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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이지현 / 내 안에 잠재된 잉여의 세계

김성호

내 안에 잠재된 잉여의 세계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꿈속 세계 - 오늘과 내일 사이의 중간계 
‘어제와 오늘’은 언제나 ‘오늘과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이어 간다. 어제와 오늘이 고통의 연속이었던 이에게 내일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다. 또 다른 고난의 시간을 새롭게 맞닥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현재에 살게 하는 기억으로 인해 내일은 때때로 예측 가능하기도 하지만, “누구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차원에서 내일은 언제나 불안한 무엇이 된다.   
신진 작가 이지현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염원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오늘은 그녀에게 언제나 최악이었고, 당시의 그녀에겐 이러한 최악이 반복될 내일은 오지 않으면 좋을 미래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불 꺼진 침대에 누워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매일 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어린 시절의 그녀를 위무한 것은 바로 ‘꿈속 세계’였다. 그곳에는 현실 속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기쁨, 즐거움, 환희가 가득한 세계였다. 공포와 고통조차 꿈속에서는 어렵지 않게 극복되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그곳은 어린 이지현에게 끔찍한 오늘의 현실로부터 탈주시켜, 십중팔구 끔찍할 것이 분명한 내일을 무한정 연기해 주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중간계(中間界)’라고 할 것이다.  
작가 이지현은,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언제나 현실을 탈주하는 세계를 그려 보여 줌으로써 현실 속 고통과 비애를 위무해 주었던 꿈속 세계를 자신의 작업 안에 소환하고 연장한다. 즉 어린 시절의 꿈속 세계뿐 아니라 성인으로서 오늘을 살고 있는 최근의 꿈속 세계를 불러와 자신의 작품 안에 되살리는 것이다. 




