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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헌 / 현실세계의 축약본으로서의 가정

이선영

현실세계의 축약본으로서의 가정

  

이선영(미술평론가)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며


배종헌의 ‘네상스(Naissance)’ 전은 우리에게 친숙한 ‘르네상스’에서 재(re-)를 뺀 어떤 탄생을 주제로 한다. 문예사조사에서 르네상스는 근세 초 고대의 재탄생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전시되는 작품의 맥락에서 보자면 가족의 탄생, 즉 두 성인 남녀의 결합에서 비롯된 가족, 특히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함께 겪는 초창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구체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에 결혼하여 현재 4살, 10살 두 아이를 둔 40대 후반 남성의 ‘결혼 문화 및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한 사적인 고백과 베이비 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탄생’하면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신이 인간(남성인 아담)을 창조하는 장대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지만, 배종헌의 ‘탄생’에는 신/인간이 인간/신과 극적으로 접속하는 영웅적이고 숭고한 장면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매순간 살과 살을 치대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구체적인 인생 수업이 있을 뿐이다. 


이 전시의 숨겨진 키워드인 ‘우리 집은 전쟁터’에는 모태로부터 빠져나옴과 동시에 새로이 속한 세계의 무질서도를 무한대로 늘려가는 아이의 육아과정이 깔려있다. 가족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모든 가족은 단 한번 그 일을 겪는 것처럼 어렵게 그 과정들을 온몸으로 통과한다. 그것은 작품이라는 아이를 낳는 예술과 비슷하다. 철학과 역사 등, 예술에 관한한 평생을 다 공부해도 다 못 익 힐 수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작가는 창작에 임하는 매순간마다 낯선 탄생과 직면하지 않는가. 자신이 시작했지만 전적으로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그 복잡 미묘한 과정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예술에는 ‘창조’라는 유사 신학적인 패러다임이 그렇게도 쉽게 들러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배종헌은 이 재현(representation)될 수 없는 과정에서 ‘re-’를 단호히 떼 버렸다. 전시된 작품 제목의 하나 인 [길이 없는 지도]처럼, 작가는 많은 이들이 겪어온 격세유전(隔世遺傳)적 과정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과정으로 변모시켰다. 예술이라는 낯설게 하기 어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전시장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과 관련된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으며, 관객은 제시된 동 선을 자연스럽게 따라 가면서 그 과정을 공유하게 된다. 작품들은 그러한 과정에 대해 남성은 물론 여성도 자세히 알기 힘든 많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알게 되었지만, 작가 배종헌은 주변의 어떤 시시콜콜한 것들도 작품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록 광처럼 느껴진다. 2015년 두터운 작업집서를 출판하기도 한 작가의 세심함이 한두번 겪고 잊어버리는 공공연한 비밀을 전시장이라는 공적 영역에 공개하게 했다. 특히 출산과 육아 부분 같이 남성이 개입하기 힘든 부분까지 실제 상황에 바탕 한 상상력이 펼쳐져 있는 점은 놀랍다. 남성 작가의 이러한 넓은 ‘오지랖’은 단순히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들이 예술작품의 탄생 과정과도 밀접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이질적 타자와 만나 그것을 자기화하면서 전에 없던 것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육아 과정에서 관찰되는 아이들의 창조적인 놀이는 예술적 실험과 다를 게 없다.     

  

결혼과 가족; 사적 영역의 탄생


결혼과 가족에 관한 배종헌의 작품이 특별했던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부분은 현재 한국이 ‘세계 최하위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인구 소멸 1순위 후보국’이라는 예측이 나돌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재생산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 속해있는 결혼-출산-육아의 문제는 사실 공적/사적 영역을 오가는 문제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보이는 작품 [어떤 부케]는 막연히 아름답기만 한 꽃이 아닌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꽃으로, 행복의 시작을 알리는 결혼에 대한 환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가족 해체의 사회에 직면한 작가의 결혼문화에 대한 의문부호인 것이다. 작품 [청첩서]는 2001년 결혼 당시에 실제로 지인들에게 돌렸던 청첩서와 그 복사본을 다시 펼쳐 놓은 것이다. 일반 청첩장과 달리, 결혼할 두 남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어르신들을 위한 돋보기도 아래에 비치했다. 


