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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 위의 여성

이선영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 위의 여성

  

이선영(미술평론가)

  

페미니즘은 ‘XX 이즘’이라고 붙여진 것 중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 중 하나이다. 조금 큰 책방에 가면 페미니즘 관련 책만 따로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평생의 업으로 삼는 진지한 연구자들도 많다. 일단 여성 문제를 떠나서 연구할 것이 너무 많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생물학부터 신학까지 페미니즘이 걸쳐 있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근대에 확립된 분과 학문을 거슬러 올라가 총체성을 요구하는 최후의 학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술 또한 총체적이다.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이 인생 전체에 걸쳐 있겠는가. 그래서 페미니즘+예술은 어떤 ‘이즘’과 예술의 조합보다도 잘 어울린다. 물론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러한 인지도를 가지는 사상/예술도 그리 많지 않다. 사회변화에 따라 새로이 만들어지는 학문들에 비한다면 고색창연한 느낌을 줄 정도로...그러나 여성이 한 개인으로서의 자율성이 아니라 남성에 속해 있으면서 투표권조차도 갖지 못한 시대가 아주 멀리 있지는 않다. 


여성이 ‘인간’--가령 history의 주체인 human-- 취급을 받은 적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아직도 젊은 학문이며, 그것이 진지하게 다루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산적해 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정전(canon)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흐름을 부각하는 작업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숨겨진 여성 작가가 발굴되고 조명되기도 한다. 굳이 남녀를 구별하지 않아도 될만한 충만한 문예사조사가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훌륭한 이론의 보다 많은 계몽으로 산적한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인가. 페미니즘의 계보도는 엄청나게 복잡한 그물망을 이루곤 한다. 물론 ‘회색빛’ 이론에 대한 회의를 페미니즘에 국한 시키는 것도 이데올로기적 공세다. 페미니즘만 이상주의적인가? 그렇지만 나는 페미니즘에 관한 한, 최후의 구원이 될 만한 이론적 동아줄이 아니라, 실천과 설득력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그 점에서 예술 분야는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마리니콜 베스티에, [작업중인 화가], 1791년



프랑스 쪽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한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의 분야는 이러한 전략에 매우 적합하다. 얼마 전 노벨평화상을 받은 작가 나디아 무라드의 책 [the last girl]는 IS의 성노예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자기 이야기를 담아 수많은 모순이 중층적으로 쌓인 여성의 한계상황이 폭로되기도 했다. 그 자서전은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넘어선 울림을 가지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디아 무라드의 충격 고백 중에서, 매일 밤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성적 유린이 이루어지기 전에 장황한 종교적 설교가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버지의 법’에 새겨져 있는 상징계의 최고 기표인 팔루스는 기괴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나디아 무라드의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여성/저자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은 페미니즘 문예사조사의 중요한 과업이다. 우선 비평도 글쓰기지만, 페미니즘 지향의 미술 또한 결국은 가부장제를 비롯한 지배적 문화에 대한 비평적 태도이기 때문에 작품과 이론 양자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말보다 글에 비중을 두는 해체주의 철학 또한 주체의 강한 현존을 표현하는 말보다는 차이와 연기의 무대를 강조한다. 자크 데리다에 의하면 말중심주의(Logocentrism)는 형이상학적이다. 여기에서 말은 이성이고 논리이다. 예술과 비평은 과학이나 철학에 비교해서 확신에 찬 주체의 주장보다는 차연(Différance)에 더 가깝다. 그것은 독백의 변주인 단언 보다는 대화적 상상력과 다성적 울림을 중시한다. 그러한 풍부함과 미묘함은 특정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전략과는 상충될 수 있다. 가령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그러나 그 가치 자체의 패권성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말이 실행되는 공적 무대에 서는 기회에 있어서 여성은 오랜 세월 동안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해왔다. 일찍이 니체가 주장했으며, 현대의 니체주의자들이 반복하듯이 이해관계가 갈리는 첨예한 삶의 투쟁 속에서 결코 중립적인 의미의 이성이나 합리성이란 없다. 


A의 합리주의나 이성은 B의 비합리주의나 야만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은 합리성과 이성을 가장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집단적 해결책을 이성과 합리성의 편에 선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주어이자 문제적 개념인 여성은 있는가/없는가, 또는 있어야 하는가/없어야 하는가. 잠정적인 대답은 문제가 사라질 때까지만 여성, 또는 페미니즘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나타나 있듯이 예술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소외된 노동자가 사라질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단결해야 하며, 계급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논리가 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는 변형된 자본주의로,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여성의 지위 향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정엽, 이불을 꿰메며,.stitching the sheet, 1988, woodcut, 40 x 55 cm (사진제공; 정정엽)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은 1980년대 진보적 문화 운동에서 탄생했지만, 결국은 여성주의가 딴살림을 차린 역사적인 예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또한 다른 예술적 비평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에서 늘 상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의식/무의식, 상징계/상상계 또는 실재계, 형식/질료, 문화/자연, 본질/현상, 이성/광기, 과학/예술, 코드/탈코드, 유기체/기관 없는 신체, 하나 또는 두 개의 성/다형적 성, 수목/뿌리줄기의 모델 등등. 이 두 가지 계열의 쌍은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사고의 계보에 선명하다. 대개 어느 한쪽은 선택한 후 나머지도 보충되어야 한다는 식의 절충적 해결책은 이항대립의 진정한 해소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적당히 봉합된 사고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까지 담론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반복은 차이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든 비평이든 이론이라는 씨앗을 꽃피울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이다. 