II. 꿈속 세계의 소환 - 글쓰기와 감정 이입의 이코노텍스트 
꿈이란 어떠한가? 주지하듯이, 꿈속 세계의 본질이란 비현실적이다. 그곳은 대개 억압된 현실 속에 잠자고 있던 무의식이 날개를 펴고 끝 간 데를 모르고 종횡 무진하는 곳이 아니던가? 작가 이지현이 예를 들고 있듯이, 꿈속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억압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욕망”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거짓말, 살인, 자유로운 섹스 등 관습, 윤리, 제도, 금기, 법에 도전하는 욕망마저 꿈틀대는 것이다. 그렇다. 꿈속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상상으로만 그치고 마는 일들이 도처에 발생한다. 현실에서 억눌린 욕망이 꿈속 세계에서 금기와 윤리의 벽을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속 세계란 비윤리적 욕망마저 용납하고 그것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공간이 된다. 그곳은 금기의 두려움과 쾌의 극단적 욕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 공간이다. 작가 이지현의 작업에 있어서, 이러한 꿈속 세계의 이율배반성은 매혹적인 특성이다. 그녀는 말한다. “꿈속 세계는 매번 각자 다른 이야기들이 섞여 나만 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이다. 
작가 이지현은, ‘고통으로 가득한 오늘’과 ‘고통으로 가득할 내일’ 사이를 무한히 연장하기 위해서 그 사이의 꿈속 세계에 천착했던 어린 시절의 “꿈속 세계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작업 안에서 ‘쓰기’를 실천한다. 즉 그녀의 작업은 꿈을 기록하는 글쓰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녀가 꿈을 기록하는 ‘쓰기’의 방식은 꿈속 세계를 현실에서 이해시키려는 해몽(解夢)과 같은 ‘모호한 이미지에 대한 논리적인 언어화 작업’과는 다르다. 그녀가 꿈을 기록하는 언어화 작업에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꿈속 세계에서 느꼈던 감정에 충실함으로써, 자신만의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즉 비현실적인 꿈속에서의 사건을 비현실적인 상태에서 느꼈던 감정 그대로 기록해 나가면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세계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꿈속 세계에 대한 글쓰기는 논리적인 언어화 작업과 달리, 당시의 비논리적인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소환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꿈속 세계는 이지현의 작업에서의 원천이며 그것에 대한 글쓰기는 그녀의 작업을 이끄는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이러한 꿈속 세계의 기록, 즉 언어화 작업은 페인팅과 영상이라는 시각화 작업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평면 페인팅은 꿈속 세계에 등장했던 장면들을 파편적으로 배치해서 그리는 ‘이미지의 콜라주’라는 조형 방식을 실천한다. 꿈속 세계는 내러티브의 왜곡, 비약, 극대화가 펼쳐지는 만큼, 이미지는 주요한 장면들의 콜라주의 연속으로 표현되고, 넓은 색면과 형상들이 교차하는 풍경을 형성한다. 아울러 물감이 완전히 건조되기 전에 연필을 사용하여 꿈을 기록했던 텍스트를 옮겨 적기도 하고, 당시의 꿈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표현을 적어 넣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미지에 덧입히는 ‘이차적인 쓰기’의 방식은 ‘시각적 글쓰기’가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콜라주 이미지를 번안하는 시각적 글쓰기’라 할 것이다. 
보라! 그녀의 작품에는 콜라주 이미지와 같은 시각적 글쓰기가 도처에 있다. 그것은 마치 이미지와 텍스트와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이코노텍스트(iconotext)의 유형과 같은 것이다. 현대 서예, 현대 미술과 오늘날 광고 등에서 무차별적으로 발견되는 이와 같은 양상은 꿈의 세계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꿈속 세계’란 이미지와 텍스트가 뒤섞이고, 비현실적인 내러티브가 콜라주처럼 편집된 파편적 이미지들이 부유하는 곳이 아니던가? 
1980년대 이론가 네를릭(Michael Nerlich)이 이코노텍스트라는 용어를 고안하면서 도상(icon)과 텍스트(text)가 결합한 초기 유형의 ‘이미지, 텍스트 결합체’를 연구했던 것처럼, 작가 이지현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이코노텍스트의 유형은 몇몇 작품에서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프레임의 경계 위 텍스트와 같은 유형으로 분리된 채 나타난다. 소외된 주체적 자아를 보잘 것 없는 자그마한 방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 〈토끼의 방〉(2017)에서,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나의 처절한 삶을 인지하고, 인정하기에는 내 삶의 모든 나날들이 아까웠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대화하고 있는 이 작품에는 소외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또 다른 작품 〈혼혈인 남자의 제사〉(2017)에서도 이코노텍스트의 초기적 유형이 드러난다. 이 작품은 그녀의 꿈에 대한 텍스트적 기록 작업인 ‘인지하는 순간, 모든 것이 느껴졌다’에 나오는 하나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사람들이 한 혼혈인 남자에 대한 상례(喪禮)를 치르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작품의 프레임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다: “나는, 절망적인 나는, 그 짧은 시간에 그들이 내게 감추려 한 것을 보았다.” 사건과 진실에 대한 은폐와 그것에 따른 꿈속 화자(話者)의 갈등이 엿보이는 이러한 텍스트적 진술은 이미지와 맞물려 관객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작가 이지현의 ‘이미지 콜라주’와 ‘시각적 글쓰기’가 통합된 이코노텍스트의 유형은 일련의 서술형 제목을 달고 있는 다음 작품들에서 극대화된다: 〈그리 놀랍다거나, 의외라거나,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2018),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이제는 웃기지도 않았다〉(2018), 〈그 모습이 퍽 미련했다〉(2017), 〈희극을 가장한 비극이 눈을 떴다〉(2018). 이러한 작품들은 빨강, 노랑과 같은 난색면과 파랑, 초록과 같은 한색면이 큼직하게 콜라주처럼 맞물려 보색의 화면을 만들고 있는데, 그 위에는 온전히 읽을 수 없는 시각적 텍스트들이 얹혀 있다. 작가 이지현이 글자 크기가 제각각인 난필의 필기체로 굵고 가는 글자체를 교차시키거나, 텍스트의 어절을 분절시키는 방식으로 마치 그림처럼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이지현의 회화 작품 속에는 사람의 형상, 별, 오징어처럼 특정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도 있지만, 술병 혹은 약병, 유령 혹은 장난감 등 특정하기 애매한 가운데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결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메타포이자 상징 이미지로 풀이되는 것들이다. 한편, 회화 속 텍스트는 이미지를 부연 설명하면서 이미지를 고정하거나 중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시각적 글쓰기’의 방식으로 인해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한 덩어리로 맞물려 이코노텍스트처럼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퍽 미련했다.│이지현│2017.12│single channel video│00:08:00│