청첩장 내용과 관련된 드로잉은 국수, 파뿌리 등 결혼식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형상들을 추상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작품 [턱시도와 마고자]는 예식장에서는 턱시도 양복이 폐백장에서는 마고자가 필요한 짬뽕 문화를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신랑과 신부는 전통과 현대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고자 한다. 여성 역시 드레스와 한복이 반반인 의상이다. 붉은 카펫 위에 서있는 이 남녀 한 쌍의 의상은 기괴해 보이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신랑신부가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이중삼중의 규범을 증언한다. 작가는 이 규범을 예술 특유의 한 술 더 뜨기 방식을 통해 더 강조했을 뿐이다. 배종헌이 이 전시에서 선택한 주제는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다수가 공통적으로 겪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골칫거리인 소통 문제에 물꼬를 튼다. 한국의 많은 신랑신부가 그런 모습으로 시집장가를 갔지만 다시 겪지 않을 심정으로 다들 그냥 넘어갔던 부조리한 관습들이 하나 둘 들춰진다. 


그러나 그렇게 엄격한 규범을 통과하여 성사된 결혼 생활이 규범만큼 견고하지는 않다. 설치 작품 [유리 집]은 본래 ‘행복이 가득한 집’이어야하지만, 유리병처럼 쉽게 깨질 수 있는 집의 상황을 표현한다. 유리로 된 것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 집은 유리집인 것이다. 유리집 안에 영상으로 흐르는 텍스트들은 위기의 가정을 다루는 뉴스기사들이다. 현대사회가 고무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희생이 필요한 가정생활과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에게 가족은 동물 또한 포함한다. 가족의 일원인 동물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다. 작품 [엘리자베스 카라를 한 가족 사진]은 중성화한 반려 견에 치료차 씌웠던 뻣뻣한 카라를 반려 견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착용하고 찍은 사진으로, ‘욕망이 거세’되어 있지만 각자만의 시야가 갈등의 씨앗이 되는 가족을 담았다. 원뿔형의 카라는 각자 자기만의 원근법을 가지게 하는데, 그것은 다양함만큼이나 한정된 시야를 말한다. 


입양 온 반려견의 복잡한 움직임을 담은 궤적인 [산이가 우리 집에 온 날]은 같은 공간에서 타자들과 부대껴야 하는 즐거움과 번잡함을 표현한다. 작가에게 가정은 내 영역에 들어온 타자들과의 만남이며 소통이다. 배종헌의 작품 속 가족이나 가정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동시에 불행을 줄 수도 있다는, 나를 안정시키는 것들이 나를 불안정하게 할 수도 있다는 역설이 있다. 소우주인 가정은 대우주인 사회의 축소판으로, 그곳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크고 작은 갈등이 내재해 있다. 특히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는 개인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고, 누가 더 많이 희생해야하는가에 대한 판단과 결정에 권력의 문제도 개입된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아이를 키우기 위해 타자에 의존해야 하는 여성, 가장이라는 짐을 진 남성 모두가 울어야 하는 게임이 바로 결혼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남성은 바깥일을 하는 것이 정상인 전형적인 핵가족은 이제 무너지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이라는 상에 드리워진 이상형으로 남아있다. 집안일이든 바깥일이든 모두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다. 임금을 공적 영역에만 줌으로서 공적 영역을 더 우월시하는 시대의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가 [젠더]에서 말하듯이, 이러한 ‘경제인’의 패러다임은 남자와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바에 들어맞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경제인의 관념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 역시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많은 분업들이 그러하듯이, 성별분업은 조화보다는 갈등을 더 많이 낳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최초의 분업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남녀 간의 분업’이라고 말했다. 분업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가정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화’만이 있지는 않다. 거기에는 ‘한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고난과 억압을 대가로 하여 실현되는’(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의 갈등이 선명하다. 개별 가족은 사회적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인 것이다. 


