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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복제시대의 목판화 제5회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에 즈음하여

김영호



김영호 (미술사가/미술평론가)



■ 목판화의 힘 

    바야흐로 복제시대가 첨단을 달리고 있다. 영상, 출판, 음반, 스마트폰, 사물인터넷, 로봇공학 등의 영역에서 복제기술은 삶의 패턴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공공장소 곳곳에 세워진 감시 카메라나 내비게이션 그리고 인공지능 알파고는 현대의 새로운 얼굴들이다. 이러한 복제시대의 미디어들은 모두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삼고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가 주도하는 복제시대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복제시대의 환경에 대응해 예술가들이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 복제성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그 중심에 있다고 본다. 복제시대의 환경에서 복제성의 개념에 대한 연구는 현대인의 의식구조와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복제의 문제는 예술의 본성에 관련이 있다. 서구 예술의 기원은 대상의 복제(reproduction), 즉 본디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복제의 고전적 개념으로서 모방(mimesis)과 재현(represenation)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역사가 서구 예술의 역사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대에 와서 복제의 문제는 예술창조의 범주를 넘어 예술소비와 시장의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에 채택된 <비엔나 규정(Vienna Definition)>은 복제의 개념이 오리지널의 차원으로 확대된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복제의 문제는 다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수용하면서 예술의 중요한 담론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복제시대의 판화는 중요한 예술장르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판화예술은 우리 시대 해석의 키워드인 복제성 위에 구축된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판화의 본성이자 대표적 형식논리로서 복제성에 대한 논의는 역으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본성을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이렇듯 판화가 지닌 함의는 그것이 대중적 소통의 미디어로서 또는 순수 예술의 범주에서 다루어지면서 수많은 담론을 생산해 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사의 결실에 수많은 노동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로 하듯 판화예술의 본성과 가치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마땅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논의의 장을 만들고 판화의 새로운 개념과 형식논리를 시대에 맞게 개발하는 일이다.  

   올해 5회째를 맞고 있는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은 디지털 복제시대가 야기하는 복제성에 대한 논의의 소명을 수행하는 귀한 행사라 여겨진다. 목판화의 장르에 국한해 미술제를 마련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목판화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성을 품은 장르이자 복제미학의 근원을 미술사의 맥락으로 추적해 풍요로운 학문적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자원이라는 점이 그렇다. 또한 목판화가 지닌 판법의 대중적 용이성과 조각도의 촉각적 기운을 드러내는 특이한 미감은 복제미학의 본성을 확산시키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은 장르간 혼성과 파괴에 따른 개념의 산만함을 일단 차단하고 복제성에 대한 심층적 논의를 위한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주어진다. 이 글은 목판화 세계가 지닌 힘과 비전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기초 개념들 중 복제성과 원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1)





■ 오리지널 판화의 규정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 개념이 국제기구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비엔나 규정'2)이후로 알려져 있다. 복수제작의 특성을 내세우는 판화에 오리지널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후기산업사회의 심화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구조가 정착되어 가면서 판화의 상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미술 내부의 요인으로는 1960년 전후에 팝아트의 등장으로 프린트 미디어인 사진과 판화 등이 소비사회를 대변하는 새로운 표현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의 개념은 소비자의 예술유통의 문제로 대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엔나 규정은 새로운 실험적 매체의 하나로 등장한 판화의 가치를 회화작품과 동등한 차원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이에 따라 판화는 잡지, 광고, 신문 따위의 정보 미디어와는 차별화된 예술작품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비엔나 규정’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지널판화란 “작가의 싸인이 명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체 찍은 매수와 함께 일련번호가 명기”된 판화작품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직접 목판을 깎는다든가 석판위에서 혹은 그 밖의 판위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해당하며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작품은 복제품(reproduction)으로 간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작가의 싸인과 에디션 넘버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작품을 판화기법을 이용하여 원본과 매우 가깝게 혹은 그대로 모사해 찍은 것”이나 “사진을 이용하여 혹은 그와 유사한 기계적인 방법을 이용해 복제한 것”도 오리지널 판화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3)


