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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살게 하는 죽게 하는 노동

이선영

인간을 살게 하는/ 죽게 하는 노동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 전 (4. 5.– 6. 16, 코리아나 미술관 전관)

씨실과 날실로 전(4. 17 - 6. 3, 서울시립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여성, 장인, 예술가의 노동


‘히든워커스’와 ‘씨실과 날실로’는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여성, 장인, 예술가라는 주체를 통해 표현한 전시다. 여성/장인/예술가는 한 몸이 되기도 하고, 한 몸이 되려는 과정에서 분열과 간극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냥 하나면 편하지 않을까. 단지 여성, 단지 장인, 단지 예술가로서 말이다. 주체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할 이러한 방식은 근대 이래 각각의 영역으로 쪼개졌던 분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분업은 생산력의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러한 시스템에서 공평한 교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시 되었다. 근대에 특징적인 로맨틱한 사랑을 거쳐 가족을 이루고 그 사적영역에서 집안일에 전념해온 여성들의 노동은 허드렛일로 평가절하 되었고, 자본의 이익에 따라 진화하는 생산체계는 장인들을 소모품취급 했으며, 시스템의 바깥에 방치된 예술가의 작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두에 노동이라는 공통 코드가 있다. 개념미술의 전형적 생각과 달리, 순수한 예술 작업에도 노동의 몫이 있다. 


노동은 몸과 정신 뿐 아니라 기계가 포함되는데, 기계는 산업혁명 이래 그 비중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기계가 여성이나 장인, 예술가를 해방시켰다는 징후는 없다. 기계가 발전해도 여성의 가사노동이나 장인의 노동시간을 줄지 않았으며, 기계적 반복 대비되는 예술적 차이에 대한 가치평가도 미미했다. 그로인해 여성, 장인, 예술가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 두 전시에는 여성이면서 예술가, 장인이면서 예술가, 여성이면서 장인인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세 항목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 여성/장인/예술가는 어떤 조합이든 간에 시대의 탁류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현대 미술 전시보다도 사연이 많고, 세세히 읽고 들어야 하는 과정도 많았다. 그렇다고 두 전시의 작가들이 예술적 형식의 힘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내용을 잘 전달하려면 형식은 더욱 예리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게릴라 걸스_게릴라 걸스 이미지와 프로젝트들(사진; 코리아니미술관 제공)


‘히든워커스’ 전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면서 고갈되는 여성의 상황을 페미니즘 시각에서 조명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에 걸쳐 자동화가 더욱 촘촘하게 실현되면서 보다 많은 일이 허드렛일로 변화하는 상황은 그것이 여성에 한정되지 않음을 말한다. 남성 또한 여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씨실과 날실로’ 전은 전통과 산업시대의 방식들에 대한 섬유 예술적 조명을 담는다. 성큼 다가온 AI의 시대, 예술이든 노동이든 손으로 작업하는 이들은 역사의 앞이 아니라 뒤로 처지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모두는 바로 예술이라는 틀 거리를 통해 종합적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예술가는 예외적 존재, 즉 시스템이 할당한 그날그날의 일들에 치이고 살아가는 파편화된 삶의 퍼즐 맞추기를 진지하게 행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두 전시에서는 이반 일리치가 [젠더]에서 ‘새도우 워크(그림자 노동)’라고 이름붙인 노동을 다룬다. 


이반 일리치는 이 용어를 ‘한 상품에 추가가치를 더해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경제는 ‘통계적으로 보고된 부분과 보고되지 않은 부분으로 구분되며, 늘 상 또 하나의 경제가 드리운 그림자’가 존재한다. 이반 일리치에 의하면 그림자 노동이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 즉 현물이전의 경제, 비화폐 시장, 셀프 서비스, 자조 자발적 활동의 영역’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표현한다. 생산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사노동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은폐된 노동이다. 숨겨진 노동에 대한 부담이 당사자들에 의해 수면에 드러나자 사회는 그것을 가시화된 노동으로 전환시키려하지만, 공적 영역으로 나가서 임금노동에 복무한다고 해도 근본적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두 전시에 등장하는 여성/노동자/예술가는 모순의 정점에 존재한다. 

  



그림자 노동과 예술



 마야 자크_마더 이코노미


사회가 유지 지속되기 위해 ‘인간 그자체의 생산’(마르크스)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만들어진 가정을 위해 남성은 공적영역에서 임금노동에 복무하고, 여성은 그 임금에 의지하는 무보수 노동에 복무해왔다. 생산력이 진보한 오늘날 여성은 무보수노동 뿐 아니라 임금 노동도 해야 하며, 남성의 경우 가장의 역할에 버거워하며 결혼조차 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자본/노동의 대립이 처음 역사상에서 가시화되었던 산업시대가 지난 지 꽤 되었어도 그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은 아직 요원하다. 국내외 작가 11명(팀)이 참여한 ‘히든워커스’전은 여성의 감춰진 노동자로서의 면모를 예술을 통해 밖으로 꺼낸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의 작품은 화이트 큐브로 대표되는 깔끔한 미술관이 유지되기 위해 숨겨진 노동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가사노동과 예술 활동 간의 간극을 통일한 것이기도 하다. 마사 로슬러는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흘러 들어오는 공적 사건들의 기표들을 통해 사적/공적 영역의 경계가 모호함을 드러낸다. 물론 사적/공적 영역의 철폐는 페미니스트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상품화하려는 자본가들의 관심사항이기도 하다. 마야 자크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마치 진지한 과학자의 연구 과정처럼 기록하는 행위를 병행하면서 한 접시의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장황하게 표현한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수행됐던 여성의 익명적 노동을 더 이상 자연적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릴리아나 앙굴로_유토픽 네그로