공적 영역과 분리된 집이라는 사적영역의 주인공은 여성이지만, 사회의 타 분야와 같은 명백한 공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는 예술의 경우, 사적영역의 몫 또한 감당한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남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와 분업에 의한 과부하는 남성/여성/예술가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는 재산의 보존과 그 상속을 위하여 이룩된 것’이라고 보는데, 재산을 축적하기 힘든 예술가 부부에게는 남성 지배의 확립을 위한 동기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 부부라 할지라도 사회라는 대우주 속 소우주에서 반복되는 갈등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타인의 노동력을 비롯해 거의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 고충은 계층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배종헌의 작품에서 유리집이라는 상징으로 압축되는 소우주를 가로지르는 것은 사회적 위기 그 자체다. 그러한 문제들은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로부터 와해되어 가는 현대화 과정을 말한다.

    

임신과 출산; 타자되기


임신과 출산은 가족을 지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변덕이 심한 남성과 여성의 관계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자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결혼, 육아 과정과 달리 임신 부분은 남성으로서는 다가가기 힘든 영역이지만, 배종헌은 가족의 형성에 빠질 수 없는 이 영역에도 많은 탐구를 할애했다. 진통을 겪는 여자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있는 작품 [레테의 강]은 첫아이의 출산 때의 고통을 잊고 다시 둘째를 출산하는 과정을 망각의 강과 비교했다. 아내는 첫아이의 출산의 고통을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이의 출산도 가능했을 것이다. 망각은 유전자가 자신을 후대에 남기려는 진화의 책략일지도 모른다. 망각하는 동물의 건강함을 찬양했던 니체가 예시했듯이, 통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고통이다. 이 작품에서 탄생의 고통을 기억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작가인 남편이다. 기억은 시간과 밀접하다. 


작품 [어떤 시간]은 산통을 겪을 때 의사가 ‘이슬 비치면 오라’고 돌려보내던 기억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이 ‘새내기’ 부부가 정확하게 ‘자궁의 문이 열리는 시간’을 맞출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의사의 시간과 환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의사한테는 늘 상 대하는 직업적인 일이지만, 환자는 처음 겪는 일이므로 한 사건에 대한 온도차가 있을 수 있다. [산모수첩]은 임신한 아내와 병원에 한 달에 한번 같이 가서 임신부터 출산 까지 10달을 10장의 천에 나누어 자수로 표현한 설치작품이다. 작가는 전시장 중간쯤에 출산의 과정과 관련된 10개의 장면을 기저귀 널듯이 설치했다. 10개의 하얀 천들은 순차적으로 걸려 있는데, 단계별로 통과할 수 있는 커튼이 드리워진 문처럼 보인다. 작품에는 임신했다는 체크가 있는 신호부터, 초음파 탐지, 뱃속의 아기집, 모자의 심장박동 등의 모습이 담겨있다. 산모의 배가 커지면서 생겨난 천둥 번개 같은 굵은 선이나 부은 다리 같은 모습은 한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 모체가 겪어야 할 극적인 변모를 기록한다.  


200호짜리 큰 그림 [미인]은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배와 코끼리 같은 다리 등이 조합된 괴물로서의 산모다. 여성이 어미기 되는 변모의 과정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리고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개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는 비천하면서도 신성하다. 출산하는 여성의 모습은 신비하면서도 공포스럽다. 여기에서 몸은 유기체적인 위계질서를 잃고, ‘속도와 강도의 표면’(들뢰즈와 가타리)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러한 몸을 ‘기관 없는 몸’으로 개념화 한 바 있다. 저자들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이 유기체와 유기체의 조직을 산산조각으로 폭파시켰으므로, 기관 없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더더욱 살아있으며 다수성으로 가득 찬 몸’이다. 배종헌이 묘사한 괴물로서의 산모는 이러한 다수성과 강렬함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것은 육체 뿐 아니라 극심한 감정 기복에 지배되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도 해당된다. 