vimeo링크 : https://vimeo.com/276827499





III. 인간관계 속 잉여의 주체, 잉여의 세계 
‘꿈속 세계’에 잠입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서 현재의 꿈속까지를 탐구하는 작가 이지현은 자신의 작업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다음처럼 말한다: “이러한 표현 행위는 개인이 현실 세계에서 충족하지 못한 비윤리적 욕망을 꿈속 세계를 통해 깨닫고, 꿈속 세계의 비극의 끝에서 오는 희열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현실에서 충족할 수 없는 개인의 사회적 욕망을 ‘꿈속 세계’라는 허상을 통해 충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보존의 방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며 나와 꿈속 세계와의 관계를 해체하여 서로를 파편화시킬 뿐이다.” 
그렇다. 현실에서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은, 꿈속 세계라는 허상 속에서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한 의미의 ‘충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꿈속에선 비극조차 희열을 안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눌린 현실로부터 탈주하면서 찾은 허구 속 피난처일 따름이다. ‘꿈속 세계에서 가능했던 상생의 관계’는 현실에서는 해체되고 파편화될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꿈속 세계에 대한 천착이 작업에 대한 딜레마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꿈속 세계라는 공간은 미술 창작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그녀가 현실 속 욕망을 대리할 수 있는 훌륭한 미술적 공간이 된다. 다만 현실을 탈주하는 세계관을 가상의 회화 속에서 구현하는 이지현의 작업 방식이 초현실주의의 언어 방식을 현대적으로 변주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조형 언어의 방식이 나올 것이 다 나와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기 힘든 21세기 현대 미술의 장에서 20세기 미술의 조형 방식을 계승하는 회화의 공간은 그녀의 작업 세계를 창의적으로 펼쳐 보이기에 매우 비좁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회화의 공간을 벗어나는 작가 이지현의 두 편의 영상 작업은 매력적이다. 회화와 영화를 한데 얽고 현실과 꿈속 세계를 통합하는 독특한 영화적 문법을 통해, 표현주의 혹은 초현실주의의 뿌리가 여전하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회화가 현실을 탈주하는 공간으로 상정된 가상의 공간이었다면, 그녀의 영상 작업은 ‘현실 속 꿈의 세계’ 혹은 ‘꿈속 현실의 세계’를 교차시키는 ‘현실/가상’의 통섭적 공간을 성취한다. 그녀의 회화가 ‘현실 속 인간관계를 해체하는 꿈속 세계’에서의 상상 놀이에 골몰했다면, 그녀의 영상 작업은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현실 속 인간관계를 변주하고 재구축한다.  
동명의 회화를 영상으로 다시 만든 작품 〈그 모습이 퍽 미련했다〉(2017)에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인물이 종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 박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비춘다. 자신의 은신처인 미술의 공간 안으로 잠입하는 작가의 초상 뒤에는 타자가 뒤따른다. 꿈에 대한 글쓰기 작업인 ‘그 모습이 퍽 미련했다’에 등장하는 ‘흑백의 남자’이다. 내던져지는 운동화, 방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눕는 ‘흑백의 남자’. 대화가 이어진다. “저것들은 뭐야?(여)/ 비가 올 것 같아(남)/ 어디에서 가져왔어?(여)/ 네가 좋아(남)/ 왜 가져온 거야?(여)/ ...(남)/ 대답하기 싫어?(여)/ 아니(남).” 이러한 해갈되지 않는 소통과 초현실주의적 대화는 이어진다. 창문을 연 ‘흑백의 남자’를 보며 여자가 “창문 닫아줘”라고 말할 때, 남자는 답한다. “콘돔이 먹고 싶어서 그럴 수 없어.” 장면이 전환되어 어두운 화면 속에서 여자가 “도와줘, 아무 것도 안 보여”라고 외칠 때 남자가 답한다. “사탕이 먹고 싶어. 그치?” 의존적인 여자에게 ‘흑백의 남자’는 위로가 되질 못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뒤에도 펼쳐진다. 여자가 야외에 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그 위에 노란색 동그라미 바탕에 빨간 역삼각형이 그려진 작은 그림을 찾아 붙인다. 그것은 ‘흑백의 남자’를 은유하는 이미지이다. 다시 그것을 뜯어내고 다른 그림을 붙인다. 그 또 다른 그림은 글쓰기 작업에서 표현되었던 연모의 대상인 ‘아저씨’를 은유하는 이미지이다. 그 그림에는 3명의 여자가 손을 잡고 있다. 클로즈업되는 그림. 세 명의 여자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세 명의 여자는 ‘아저씨’의 옆에 있는 한 여자의 분신들이다. 이 분신들을 질투로 응시하는 여자, 이윽고 동영상은 끝난다. 이 작품에서는, 의지의 대상과 욕망의 대상, 연모하는 대상을 가로채는 타자와 같은 관계 지형이 마치 초현실주의 풍경처럼 펼쳐진다.   
여기 또 다른 영상 작품이 있다. 작품 〈희극을 가장한 비극이 눈을 떴다〉(2018)에는 침대에서 허겁지겁 콘돔을 찾는 알몸의 남자가 등장한다. 여자의 신음 소리, 이윽고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는 대화를 시작한다. “꽃이 핀 거 같아(남)/ 무슨 소리야?(여)/ 어제, 그 애가 나한테 화분을 주더라고(남) / 그랬구나. 그런데 벌써 꽃이 폈어?(여)/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남)/ 그래? 이상하네(여)/ 나도 그렇게 생각해(남).” 대화는 등장인물 사이에서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관객은 초현실주의적 대화를 이어가는 영상 속에서 변모되는 인간관계를 발견한다. 장면은 이어진다. 팔찌를 낀 여자와 남자의 애무하는 손, 팔찌가 없는 여자의 손이 시도하는 애무, 남자의 거절, 화장실 문을 여는 여자와 그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여자, 여자의 목을 조르는 남자, 쓰러지는 여자. 장면이 바뀌어 남자에게 술을 먹자고 전화를 하는 여자, 마지못해 답변하는 남자. 또 다른 장면에서는 팔찌를 낀 여자가 등장해서 봉투를 건넨다. 그 봉투 안에는 노란색 그림이 가득하다. 남자의 편지를 대신 전하는 것일까? 팔찌 낀 여자가 분명한 것 같은 여자의 비웃음. 마지막 장면은 남녀의 관계에서의 파국을 드러낸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여자, 다가가 남자를 만지려는 여자, 거부하는 남자, 다시 남자로부터 떠나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발걸음으로 동영상은 끝난다. 
관객은 영상을 통해서 남녀 관계 속에서 파국이 도래시킨 남은 이야기들, 즉 작가가 동영상에 함유하지 않은 잉여(剩餘)의 세계를 상상한다. 작가의 작업 속 말없음표 안에, 관객의 마음속에 남은 언어화하기 어려운 감정 속에 이러한 잉여의 세계는 천천히 자리를 잡는다.  