나아가 '비엔나 규정'에는 “복제품의 경우 오리지널판화와 확연히 구분지어야만 한다”는 항목을 삽입해 작품상에 이러한 사실을 명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에디션이 끝난 판은 원판이 돌이든 혹은 목판이든 에디션이 끝났음을 명확하게 보일 수 있는 표시로 판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적고 있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판화의 오리지널 정의와 유효성은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게 된다. 종이에 찍고 한정판이어야 하고 원판이 존재해야 한다는 정해진 기준들은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판화의 권위는 모노타입, 소멸목판, 콜라주, 콜라그래프, 몽타주, 채색판화, 옵셋인쇄, 제록스, 컴퓨터 그래픽, 캐스팅, 비디오설치, 레이저 커팅 등에 의해 위협 당하게 되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나는 무한복제의 가능성 앞에서 오리지널 개념에 대한 수정과 논의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몇몇 판화제들은 학술행사를 통해 오리지널 논쟁을 주도했다.4) 21세기 영상시대가 심화되면서 전통판화의 개념은 새로운 개념규정과 비평원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른바 정보산업사회의 총아로 등장한 디지털미디어가 판화의 범주로 수용되면서 판화에서 전통적인 ‘판’의 개념이 ‘프로그램’을 통괄하는 차원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비엔나 규정의 기본내용을 보완하여 ‘오리지널판화에 관한 규정’을 공표했다. 1997년 <한국미술협회>와 공동심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발표한 규정의 특징은 오리지널 판화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판화의 범주를 설정하고 이를 세분화 한 점에 있다. 즉. 비엔나 규정이 오리지널 판화가 아닌 모든 작품을 복제품으로 분류한데 반해 서울 규정은 오리지널이 아닌 판화를 ‘사후판화(Posthumous Edition)’, ‘복제판화(Reproduction Print’, ‘복제품(reproduction)’으로 세분한 것이다.5) 복제판화와 복제품의 차이는 원작품을 복제함에 있어 ‘판화’기법과 ‘색분해 등의 방법을 이용한 인쇄’기법의 구분, 또는 원작품을 판화기법으로 찍어내기 위한 작가의 승인 여부에 두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복제시대의 현실에서 디지털 프린트와 사진은 이미 판화의 영역으로 수용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진 또는 디지털 인쇄기법을 결합한 판화도 창의적 형식논리의 차원에서 오리지널 판화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아직도 판화계의 일각에서는 디지털 프린트 또는 기계적인 복제품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영국국제소형판화공모전>, <렉섬국제판화전> 등과 같이 전통기술과 신기술이 결합하여 제작된 판화를 수용한 판화미술제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다시 목판화의 세계로 

   판화는 ‘판으로 찍어낸 그림’이라는 태생적 한계성을 갖는 장르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면 그 한계는 곧바로 특화된 전략의 바탕이 된다.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은 복제성의 한계를 복제성의 미학으로 특화시키며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복제시대의 정신과 새롭게 접목시키는 행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은 목판화를 둘러싸고 발전되어 온 다양한 실험적 경향들을 확산된 판법의 형식논리 차원에서 수용해 외연을 확장시켜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역설의 논리는 비단 목판화 장르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판화 일반을 넘어 예술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인생노정에 적용될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

   판화가 지닌 역설의 논리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나타난다. 우선 19세기 초 사진기술의 등장으로 목판화의 복제기능은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것이 창조적인 표현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타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근대판화의 발전은 기법과 형식 그리고 물성과 재료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까지 이어지는 근대판화의 노정은 근대미술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후 목판화는 새로 등장하는 복제미디어들로서 옵셋인쇄, 제록스, 컴퓨터 프린팅, 캐스팅, 비디오 설치, 레이저 커팅 등과 대질하며 새로운 고비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목판화에 부여된 새로운 표현형식의 탐구와 매체확장의 소명을 그룹운동의 차원으로 올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디지털 복제의 시대가 첨단을 걷고 있다. 이 변화하는 새로운 환경에서 목판화를 비롯한 판화예술의 노정이 어떻게 변모하며 스스로를 지켜 나갈지 주목된다.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에 거는 기대가 울산을 넘어 국민적으로 모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이 주제의 논의는 2009년 4월에 열린 제1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가 기획한 국제판화심포지엄에 소개되었던 필자의 발제문 「디지털 복제시대의 오리지널 판화 논쟁」을 참고로 하였다. 

2) ‘오리지널판화’란 1960년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미술인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Artists)>에서 합의된 내용을 판화가, 공방관계자, 미술거래상 및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쳐 1963년 유네스코지부 <국제조형미술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 des Arts Plastiques)>에서 공표한 ‘오리지널판화의 정의’에 부합되는 판화를 지시한다.

3) 작품을 모사해 찍거나 사진으로 복제한 작업을 오리지널 판화로 분류할 수 없다는 규정은 <영국국제화가조각가판화가위원회(United Kingdom National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ainters, Sculptors and Gravers)>가 비엔나 규정을 추가 보완한 항목에서도 밝히고 있다.

4) 2009년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가 개최한 ‘국제판화심포지엄’은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무한복제의 시대상황에서 판화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또한 판화라는 용어는 멀티플아트 혹은 프린트미디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5) 사후판화란 말 그대로 작가가 사망한 이후에 유족 혹은 관리자의 책임아래 찍어낸 판화다. 그리고 복제판화란 “원작품을 작가의 승인 하에 본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해 판화의 기법으로 제작하고 찍은 것”이다. 또한 복제품이란 “색분해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인쇄기법으로 원작품을 복제한 것” 또는 “원작품을 본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해 판화의 기법으로 제작하고 찍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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