애초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된 배(胚)가 격렬하게 세포분열을 하면서 여러 기관들을 형성하는 과정 자체가 그러한 상태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기관 없는 몸’은 강렬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 되지 않은 물질이고 강렬한 모체이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부정적인 것도 없다고 말한다. 기괴한 모습의 산모도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가는 모순을 모순된 형태로 그대로 놓아둔다. 작가는 출산부문에서 면밀한 관찰과 상상력을 통해 타자와 공감하는 기술을 발휘한다. 초유를 바나나 우유로, 모유가 꽉 차 단단해진 유방을 돌덩어리로 표현하며, 물통을 앞에 매고 산모의 자세를 흉내 내고 미역국을 너무 먹어서 토할 것 같은 모습까지, 작가가 마치 산모가 된 것 같은 경험이 펼쳐져 있다. 임신이 타자를 받아들여 타자를 자기화하는 과정이라면, 작가 또한 타자되기를 작업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의 존재는 고통이자 쾌락이다. 예술의 언어 자체가 이러한 이중적 과정이다. 


예술은 경계 지워진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예술에서 끝없이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것이 바로 그 경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출산은 예술적 과정과 가장 가깝다. 남성은 여성처럼 몸으로 낳지는 못하지만, 작품으로 낳는다. 생성을 위한 파열의 과정을 재현할 수는 없다. 괴물은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비유이다. 관객에게는 그 과정을 재연하게 했다. 결혼-임신-출산-육아의 과정으로 나뉘어진 전시장에서 임신과 출산 사이에 자궁 문으로 비유될 수 있는 비좁은 통로로 연출한 것이다. 휠체어 하나가 통과할 정도의 좁은 통로는 와인 천 빛으로 감싸여 있다. 기존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길은 어두컴컴하다. 출산 부문은 코스모스를 전야인 카오스, 삶의 전제인 죽음이 떠돈다. 배종헌의 작품에서 남성이 여성에 가지는, 아이가 어머니에게 가지는 낭만적인 모성의 이미지는 완전히 깨져있다. 모성을 포함한 ‘여성의 신비’는 여성을(동시에 남성도) 억압하는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육아; 그림자 노동


육아 파트에서 작가의 경험치는 큰 힘을 발휘한다. 오남매의 막내였던 배종헌은 육아의 과정이 이렇게 까지 힘든 줄 꿈에도 몰랐다. 드로잉 작품 [길이 없는 지도]는 이론과는 다른 실제인 육아에 대해 ‘내가 새롭게 맞이해야 하는 세계’임을 인정한다. 작가는 작품 [길이 없는 지도]에서 글자를 겹쳐서 엉켜보이게 한다. 엉킨 글자는 육아에 직면한 그 누구라도 각자 풀어야 할 사항이다. 세상의 많은 자식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인간은 그냥 자동적으로 자란 것 같다. 물론 공동체의 범위와 역할이 크고 강했던 이전 시대에는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핵가족마저 위협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극단적 분업은 생산력만을 진보시켰을 뿐, 삶을 위해 행해져야할 일의 총량을 줄이지는 않았다. 배종헌의 작품에는 ‘경제’라는 미명아래 공적 부문에서는 생략된 것들이 드러나 있다. 상품으로 나온 수많은 기구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육아가 더 어려운 것이 된 것은 아동기가 독자적인 영역으로 강조된 것과 관련된다. 


필립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10세기경의 그림에 나타난 아이들이 작은 성인의 모습인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19세기 근대의 중산층 가족 속의 아동은 인생의 한 독자적인 시기를 보내며, 가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아이가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매뉴얼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역사가들의 탐구에 의하면 가족이 역사의 부침에 따라 변해왔듯, 아동기 또한 자명한 자연적 단계가 아니다. 아동기의 탄생은 광인이 거리에서 일상인과 같이 살다가 감금되고 노동하며 교화와 치료의 대상이 된 ‘광기의 역사’와 비슷한 여정을 밟는다. 아이는 이전시대 보다 더 관리, 보호받는 것만큼이나 억압된다. 물론 그것은 동물에 비해 불완전 하게 태어나는 인간의 생물학적 상황과도 연관된다. 작품 [두 세계]는 광고 속 모자상과 실제 상황을 대조한다. 실제상황에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아이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해야 하는 부모의 고충이 담겨있다. 작가는 엎드려 자고 싶은데 뱃속 아기가 눌릴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임산부를 위해 월별로 다르게 배를 끼울 수 있는 침대인 [아기를 품고 싶은 침대]를 고안하기도 했다. 


