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살 것 인가, 쓸 것인가.
안규철 전 (9. 15—2016년 2. 1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의 부제는 뭔가 암담한 느낌을 준다. 그 형용어가 꾸며주는 단어인 ‘나라’가 사회와 국가 사이에 패인 균열, 그리고 그 균열이 야기했던 부재와 박탈감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어나서는 안 될 수많은 사건사고를 일으키게 한 근본 원인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원인의 제공인자는 여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수에게 퍼트린 무력감이 깔려있다. 한편으로, 거시적인 사회 역사적 문제를 떠나서 이 전시가 예술행위임을 염두에 두고 ‘나라’를 국가에 한정짓지 않는다면, ‘안 보이는 사랑’이란 작가에게 영원한 짝사랑일 수밖에 없는 예술의 세계가 아닐지. 작가가 50세가 될 무렵에 [49개의 방](2004, 로댕 갤러리)을 선보였고, 올해에 60개가 넘는 방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여전히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미로라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 전경, 2015
새로운 작품을 포함한 8개의 전시작품은 문학, 특히 시적인 감수성을 조형예술 작품에 녹여 내왔던 작가의 경향을 예시한다. 전시 부대 자료로도 많이 제시되고 있는 그의 수많은 드로잉들은 작은 오브제부터 건축적 스케일까지 작품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풍부한 저장고이다. 글과 이미지로 구성된 드로잉들, 또는 글의 역할을 하는 드로잉들은 상상으로만 가능할 구상부터 치밀한 계획서까지 다양하며, 실현되지 않았던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의 후원이 더해진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중 몇 개는 종이를 벗어나 설계와 시공을 거쳐 물리적 공간에 기념비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전시장은 바닥부터 천정까지 관객의 동선을 계산하여 재구축되었다. 바닥의 상태, 계단이 등장하는 시점, 더 나아가 연출된 공간에 들어가서의 행동까지 면밀하게 계산됐다. 안규철 전은 개념을 중시한다면서 개념을 체현할 구체적 과정을 등한시하여 결과적으로는 최초의 개념도 불확실해지는 여느 ‘개념미술’과도 다른 탄탄한 장치들이 돋보인다.
드로잉, 문학에서 조형예술로의 가교
관객이 처음 보게 되는 작품 [아홉 마리 금붕어]는 9개의 동심원으로 만들어진 수조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들이다. 하나의 중심을 공유하는 계층화된 구조는 각각의 궤도에 충실할 뿐 자유로운 유영 또는 섞임을 가로막는다. 칸막이 쳐진 공간에서의 삶이 비슷하다는 것, 그것은 공동체도 개인도 아닌 어정쩡한 우리의 일상을 은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비전 아래, 작품을 통하여 (일시적인)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 뒤의 작품 [피아니스트와 조율사]는 전시 기간 132일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에 와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마찬가지로 매일 와서 피아노의 부품을 하나씩 빼는 조율사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연주다.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이 하나씩 사라져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를 해도 효과가 없어지는 암담한, 또는 파국적일 수도 있는 상황을 다소간 기계적으로 재연하는 것이다. 연주는 침묵으로 끝난다기 보다는 침묵을 연주하면서 끝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홉 마리 금붕어, 2015, 스테인리스 스틸, 기포발생기, 수중펌프, 모터, 물, 금붕어, 400 x 400 x 30cm(스케치)
아홉마리금붕어 설치전경, 2015
왠지 이상한 느낌에도 매일 연주를 계속하는 피아니스트는 하늘이 무너져도 사과나무를 심는 긍정적인 사람인가. 고장을 의식하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인가. 그 모든 것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하던 일 계속하는 소심한 사람인가. 안규철의 작품은 문학적 은유를 통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작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의미 중에서 상당히 큰 의미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무의미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작품 [1,000명의 책]은 전시기간 동안 온라인으로 신청을 한 천명의 관객이 문학작품을 연이어 필사하는 작업이다. 전시장 안에 마련된 ‘필경사의 방’에서 각자 한 시간씩 주어진 책을 필사한다. 필사하는 책은 이상의 [날개]부터 프란츠 카프카의 [성]에 이르는 국내외의 명작으로, 수많은 사람이 연이어 쓴 손 글씨로 된 필사본이 생산된다. 필사자는 고립된 독방에서 고독한 행위를 수행한다. 이 작품은 글쓰기(작업)라는 것이 유배, 또는 유폐와 다름없는 행위라는 것, 그러나 이 절대 고독의 행위는 고독 그자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더 강렬한 만남을 위한 일시적인 유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필사는 각자하지만 궁극적으로 만들어지는 책은 공동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현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통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초고속으로 복사가 되는 시대에 필사라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 행위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플로베르의 작품 [부바르와 페퀴세](1881)에도 나오는 필경사 및 필사라는 소재는 사회풍자를 넘어서 예술 대한 자기 풍자로도 해석된다.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또 써야 하는가. 삶과 쓰기는 조화로운가. 조화롭지 않다면 쓰기만으로 삶을 채울 수 있을까. 쓰기가 삶에 다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쓰다 보면 삶을 충만해지는가 아니면 비참해지는가....대답이 있을 수 없는 이 수많은 꼬리를 무는 물음들은 삶을 살면서 예술을 하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화두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라는 낭만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삶과 쓰기에는 간극--말과 사물 사이에 드리워진 간극과 비교할 수 있는--이 있고, 그 간극이 바로 쓰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와 조율사, 2015, 업라이트 피아노, 모니터, 퍼포먼스, 가변 크기
