는 집값이 싼 베를린의 한 동네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동시대적 식민주의라는 상상으로 발전시켰다. 2층의 작품 [제명당한 미래 RB, G]는 소리 없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각 환경을 은유한다. 거칠게 제작된 어지러운 화면 속에서도 뉴타운이라는 단어와 아파트 숲들, ‘창조경제’, ‘헤게모니’같은 단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기둥과 벽면이 오밀조밀한 공간에 동시 영사되는 비디오 작품은 공간감을 더욱 모호하게 한다. 원근감 없이 바짝 다가오며 흘러가는 이미지들, 편재하는 시각 정보들, 부유하는 기표들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막 같은 도시에 오아시스 이미지가 난무하듯이, 조악한 장난감 이미지와 함께 등장하는 뉴타운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풍경은 허상처럼 보인다. 끝없는 정보의 흐름들은 소비자로 규정된 이들의 주위로 공전한다. 그러나 덧없이 떠돈다고 해서 비현실은 아니다. 어디론가 들어가는 문처럼 2채널로 배치된 작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불교의 수인(手印) 같은 종교적 상징을 인용하면서, 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불확실성도 함께 커지는 현대사회를 비유했다. 

  


추상화된 사회에 깃들인 신비


이러한 불확실성은 정신노동이 육체노동을,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지배하며 야기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추동하는 자본은 추상적이다. 작가는 자본의 추상적 운동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하려 했다.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분석하기 위해 ‘추상에서 구체로의 고양’을 촉구했던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파편화로 보일만큼 잘게 잘려진 분업의 사회, 그리고 복잡한 교환의 회로망은 세상을 추상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모든 것이 까발겨지는 사회에서 비밀만이 선제적 이익을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따라야할 규칙의 자세함과 엄격함이 합리성이 아니라, 부조리함으로 귀결되는 예는 많다. 현대는 그러한 예외가 규칙이 된 사회이다. 이러한 파타피직스의 세계는 일찍이 다다이스트들이 겨냥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성스러움이 추상이듯이, 추상화는 신비화될 수 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에서 작가는 동양 종교의 이미지와 서양의 종교의 메시지를 결합시키고, 웹상에서 저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료 저화질 영상들을 바탕으로 깔아 놓았다. 


김실비_제명 당한 미래 RB, G_2015



김실비_제명 당한 미래 RB, G_2015


작가는 ‘이 전시에서 신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맹신하고 추종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직간접적 은유’라고 밝힌다. 이러한 은유에 의하면, 종교는 이데올로기로 다가온다. 올리비에 르불은 [언어와 이데올로기]에서 현대인에게 종교가 더 이상 주지 못하는 것, 즉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의 답,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등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만약 대중이 아직 종교를 믿는다면 아마도 이데올로기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가 신의 침묵에서 그 담화를 이끌어낸다고 본다. 종교란 인간에게 신성/세속의 기준을 나누는 기준을 제공하는데, 작가는 물질이 지배하는 세속의 한 가운데서 신성시되는 것을 본다. 신성 또한 세속적인 장치들이 아니고선 유지될 수 없다. 작가는 불보살의 손짓에서 초기 자본주의 경제학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떠올렸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해주었던 고전경제학의 개념은 퇴색했지만, ‘마이더스의 손’같은 신화적 이미지가 일상어에도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현실에 포함된 비현실의 몫을 분명히 해야 할 예술의 과제가 명확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은 마치 불화보다는 조화를 갈등보다는 화합을 암시하는데, 그 역시 한 계급의 일방적인 관점이다. 누군가의 화합과 조화는 누군가에게 고통과 폭력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불균등한 힘의 관계를 정당화한다. 정당하지 않는 과정이 정당화되어야 하기에, 그리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을 합리화해야 하기에 은폐와 왜곡, 더 나아가 신비함까지 깃들게 된다. 김실비가 싸구려 이미지로 심각하게 각색한 것들은 여전히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유사 종교적인 신성함들이다. 작가가 당면한 가장 구체적인 문제인 자유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기초는 소유이다. 소유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비롯하여 자유롭지 않는 과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란 누구보다도 자유와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갈등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는 자이다. 김실비의 ‘엇갈린 신(들)’전은 집요하게 선전되는 메시지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파악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권력의 타자들임을 알려준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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