작품 [a giant]에서 아이는 좁은 집의 상당 공간을 차지하는 거인으로 나타난다. 바느질로 얼기설기 콜라주한 천에는 육아 노동의 모습이 담겨있다. 작품 [오 마이 베이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눈물 흐르듯이 수놓아져 있다. 육아는 가사노동의 핵심에 놓여있다. 배리 쏘온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가족]에서 반복적이며 소외된 채로 수행되는 것이 보통인 가사노동은 임금노동보다 덜 가시적이며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독립을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가사노동은 임금 노동력을 유지시키고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이해되며, 결국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자면, 가사노동은 사회의 노동력 유지와 재생산에 봉사하는 무보수의 지원 서비스의 제공에 해당된다. 핵가족 내의 사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육아노동은 사회의 임금노동을 뒷받침하지만, 개인의 책임에 떠맡겨 있다. 개인의 관심과 사랑만이 아니라, 사회적 뒷받침이 있다면 육아가 그렇게 힘들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새도우 워크(그림자 노동)’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이반 일리치는 이 용어를 한 상품에 추가가치를 더해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경제는 통계적으로 보고된 부분과 보고되지 않은 부분으로 구분된다. [젠더]에 의하면 ‘자발적 활동’인 가사노동은 현대에 유통되는 모든 화폐가치에 내포되어 있으되, 측정할 길이 없는 지하경제의 일부이다. 근대에 걸쳐 확산된 임금노동의 이면에서 혹은 그와 병행해서 제 2의 경제활동이라 할 수 있는 유례없는 활동이 등장했다. 요약하자면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재생산에 포함되지만, 사회가 모른 척 하는 부분이다. 물론 사회는 육아휴직 등 관련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그 역시 공적인 사회의 안전 그물망 속에 속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혜택이다. 육아만큼이나 예술도 그림자 노동이다. 비록 배종헌은 예술보다 육아가 더 힘들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는 육아의 과정을 예술로 표현했다기보다는 양자가 중첩되는 부분을 건드린다. 육아는 무보수 노동이면서도 많은 돈이 필요하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전적인 헌신은 안팎으로 많은 역량을 쏟아 붓게 한다. 그것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다른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과 다르게 문화를 가능케 하였다. 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는 인간의 아이는 가장 고등한 유인원의 새끼보다도 훨씬 오랜 기간 동안 부모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랫동안 자녀를 돌보는 관계, 다시 말해 양육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감수하는 관계와 연결되지 않는 문화란 존재할 수 없다. 문화는 인간을 인간이게 했다. 그러나 문화의 위상은 변화했다.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문화는 이전시대처럼 ‘자기 지방 고유의 말과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기능을 습득할 수가 있었던’(이반 일리치) 그러한 총체적 문화가 아니다. 현대의 부모가 직면한 것은 소비문화이다. 현대인은 원활한 소비생활을 위해 지루한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 값비싼 유아용품에 황당했을 것임에 틀림없을 작가는 ‘아이를 황제 취급하는’ 상품명들에 주목한다. 자신은 청빈하게 살아도 자식한테만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심정을 이용한 고가의 물건들이 많다. 그는 명품 아기용품 로고의 실밥을 풀어헤쳐진 모습으로 부모를 안팎으로 착취하는 소비문화를 풍자한다. 그의 작품은 특정 소비상품들에 대한 분석적인 작업이며, 일종의 문화비평 이다. 

