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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오흥배 전 /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뉴-바니타스

김성호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뉴-바니타스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화가 오흥배는 〈Bodyscape〉로 명명된 이전 시리즈 작품에서 클로즈업된 신체의 일부분을 극도로 정밀하게 그려내는 작업에 골몰해 왔다. ‘누드의 절단된 상반신’ 혹은 ‘클로즈업된 하이힐을 신은 발’ 등을 담은 그의 회화는, 철저하게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조형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일련의 ‘생경한 시각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안겨 주었다. 등신대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로 확대한 절단된 신체의 일부분, 과도할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된 피부 표피는 오히려 비재현(non-representation)의 양상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회화 속 인간 육체를 어렵지 않게 ‘낯선 풍경’으로 치환시킨다. 신체의 탈이상화(脫理想化)와 더불어 익숙한 것들의 과도함이 이르게 한 낯섦과 생경함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을 소재로 한 그의 최근작은 어떠한가? 


오흥배, to see, to be seen, 80.3x116.8cm, oil on canvas, 2016


I.  마른 꽃 - 회화의 존재론 
그의 최근작은 식물, 그것도 ‘마른 꽃’이다. 화분(花粉)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해 생식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화려했던 화피(花被)조차 수분을 더 이상 머금고  있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채 주검에 이른 존재이다. 생각해 보라! ‘말라 죽은 꽃’은 ‘미, 아름다움, 화려함’ 나아가 ‘부귀, 하모니, 사랑, 재생’과 같은 꽃에 대한 ‘관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의 의미를 애초부터 잃은 존재이다. 
그러나 ‘마른 꽃’은 꽃이 본원적으로 함유하는 ‘자연’이라는 ‘원형 상징(Archetypal Symbol)’을 언제나 배태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 꽃의 정수(精髓)임과 동시에 꽃을 품고 있는 대표적 상징으로서의 ‘자연’은 생성 옆의 소멸을 그리고 존재 옆의 부재를 버리지 않고 끌어안는다. 수정(受精)과 수태(受胎)를 능히 행하는 약동의 존재이든, 기력을 다해 생명을 지속하는 일조차 버거운 노화(老化)를 겪고 있는 존재이든, 차안(此岸)의 삶을 다하고 피안(彼岸)의 세계에 접어든 주검의 존재이든, 그것은 존재와 부재, 생성과 소멸을 함께 아우르는 자연의 세계이다. 그래서 존재의 현현(顯現)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주검으로서의 마른 꽃은 ‘자연’의 입장에서 ‘살아 있는 꽃’과 다른 양태의 또 다른 자녀일 따름이다. 
화가 오흥배가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시들어 가는 꽃, 말라 버린 꽃은 그에게 쓸모없는 것, 버려진 것, 쓰레기와 같은 존재로 치환되기보다 ‘또 다른 생명력과 존재감’을 부여하는 실체가 된다. 시인 김춘수가 자신의 시에서 ‘꽃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꽃이라는 실체가 되는’ 사물에 대한 명명(命名)과 인식의 제 문제를 해석해내듯이 화가 오흥배 또한 그의 화폭 안에 말라비틀어진 꽃을 호명하고 불러와 기표화함으로써 마른 꽃의 기존의 의미를 곱씹고 그것에 되물어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마른 꽃’이라는 주검과 부재의 기표(signifiant)는 그의 회화에서 ‘또 다른 생명의 존재’라는 기의(signifié)로 옷 갈아입는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오흥배, to see, to be seen, 100x80.3cm, oil on canvas, 2015


II.  21세기의 바니타스 - 회화의 알레고리
오흥배의 회화는 17세기의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천착했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life)의 형식을 차용한다. 당시의 바니타스 회화에는 해골, 뼛조각, 모래시계, 깃털 장식, 보석, 악기, 책, 거울, 꺼진 촛불, 과일과 꽃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교훈을 던지는 알레고리를 실천한다.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바니타스(Vanitas)가 ‘삶의 허무, 허영, 현세적 명예욕’이라는 의미를 다중적으로 함의하고 있듯이, 유한한 정물들을 모티브로 해서 한시적 인간 삶에 대한 교훈을 던지는 것이라 하겠다. ‘정물화’를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 칭하듯이, 죽음이 예정된 유한 존재로서의 ‘정물’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오흥배의 회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니타스 정물화가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회의론을 화폭에 담았던 것과 달리, 그의 회화는 ‘죽은 자연’(마른 꽃)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생명적 존재’를 노래하면서 삶에 대한 긍정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조형 형식과 알레고리(Allegory)라는 메시지 전략은 같되, ‘죽음/부재’보다는 ‘삶/존재’라는 지향점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벤야민(W. Benjamin)에 따르면 알레고리란 건설과 파괴,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처럼 ‘화해할 수 없는(혹은 화해하지 않는) 대립항 속에서 생겨난 예술 형식’이다. 오흥배는 죽음의 실체로부터 삶을 지향하고 구식의 재현적 조형 언어로부터 ‘다른(allos) 말하기(agoreuo)’를 지향하는 ‘알레고리아(allegoria)’를 실천하려고 한다. 유념할 것은 ‘21세기의 바니타스’라 명명 가능한 그의 알레고리적 회화에서 이러한 다르게 말하기의 방식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이번 전시 주제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는 사실에 있다. 