임윤경은 아이돌보미 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린 작품을 통해 육아에 필요한 심신의 노력을 영상편지 형식으로 표현한다. 아이돌보미는 공적영역에서 수행되는 여성의 노동이 사적영역에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려준다. 조혜정과 김숙현은 감정 노동자의 영역을 다룬다. 공적/사적, 인공/자연, 단독성/관계성으로 나뉜 이분법에서 여성은 후자의 영역을 맡아왔는데, 서비스업의 확대는 감정노동의 고통이 여성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때 여성은 어떤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어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국한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손톱관리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공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여성적’ 노동에 대해 말한다. 세계화는 가정이라는 소우주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이 대우주에서 펼쳐지는 차원이다. 


이때 이주여성노동자로 대표되는 이들은 소/대우주의 연결고리가 된다. 가정부로 분장한 릴리아나 앙굴로의 작품에 나타난 흑인 여성, 심혜정의 작품에 나타나는 노인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재중동포, 마리사 곤살레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홍콩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그들이다. 폴린 부드리 & 레나트 로렌즈의 작품 속 주인공은 ‘공장부터 부엌까지’ 수많은 곳에서 일하는 여성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복합체와 결혼하는 것으로 선언된다. 고릴라 가면을 쓰고 페미니즘과 행동주의를 결합한 작업을 실행해온 게릴라 걸스의 30년이 넘는 활동이 담긴 영상과 포스터들도 감회가 깊다. 

  





권용주, 연경, 단채널 비디오, 염새사, 황동, 자카드 프린트 등, 가변설치, 2016(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씨실과 날실로’ 전은 삶의 무늬를 짜는 여성/노동자/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실을 매개로 담겨있다. 의식주라는 인간 삶의 영역에 의생활에서 화려한 패션쇼나 명품이 생각나지만, 이 전시는 그 기저에 놓인 삶을 조망한다. 나날이 진보하는 기계에 가려진 노동자, 거세게 밀려드는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 한갓된 취미로도 자리 잡기 힘든 섬유공예가 그것이다. 노동과 공예가 예술이 되면 좀 더 나아지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이다. 특히 기계 앞에서 더욱 그러하다. 시적인 제목과 달리 몸통은 인지과학에 대한 저서인 [괴델 에셔 바흐](더글러스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컴퓨터 발명에 큰 역할을 한 배비지에게 천공지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카드로 조절하여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직물 무늬를 만드는 자카르 직기라고 전한다. 


이 전시의 한 작품에도 등장하는 자카르 직기가 무늬를 짜는 모습은 흡사 프린터에서 글자가 인쇄되듯 정교하다. 권용주의 작품 [연경]에는 공장 노동자였던 어머니가 화자로 등장하여 이제는 주력 산업의 지위에서 내려온 섬유산업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씨실이라면 인도의 남성 섬유노동자 이야기는 날실이다. 전소정의 다큐멘타리 풍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싱사는 생산자로서의 정교한 우주 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 또한 권용주의 작품 속 노동자들처럼 점차 사라지는 직종이다. 



장민승, 사계, 단채널비디오, 10분, 2016


장민승의 작품 [사계]는 카메라만이 가능한 세부의 포착으로 인간과 기계가 어떻게 접속하는지, 또한 어떻게 대결하고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장인은 예술가에 비해 무명이다. 섬유관련 문화 산업의 안팎에 존재하는 집단적 생산의 장으로, 000간, 이웃상회, 직조생활의 작업과정과 생산물이 함께 제시된다. 서해영의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만들기-타피스트리 협업의 도구] 또한 여성들이 함께 무엇인가를 짜나가는 이야기와 과정이 담겨있다. 권혁은 액션페인팅과 자수가 결합한 작품을, 김혜란은 잘 개놓은 색색의 티셔츠 모양의 기하추상작품을, 고산금은 상형문자처럼 배열한 조형적 서사를, 차승언은 배경으로부터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듯한 미지의 형상을 보여준다. 


극장 간판같은 구성으로 흑백 이미지와 칼라 글자를 배치한 홍영인, 그리고 이미지가 새겨진 장막들을 보여주는 신유라의 작품은 추상 뿐 아니라 구상적 차원에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신파극부터 국가 폭력사태 같은 폭넓은 범위의 이야기가 있다. 오화진의 작품 [조물조물조물주]는 그녀가 예술의 목표라고 정의하는 ‘개인의 문화’로 ‘세상을 디자인’하고자 한다.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처럼 보이는 재봉틀은 자신의 상상력대로 뭐든지 창조하는 조물주의 위치에 작가를 놓는다. 작가는 이미 그것을 실행하면서 살고 있지만, 재봉틀처럼 돌아가는 자동반복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인 것이 생성될 수 있는지는 묵직한 과제로 남겨진다.

 

출전; 아트인컬쳐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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