    

놀이; 잠재적 공간


전시장의 마지막 코스를 이루는 것은 아이의 놀이를 관찰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아이를 사진으로 계속 기록해 왔다. 아이는 장난감 뿐 아니라 콩나물이나 컵 등, 놀이에 ‘적절치 못한’ 온갖 것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그들은 24시간 감시대상이다. 작품 [어느 인디고 베이비]는 ‘외계에서 온 천재적인 아이’라는 신조어와 관련된다. 작품들은 너무나 엉뚱하고 어이없는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었다. 빨래 건조대 등을 이용한 키네틱 아트에서 장난감/상품/사물/예술의 구분은 불명료해진다. 머리카락을 관찰하는 기계라든가 원 운동하는 컵, 부엌의 그릇을 떨어뜨리는 놀이 등 작가를 난감하게도 하고 신기하게도 했던 아이의 모든 놀이는 모두 예술로 ‘승화’ 된다. 센서에 반응하여 작동하는 이 예술 기계들은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작동한다. 그의 작품에서 아이는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세상으로 재창조하는 전능한 존재가 된다. 작가는 아이가 실제로 노는 장면을 영상으로도 틀어줌으로서 이러한 부조리한 기계들이 나온 배경을 제시한다. 


인류학자와 역사가들은 아동기의 탄생을 인간 특유의 문화와 관련짓지만, 동시에 문화에 내재한 억압성 또한 주목해왔다. 누군가 전적으로 사적 문화를 담당하는 일에 대해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화하곤 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그림자 노동이 자본에 기여하는 몫을 밝혀내기도 했다. 결혼문화부터 육아문화에 걸치는 범위를 다루는 배종헌의 작업은 인생의 축약본인 만큼이나 사회의 정치경제학 전반에 걸쳐있다. 또한 그것은 인류가 유아화를 통해 사회적 인간이 되었다는 생물학적 가설부터 아동기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담론의 영역과도 관련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상황을 중계 방송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과정들에 얽힌 객관적 맥락을 제시한다. 작가는 영상에 흐르는 텍스트 형식으로 가족 안팎을 둘러싼 위기의 징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교차, 개인의 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되는 영역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회 풍자와 비판은 외재적으로 흐를 수도 있다. 폭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는 육아의 시공간에서 발견한 인간 특유의 문화와 놀이에 잠재된 예술적 속성에 주목함으로서 균형추를 맞춘다. 예술을 만들어내고 즐기는 인간의 능력을 약 4 만년 전에 절정에 도달한 인간의 진화에서 나타난 부산물이라고 믿는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그러한 진화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아기-엄마 관계의 연장과 사람 손의 급격한 진화라고 본다. 배종헌은 엄마는 아니지만, 직접 탯줄을 자를 만큼 아내와 함께 보살핌의 노동에 깊이 참여했다. 물론 그것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예술이라는 넉넉한 장은 이 모두를 재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성이기보다는 현실원칙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중간 영역의 창출에 가족이 모두 참여했다는 점이다. 피터 풀러는 문화체험을 가능케 하는 이 중간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의 학설을 활용한다. 


정신분석학은 아이가 직접적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일시적인 사물들을 활용한다고 본다. 그것들이 장난감이고, 이 전시에서는 예술작품이다. 위니코트에 의하면 아이가 중간의 매개적인 경험영역, 또는 내면적 현실과 외부의 삶이 모두 그에 이바지 하는 ‘잠재적인 공간’을 설정하듯이, 작가 또한 상징들을 활용함으로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적인 삶으로 화하는 모든 것을 활용함으로서 잠재적인 공간을 꽉 채운다. 원래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존재했던 이 잠재적인 공간은 아이와 가족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재생된다. 물론 그것이 재생되는 관념인 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가정/놀이/예술은 현실원칙에 대항하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형성한다. 겉으로는 ‘융복합’과 ‘창조경제’ 등을 외치곤 하지만,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극단적인 분업화의 시대, 배종헌 전은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인 가족이라는 영역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출전; 대구미술관 Y+ Artist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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