오흥배, to see, to be seen, 97.0x97.0cm, oil on canvas, 2015


III.  보는 것과 보이는 것 - 화가의 눈 
오흥배의 회화는 하이퍼리얼리즘 혹은 극사실이라는 조형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재현적 회화’이다. 그것은 마틴 제이(Martin Jay)가 언급하듯이 대상을 가장 객관적 시각(Objective vision)으로 조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조망 체계는 프레임 안에 갇힌 응시(Gaze)의 세계를 드러낸다. 원근법이란 용어 안에 내재한 ‘~을 통하여 보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듯 그는 ‘마른 꽃’을 모티브로 현실계의 대상을 프레임 안에 감금한 채 대상을 응시한다. 생각해 보라. ‘재현’으로서의 회화가 대상을 죽음의 상태로 결박해서 평면 위에 새롭게 되살려 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되풀이하는 진부한 기술임을 상기한다면, 그의 회화는 일견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대상을 대면하는 고도의 집중력, 데생의 놀라운 스킬과 출중한 묘사력은 그의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그의 작품은 오랜 회화사에서 거장들이 선보여 왔던 경탄할 만한 재현적 회화의 위치에 자리하지만, 현대미술에 훈련된 우리의 눈에 그것은 어떠한 측면에서 진부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인 오늘날 그가 왜 이러한 재현이라는 구태의 방식에 골몰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제기된다. 그가 과거의 회화 언어에 어떠한 흠집을 내어 자신의 회화 언어를 창출하려고 하는지 또 그가 성찰하는 회화의 존재론이 오늘날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관계에 관한 탐구로부터 비롯된다. 오흥배의 이번 전시의 주제인 〈To see, to be seen〉이란 제명이 상기시키듯이, 최근작에서는 ‘사물을 보는’ 화가 주체와 ‘작품을 보는’ 관객 주체 그리고 ‘보이는’ 대상(사물 혹은 작품)의 관계의 차원에 보다 더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재현적 회화의 위상을 전통의 그늘로부터 한 걸음 보폭을 내딛게 하는 것으로 정초시킨다. 특히 쉽사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 나아가 폐기처분되었거나 버려질 존재인 ‘마른 꽃’을 미적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실재의 크기보다 수십 배로 확대하여 드러냄으로써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러시아 문학가 시클롭스키(Shklovsky, V.)의 비평적 문학 방법론의 원용처럼 보인다. 익숙한 언어의 낯설게 사용하기는 매우 원론적인 창작 방법으로서 이것은 초현실주의 문학이나 회화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같은 연관성이 없는 사물들의 작위적인 낯선 만남과는 일정 부분 궤를 달리 한다. 즉 초현실주의가 일상적인 관계에 위치한 사물들을 추방하고 전치(轉置)하여 상호간 이질적인 관계에 둠으로써 실현시키는 ‘낯설게 하기’와 달리, 오흥배는 익숙한 사물을 단순하게 크게 확대하고 과도하게 세밀한 양태로 제시함으로써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만든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들’의 관계 지형 속에서 재구성하여 변조하기보다 ‘보이는 것’을 ‘보는 주체’와의 관계 지형 속에 낯설게 위치시키고 ‘심미적인 거리 두기’를 시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조형 방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는 재현의 정공법을 선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최근의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젊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변주의 방식, 예를 들어 이미지를 에어브러시로 흐릿하게 만들어 사진의 텍스추어를 흉내 내거나 역으로 대상체의 이미지를 뭉개거나 물감의 마티에르를 두텁게 올리는 등의 방식을 통해 회화 작품의 물성을 탐구하는 제스처에 전혀 무관심하다. 관자들에게 ‘회화적 함의’를 선보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위장의 미학을 실천하는’ 방법론적 성찰에 그칠 위험을 오흥배는 잘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이미지들의 교차, 편집이나 추상적 이미지와의 교류와 같은 복합적이고 혼성적인 이미지 제작 방식을 그는 원천 차단한다. 오로지 붓을 가지고 대상과 대화하듯이 화폭 위에 올라선 사물의 이미지를 ‘화가의 (새로운) 눈’으로 진중하게 매만지는 것이다.  


오흥배, to see, to be seen, 65.1x65.1cm, oil on canvas, 2015



IV.  에필로그 
그럼에도 그의 회화에 대한 비평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잔존한다. ‘익숙한 것의 낯설게 하기’라는 매우 오래된 회화의 전략이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가 이전 회화의 전통으로부터 차별화된 자신만의 창작의 태도를 천착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문이 가능하다. ‘마른 꽃’이지만 여전히 ‘꽃’이라는 전통적 회화 대상도 그러하고, 사진을 참조하는 방식으로부터 근원하는 극사실의 재현의 언어도 그러하다. 보드리야르의 극실재 혹은 파생실재라 불리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와의 접점을 탐구하려는 노력 역시 소재적 한계로 인해 쉽지 않은 지점이다. 
한편, 작위적인 제스처를 철저히 배제하고 회화의 근원적 질문으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창작 태도는 매우 견실한 것이지만, 그가 천착하는 화두가 ‘20세기 추상회화’의 형식으로 많은 부분 결론이 난 만큼, 회화의 근원적 질문을 재현적 언어로부터 찾는 작업은 매우 풀기 어려운 난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회화를 고수하는 오늘날 화가들이 개념적 실천이나 회화의 변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동시대 현장에서, 지금도 ‘그리기’라는 조형 언어와 매우 근원적인 회화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면서 뉴-바니타스의 위상을 세워 나가는 그의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그가 기대하는 새로운 문제의식과 맞닥뜨림으로서 필자조차 알 수 없는 새롭고도 놀라운 도정에 접어들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뉴-바니타스, 카탈로그 서문 (오흥배 전, 2016. 8. 24-9. 18, 통인옥션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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