​희극을 가장한 비극이 눈을 떴다.│이지현│2018.6│single channel video│00:07:21│

vimeo링크 :https://vimeo.com/276828236



IV. 본연의 주체를 찾아서 
원론적으로 잉여의 세계는 제도, 규칙, 윤리가 요구되는 현실계에서 잔여물, 부산물, 찌꺼기와 같은 본체(本體)로부터 배제된 것들 혹은 버려진 것들이 만드는 세계이다. 반면에 꿈속 세계와 같은 비현실, 초현실의 세계에서 그것은 관계의 항들을 모두 제거해서 알맹이만 남긴 진정한 본체가 된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잉여의 세계는 현실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의 항들로부터 제거된 본유의 주체가 만드는 세계이다. 생각해 보라. 누구의 딸, 누나, 동생, 학생, 동료, 애인과 같은 인간관계로 얽힌 주체는 허상이다. 작가 이지현에게도, 관계로 얽힌 주체를 모두 제거한 ‘여자’, ‘화가’와 같은 위상이 잉여적 주체이자 본연의 주체라 할 것이다. 
현실 속에서도 본연의 주체가 만드는 잉여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 Deleuze)가 논증하는 잠재태(virtualité)로서의 세계와도 흡사하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채 잠자는 상태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마치 주름이 접혀 보이지 않는 커텐의 뒷면처럼 말이다. 그것은 들뢰즈에게서 철학적 메타포인 '알(l'œuf)'과 같은 것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타자와 외적 관계를 맺기 이전의 원주체이자, 머리, 팔다리와 같은 기관들로 분화되지 않은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 내적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존재하는 전일적 생명체로서의 주체이다. 우리의 논의 식으로 말해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거나, ‘탈관계화’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꿈속 세계를 소환하거나 현실과 꿈속 세계를 교차시키는 작가 이지현의 작품 세계에서 잉여적 주체, 잉여적 세계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 표현주의와 같은 20세기 미술사의 영향 속에서 맺어진 수다한 관계 지평을 제거하고 남는 작가 이지현만의 독자적인 세계일 것이다. 이제 미술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진 작가의 길에 들어선 작가에게 당신만의 잉여적 세계를 찾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 몫은 작가가 긴 호흡으로 스스로 찾아갈 몫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깊이 천착하고 있던, ‘타성적인 자기 원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작업의 세계로 성큼 들어선 만큼,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 나갈 때, ‘자신 안에 잠재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결과물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회화와 연동하고 있는 영상 작업은 이러한 남겨진 관건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의미한 단초가 되고 있다. ●

출전 /
김성호, 「내 안에 잠재된 잉여의 세계」,  『경주작가릴레이전: 이지현』, 경주문화재단, 카탈로그, 2019,
《2019 경주작가릴레이전 : 이지현》(2019. 4. 23 ~ 6. 23, 경주예술의전당, 갤러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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