그 예술작품에서 새로운 씨앗도 거두어진다.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한 많은 것이 (특히 기술의 진보에 의해) 해결되었다. 재생산에 관련된 여성의 권리에 미친 피임이나 낙태에 관련된 기술 및 법률 장치의 재편이 가지는 힘은 매우 크다. 그것은 페미니즘 외에 임금 노동자로 진출한 여성들의 힘이 밑받침이 되었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을 넘어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한(누군가는 쫒겨난) 여성은 투표권자 및 소비자이므로 굳이 이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장 적나라한 성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장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소비자의 성을 굳이 묻지 않는다. 구매력을 문제 삼을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소비자로 해방시켰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남/여의 정체성 형성에 악영향을 주어왔던 대중문화조차도 요즘은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지향을 가지는 여성이 부각되는 긍정적 흐름이 있다. 요즘 인기가 있다는 영화 [알라딘]에서 바보 같은 왕자의 아내가 되기 보다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자스민 공주가 그 예다.


그것은 개인적 의지 외에 구조적인 변화라는 것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세계 시장화를 통해 촘촘히 계층화된 노동시장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순차적으로 전가시킨다. 출산 및 육아에 있어서 거의 자연에 묶여 있다시피 이전 시대를 뒤로 하고 이제는 가족의 재생산이 개인의 선택지가 된 시대, 그래서 사회가 재생산될 것이지를 이제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사회적 처방은 더욱 중요시되었다. 어떤 최첨단의 시대가 도래한다 할지라도 남성/여성의 문제는 여전한 문젯거리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페미니즘이 아니래도, XX이즘과 현실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있을 수 있다. 지식정보 사회가 도래했지만 대학 및 학문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말과 사물은 거리가 있다는 사실(또는 가설)과 담론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또는 가설)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린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즘을 자동적으로 자기화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페미니즘에 국한되어’ 자기 작품이 다뤄지는 것을 주저하는 여성 작가들이 그렇다. 사실 페미니즘처럼 광대한 지평을 가지는 사상도 없는데 말이다. 남성 작가들의 경우에도 ‘자기 코도 석자’라는 생각에 페미니즘은 타자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렇지 않은 남성 작가는 오지랖이 넓거나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전략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물론 주체 또한 타자로 구성되었다는 새로운 철학 또는 심리학은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남성들을 더욱 세련되어 보이게 할 것이다. 계층화된 사회이다 보니 여성문제라고 동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기득권의 가진 여성 중에는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패권적 의식으로 가득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배적 게임의 원칙을 자기화해서 소위 말하는 '승리자'의 대열에 낀 이들 중에는 권력에 대한 강박적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부류도 있다. 그들이 차지한 지점들은 여성의 지위 향상에 매우 중요하지만, 지배적 권력의 해바라기 같은 지향을 가진 이에게 ‘자매애’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해방이 누군가의 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은 거짓 승리다. 보편성을 가진 듯했지만 결국은 아전인수적인 담론/권력은 결국 시간의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 가뜩이나 이전 시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이 저질러놓은 더러운 유산이 남아있는데, ‘미투’를 비롯하여 당연히 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적 문제에 대해 젊은 남성들이 피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사회적 약자는 남성 여성을 떠나서 억압받는다. 소수의 문제는 언젠가는 다수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가장 머릿수가 많은 소수자의 입장에 있는 여성의 문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보편적인 문제다. 여성노동자나 여성예술가가 처했던 어려움을 똑같이 당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소수와 다수의 격차를 더욱 늘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한때 여성에만 해당되었던 문제도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들과의 이론적 실천적 연대는 결코 생뚱맞은 것이 아니다. 


여성보다는 인간이라는 더 보편적인 범주가 있지만, 페미니즘은 인본주의에서 말하는 인간 자체가 남성으로 대표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강한 주체 개념에 기반한 근대 사상을 상대화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방향에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늬만의 다원주의가 아니라 진짜 다원주의여야 한다. 기존의 항목 중에 하나 더 첨가하는 ‘이것도’ 가 아니라, ‘이것은’ 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두 가지 전략은 함께 구사해야 한다. ‘여성’,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우는 영역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거시적인 지평을 가진다. 기술적, 법적 해결책을 요구해야 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동시에 페미니즘은 ‘여성적 글쓰기’와 같은 미시적 전략을 함께 구사해야 한다. 모든 도전적 세력이 그렇듯이, 소위 말하는 ‘권력을 잡은 다음’, 즉 원하는 평등을 이루어낸 다음, 그것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것은 늘 상 해왔던 미시적 전략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출전; 한국페미니즘 미술 담론/실천의 확장, 라운드 테이블 (예술경영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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