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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점 / 계절의 향기를 담은 풍경

이선영

계절의 향기를 담은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성기점(1939년-) 작가의 작품은 추상적인 색 면과 선을 통해 자연에 대한 감흥을 표현 한다. 최근 작품은 기하학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자연은 외관이 아니라, 추상적 구조나 리듬으로 표현되어 있다. 자연을 표현하면서도 푸른 계열의 서늘한 색채가 화면을 주도하는 것은 자연의 뼈대라 할 만한 요소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관련된다. 그 반대되는 따뜻한 색은 단풍이 물든 가을이나 노을이 지는 저녁, 장미 같은 특정 계절이나 시간대, 소재가 등장할 때에 한정된다. 가령 최근 작품 [계절의 향기–꿈꾸는 장미](2015)는 옵티컬 패턴의 배경에 붉은 사각형들이 떠 있다. 장미들은 붉은 사각형들로 환원되었고, 장미에서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향기는 배경에 추상적 패턴으로 처리되었다. 배경을 가득 채우는 장미 향기는 붉은 색 사각형을 표면 위로 떠올리는 듯하다. 여기에는 하나의 감각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공(共)감각의 효과가 있다. 작품 제목마다 붙은 ‘계절의 향기’라는 말머리는 계절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를 알려준다. 


최근에는 기상이변 때문에 봄과 가을이 짧아져 사계절의 변화에 대한 감각이 약화되었지만, 한국 전쟁 발발 이전에 태어난 작가의 세대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도시적 삶을 지배하는 인공적 스펙터클에 눈을 덜 빼앗겼을 시대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자연에 바탕을 두는 작업에서 계절의 변화는 마치 어떤 의례를 치루듯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순환적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겨울과 여름이 길어지고 봄과 가을은 슬쩍 지나가는 형국이다. 급격한 냉탕 온탕이 번갈아가는 요즘은 계절에 대한 감수성의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에 준 충격 때문에 앞으로의 기상은 ‘비정상이 정상인’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니, 사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대의 감각은 독특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감각 또한 역사적이다. 가령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두드러졌다. 인쇄매체의 발달은 구술성에서 시각성으로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시각성은 근대에 특히 발전된 감각이라고 말해진다. 



성기점, [계절의 향기-창에내린 서리], 유화, 2015년.



물론 고대 플라톤 시대부터 시각성의 의미는 파악되고 있었지만, 자연을 포함한 만물이 상품이 되어 도열하는 근대의 시점에 와서 시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성기점의 거의 모든 작품의 붙은 ‘계절의 향기- ’라는 말머리에는 계절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시각적인 지각과 기억이 깔려 있다. 진달래색과 개나리 색으로 가득할 봄, 초록 잎이 울창한 여름, 단풍이 지닌 가을, 눈 덮인 겨울 등, 한국에서 뚜렷했던 사계절은 그 자체의 대표 색을 가진다. 작가는 계절에 향기라는 말을 덧붙여 공감각성을 표현한다. 시각과 후각의 감각을 앞세운 후,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된 시적인 단어의 조합에서 관객은 추상적 작품들의 내용을 인지한다. 작가의 눈길이 닿은 자연은 겨울나무, 초봄, 장미의 추억, 가을아침 같은 풍경이다. 식물성만 있는 것은 아니고, ‘새들이 다니는 길’이나 ‘고양이 낮잠’ 같이, 눈에 보일 듯한 구체적 풍경 또한 발견된다. 


일상의 풍경은 계절을 머리말로 하는 하루의 시간대가 표현된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 아침 풍경 같은 것이 그것이다. 작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느껴지는 느낌들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상황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의 목록--‘입체, 공간, 평면, 직선, 곡선, 점, 삼차원, 인상, 계절, 시간, 속도, 평화, 사랑, 희망, 빛, 흰 구름, 그늘, 바람, 물, 소리, 아침, 노을, 정오, 젊음, 오후, 고운마음, 허공, 기쁨, 여행, 따뜻함, 서늘함, 이른 새벽, 저녁나절, 이별, 이슬, 눈 오는 날, 혼자 있는 마음, 생각, 망각, 등등’--을 나열한다. 작가가 떠올린 서정적 단어들은 그대로 이미지가 된다. 성기점의 또 다른 작품 군은 여행에 관련된 것이다. 작품 자체가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이기에 화가들은 그렇게도 여행을 즐겨한다. 여행 그림은 여행에 대한 추체험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계절의 향기-  ]라는 형식의 제목 아래, 국내외의 여행지의 인상과 추억이 담겨 있다. 


