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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현 / 역사의 장에서 작동되는 재현의 정치학

이선영

역사의 장에서 작동되는 재현의 정치학

  

이선영(미술평론가)

  

차진현의 ‘가려진 지속’ 전에서 가려진 것은 무엇이고 지속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 즉 작가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 관심을 가져왔던 한국의 근현대사이다. 그가 주목한 역사는 한때 큰 파장을 일으켰던 큰 사건 그자체가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여파나 그 흔적들이다. 그의 작품 목록에는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의 수면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이후에도 속시원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미 많이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초상이나 퇴락한 분단 풍경이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도 하고 답답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중립적인 기록사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언뜻 보면 그러한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도 힘들다. 민족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낸 할머니들의 모습은 보통 할머니와 다를 바 없으며, 분단을 소재로 한 시리즈 역시 분단과 관련된 이런저런 기호들이 박혀있는 우리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 한구석처럼 보인다. 




15Coastal artillery bunker, 2013



19Scenery picture and the landscape outside the window, 2013



32Woman looking at North Korea, 2013



4Japanese craneS flying over the Labor Party Building, 2014



자연스러움, 별 다른 징후 없음은 그의 작품을 접할 때의 첫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덤덤하고 자연스러운 풍경 안에는 해석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빈틈과 균열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관객이 그 균열을 주시하는 순간 자연스러운 광경은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즉 소격된다. 관객은 작가가 피사체에 둔 거리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온갖 선정적인 사진들이 공기처럼 편재하면서 우리의 감각을 융단폭격 하는 이 시대의 감각에 비한다면 그의 흑백 사진은 담담하다. 보통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역사적 사실은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굉장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가 주목한 역사적 사실은 여전히 경악할만하다. 그렇지만 그가 다룬 역사적 사건들이 여전히 우리를 강하게 자극한다면, 어떤 의미로든 해결이 났을 것이다. 역사는 뜨겁지만 일상은 차갑다. 뜨거운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일상화된 역사의 흔적들은 이미 식어서 그자체로 무엇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단서처럼 작동하면서 해석학적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차진현의 작품에서 역사적 사건들은 마치 해결되고 끝난 것인 양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적절한 가려짐 속에 여전히 지속되는 게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흔적들이 모든 것이 소비되는 일상 속에서 또 다른 항목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폭로조차도 담담해서 무엇이 폭로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또한 그것들은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에 있어 사진가 당사자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는 의혹은 무엇인가를 대상화하는 매체인 사진의 탄생 이래 누구도 초월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는 소재가 주는 민감함을 완화하기 위해 형식을 조율한다. 가령 위안부할머니를 다룬 [108인의 초상] 시리즈에서, 작품 제목을 [108인의 초상-이름, 생년, 고향]로 명기했다. 1920년대 전후의 탄생일이 많은 할머니들은 제국주의의 폭력이 일어났던 식민지 시대에 가장 꽃다운 나이였을 것이며, 남쪽 지방 출신이 많은 것은 위안소가 많이 설치된 남해안 항구 도시들을 추정하게 한다. 




공정엽 1920년 해남 출생



이용수 1928년 대구 출생



‘108인’은 그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한 때 드러났던 위안부할머니의 숫자이다. 우연찮게도 108번뇌를 떠오르게 하는 숫자지만, 원래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차진현은 그들을, 또는 그 사건을 모두 재현한다는 야망 대신에, 어렵게 접촉했던 할머니들에서 어떤 전형을 포착한다. 작가는 약소민족이 겪어야할 불행을 한 평 남짓 되었을 어두운 위안소에서 홀로 떠맡았을 이들을 한명씩 호명한다. 감옥같은 검은 바탕의 정방형 프레임에 불러 세워진 이들은 여전히 어두운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장롱에서 오래된 한복을 꺼내 입고 선 할머니들의 묵뚝뚝한 표정은 비극적 생애를 견뎌낸 어떤 방식일수도 있고, 사진이라는 매체 앞에 서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어떤 세대의 감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초상사진이 주체의 상상을 담는 일상적 거울로 소비되는 것은 정보혁명 이후 세대의 관습이다. 그래서 작가는 할머니들이 만족할만한 ‘예쁜’ 사진은 (작품과 별도로)따로 찍어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할머니들은 각각 한 공간에 유폐되어 있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사람처럼 바닥으로부터도 붕 떠 있을 뿐 아니라, 타인들로부터도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그녀들의 삶에 일어났던,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졌던 수많은 격리들을 상징한다. 해가 지날수록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할머니 늘어가면서 기록적 성격을 띈 차진현의 작품은 이제 영정사진으로 변해버렸다. 작가는 할머니들을 찍는 순간부터 거기에 드리워진 여러 차원의 죽음을 인식한다. 위안소에 도착한 날의 십대 소녀 순덕, 분이, 옥선이의 ‘죽음’, 그 이후 세상을 유령처럼 살아왔던 말 못 할 삶, 그리고 국가 간 지배계급의 타협적인 거래로 악용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차진현의 작품은 큰 역사와 개인사가 비극적으로 중첩된 엄청난 사연을 가진 한 인간에 대한 절절한 표현이기 보다는, 샘플 채취하듯이 냉정하게 호명한 방식은 국가(간) 차원에서 벌어진 폭력에 관한 어떤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완곡하게 주장한다. 