1,000명의 책, 2015, 철, 합판, 지향서 스피커, 카메라, 모니터, 종이, 펜, 1500 × 480 × 420cm
물론 양자가 너무 멀어지면 삶도 예술도 큰 손해를 본다. 작품 [기억의 벽] 역시 다수가 참여하는 작품인데, 필사작업보다는 좀 더 열려 있고 느슨하다. 전시장에 비치된 메모지에 작가가 주문한 대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부재하는 것의 이름들’이 적혀지면 그것들로 거대한 벽면이 채워진다. 누적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벽은 계속 변화한다. 서서히 진행되는 카드 섹션, 또는 애니메이션같은 형국이다. 5개월 동안 지속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모인 수 만개의 단어는 ‘사라진 것들의 책’들로 만들어진다. 이 작품은 작년에 우리나라 전체를 침몰시켰던 세월 호 사건이 연상된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해변 가에 가득 붙여 놓은 그 수많은 쪽지들은 똑같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최소한의 과제, 즉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부재하는 것, 사라진 것들은 동시에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함을 말한다.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하는 거듭된 시작의 자리
작품 [식물의 시간 II]는 구체적 자리가 아닌 추상적 공간에 매달린 존재를 은유한다. 공중에 모빌처럼 매달린 화분들은 땅위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야 할 것들이 공중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화분이라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갇혀있는 식물들은 작품 [아홉 마리 금붕어]에 나오는 금붕어들을 닮았다. 메시지는 작가의 상상을 포함한 개념부터 시작되지만, 십시일반의 관객 참여나 건축적 스케일의 작품을 통해 체현된다. 작품 [64개의 방]은 짙푸른 벨벳 천으로 만들어진 64개의 방이다. 10 여 년 전 비슷한 구조의 작품이 딱딱한 문들로 만들어진 냉랭하고 중성적인 분위기라면, 두툼한 천막의 형태로 된 이번 작품은 좀 더 부드럽다. 그러나 그곳을 통과하는 몸을 휘감는 막이 공포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밀실공포증 환자들을 위해 배려한 바닥의 레드(LED) 조명을 빼고는 깜깜하기에 미로에 심연의 느낌까지 가세한다.
식물의 시간, 2015, 철, 와이어, 식물, 700 × 500 × 500cm
작가는 이 작품의 에스키스에다가 ‘검푸른 벨벳의 방, 바다처럼 깊은 미로’라고 써 놓았다. 영원히 방황하도록 운명 지어진 미로는 방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뭐든 빠른 해결을 원하는 스피드 시대에 미로가 전제하는 우회로는 낭비일 수도, 때로는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위험을 자발적으로 떠안곤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정체성이다. 작품 [침묵의 방]은 미로 구조를 가진 [64개의 방]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다. 백토와 석회로 마감을 한 둥그스름한 방에 들어가면 환하고 뻥 뚫려있다. [64개의 방]이 악무한(惡無限)의 느낌이라면, [침묵의 방]은 신성한 단일성으로 다가온다.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는 종교적 공간도 떠올릴 수 있을 법하다. 반대로, 이 밝은 방은 어떤 이들에게는 어두운 미로보다 더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빛을 포함한 모든 소리를 삼켜버릴 것 같은 푸른 미로와 달리, 둥근 하얀 방은 작은 발소리나 목소리에도 크게 반응한다.
[64개의 방]이 강압적인 침묵을 만들어낸다면 이곳에서의 침묵은 경이와 관련된다. 너무 고요해서 주체의 어떠한 사소한 움직임이나 소리도 크게 되울려오는 곳에서 우리는 무심코 침묵하게 된다. 여기에서 침묵은 단지 부정적인 행위를 넘어서 무언가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것은 언어 자체가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칸이나 행간을 통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차적인 것을 하나하나 치우고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만 남은 곳에서, 우리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주체조차 텅 비우게 된다. 전시 동선의 맨 마지막에 배치된 이 작품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종합된다고 할 수 있다. 부재의 공간이면 충만한 공간, 안이면서도 바깥의 공간인 이 곳은 다름 아닌 예술의 공간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 전시의 다른 작품들 뿐 아니라, 그동안 작가가 심취했던 문학을 염두에 둔다면, ‘문학의 공간’이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작업을 시작할 때 작가가 처음 펼쳤을 드로잉 북의 빈 페이지가 공간화 된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64개의 방, 2015, 철, 합판, LED 조명, 흡음재, 벨벳천, 640 x 640 x 240cm
기억의 벽, 2015, 못, 종이, 철, 나무, 1400 × 520cm(벽면), 280 × 60 × 400cm(계단)
침묵의 방, 2015, 나무, 철, 백토, 석회, 조명기구, 790 × 790 × 900cm (스케치)
채워지기 위해 비워져야 하는 그 거듭된 시작의 자리 말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과 함께 제시된 여러 자료들을 보면, 안규철의 작품에서 드로잉은 문학에서 조형예술로의 가교를 이루는 듯하다. 그래서 필자도 문학에 대해 훌륭한 의견을 내놓았던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의 몇몇 단상을 필사(筆寫)함으로서 평문을 마무리 짓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혹의 위협이 있는 고독을 긍정하는 공간에 돌입하는 것’이며, ‘시간의 부재라는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시간의 부재 속에는 끝없는 새로운 시작이 군림한다. 모든 본원적인 것은 끝없는 새로운 시작, 그 순수한 무능이라는 시련에 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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