여행을 제대로 하는 이들은 한 장소를 계절을 바꿔가며 가고, 또한 한 곳에 오래 머물러서 그 변화를 느끼기도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자연은 변함없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준다. 성기점의 작품에서 자연은 변화하는 가운데 지속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 풍경 또한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계절의 향기-하얀 빌딩 인상](2012), [계절의 향기-창이 많은 빌딩](2015) 등은 그자체가 추상적 풍경인 도시를 표현했다. 그러나 자연풍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도시를 있게 한 구조적 리듬과 색채가 자유롭게 배열되어 있다. 작품 [계절의 향기-창엔 내린 서리](2015)는 거대한 창으로 이루어진 근대도시의 한 면을 미시적으로 분석한다. 안과 밖의 온도차로 인해 창에 하얗게 서렸을 서리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는데, 그것은 철골과 유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도시풍경을 미시적 차원에서 반복한다. 구조적 단위의 조합으로 무한 확장되는 도시풍경과 원자나 분자차원의 구조와는 동형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현미경 사진부터 천체망원경 사진까지, 사진의 편재는 이러한 공통감각을 부추 킨다. 자연에 대한 구조적 모방은 근대과학 뿐 아니라 근대예술에서도 공통된다. 그래서 모더니스트들은 전래의 시각전통보다는 과학이나 산업기술 현장의 이미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성기점의 작품에 선명한 구성주의적 이미지는 이러한 공통어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문명의 풍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근대의 디자인과 건축은 과학기술과도 공유하는 어법을 구사한다. 철골구조와 유리, 콘크리트 등으로 이루어진 현대도시는 고동색이나 녹색 등에 바탕 한 자연적 색채가 아니라, 블루와 화이트 계열의 조합으로 칠해진다. 그것은 거대한 반사유리로 채워지곤 하는 마천루에 비춰지는 하늘 풍경을 연상시킨다. 거기에서 도시를 가득 채우는 고층 건물의 물질감은 최소화된다. 자연이 반짝이는 그리드로 나뉜 추상적인 면에 되비쳐 졌을 때, 그것은 그자체가 거대한 추상화와 같다. 성기점의 작품에는 거대한 거울들이 서로를 반사하는 도시 풍경이 있다. 추상화는 도시화와 밀접하다. 


도시는 자연조차도 자신의 규칙에 맞춰 재배치한다. 성기점의 도시풍경에는 야경보다는 새롭게 시작되는 아침나절의 광경이 많이 느껴진다. 인공 광원으로 가득 채워질 도시의 밤에서 자연의 입지는 좁을 것이다. 한국의 도시에서 많이 발견되는 재개발지 풍경은 문명 역시 자연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변화는 변수가 아닌 상수로 다가온다. 그러한 변화는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계절의 향기- ]라는 머리말로 시작되는 도시풍경에서 하루는 그 안에 또 다른 사계절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침이 봄이라면 점심은 여름, 저녁은 가을, 밤은 겨울 식으로 말이다. 거기에는 프랙털 도형처럼 내부로 반복되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작가는 자연이라는 보다 큰 순리 안에다 예술을 포함한 인간 사회의 규칙을 포함시키려 한다. 문명을 포함한 자연을 좀 더 멀찍이서 보면 그 안의 자잘한 것들을 초월하게 된다. 예술은 이러한 초월을 위한 진지한 놀이가 될 수 있다. 성기점의 작품을 이루는 몇몇 요소의 조합은 놀이적 특징을 보여준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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