김옥선 1923년 안동 출생



이옥선 1927년 부산 출생



분단을 다룬 ‘post border line’ 시리즈는 철원이나 파주 등, 분단선 인근의 일상풍경을 담은 것이다. 폐허로 변한 노동 당사 위를 한 쌍의 두루미가 날아가는 작품부터 목련이 가득 핀 통일공원에 이르기까지, 언뜻 서정적이기도 한 풍경이지만 동족상잔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에는 죽음의 기호가 배회한다. 그것들은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역설적인 풍경들이다. 피사체가 자연이 아닌 인공물, 가령 전쟁 유물 등에 맞춰지거나 관광객들이나 군인, 지역 주민 등이 등장하면 다소간 풍자성이 드러난다. 가령 북한군이 뚫었다는 제3땅굴을 참관하고 있는 신병들과 그 앞을 지나는 할머니의 시큰둥한 표정을 대조시킨 작품이나 ‘안보 현장’을 관람하는 관광객의 시점이 드러나는 작품 등이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6.25 전쟁 당시에 남은 유물들은 결코 자연적 시간의 흐름에만 내맡겨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안보 관광객’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한시대의 기술력과 이데올로기가 새겨진 그것들은 자연 속에 배치된 예술품과 비견될 만하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무기들이나 선전도구들은 공원 등으로 옮겨가서 기성 체제를 선전하는 전시품목으로 제 2의 삶을 산다. 분단 이후 수 십 년 간 실제 전쟁은 일어난 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무기들의 원래 목적은 선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전도 자신과 적대입장에 있는 이들을 죽이곤 하므로 그것은 여전히 무기인 셈이다. 전쟁이 정치의 지속이라면, 정치 또한 전쟁인 것이다. 차진현의 작품에는 멀게는 한국전쟁, 가까이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이 일어났던 장소에는 당시 긴박한 상황을 증거 하는 수상한 물건들이 박물관의 유물처럼 보존되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잊혀진 역사들을 호명하면서 어떤 기억을 촉구하는 방식은 일종의 재현의 형식을 갖춘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물에는 관제 민족 기록화같은 허술함과 상투성이 선명하다. 차진현은 그런 것들을 구경거리로 삼고 체제 선전에 활용하는 어떤 세력을 암시함으로서 역사의 현장을 소격시킨다. 심각한 역사는 심란한 풍경으로 변조되는 것이다.




3Soldier lowering head in front of the torpedoed warship, Cheonan. 2013



44A woman and two portrait photos, 2014



9Two rings and tanks, 2015



12 Searchlight for surveillance 2016


그의 작품에는 역사의 현장 자체에서 파생되는 비극과 그 이후에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상황과 관련된 씁쓸함이라는 어두운 정서들이 겹쳐있다. 작가는 반동적 지배 권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하는 재현의 정치학을 문제 삼는다. 그곳에 깔려있는 것들은 대부분 합법적인 것들이다. 합법적인 것은 지배적 권력을 재현한 것을 말한다. 누군가 같은 것을 다르게 사용하면 불법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작품으로 진지하게 문제 삼을 것도 없을 만큼 허술하지만, 이러한 허술함이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심각하고 심란한 것이다. 여전히 ‘때가 되면’ 잊혀졌던 분단 상황은 들춰지고 안보지킴이를 자처하는 기호 O번이라는 표로 모아지곤 하는 것이다. 요즘 시국에서 보면 한국의 권력지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어처구니없음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임을 알 수 있다. 국방부, 통일부, 또 지방자치제와 연관된 잡다한 관변단체들까지 이 유물들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증거 하는 귀한 자원으로 활용 한다. 역사는 상징투쟁의 장이 된다. 차진현의 풍자적 작품에는 통일을 외치지만 정작 통일이 되면 안 되는 세력들이 배후에 깔려 있다. 


물론 그가 찍은 것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러한 사물과 인물들을 관통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허구가 아니다. 허구는 실제가 되고 사진으로 찍힐 수 있는 분명한 인덱스가 된다. 사진은 어떤 매체보다도 사실과 가까이 있다고 믿어지는 매체지만, 차진현의 작품에서 사진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힘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응결물임이 드러난다. 힘의 흐름들은 굳어져 현실이 되고, 현실은 재현되고 소비된다. 이러한 재현의 정치경제학에 사진가는 어떻게 개입하고 더 나아가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반복 속에서 차이를 길어내는 형식에 있다. 차진현은 담담하게 재현한다. 그것은 더 먼저 일어난 재현에 대한 재현이다. 사진으로 행해진 또 한번의 재현은 이전 재현의 일시성과 임의성을 드러내는데 집중된다. 그래서 분단선을 비롯한 각종 경계들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변화될 수 있음 또한 암시된다. 

     

출전; 포토닷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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