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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진/ 도시, 추상적인 패턴 속으로 흩어지는 주체

고충환

윤유진/ 도시, 추상적인 패턴 속으로 흩어지는 주체 


전작에서 유추해본 것이지만, 작가의 작업의 바탕에는 도회적인 감수성과 팝적인 감성이 흐르고 있다. 어쩜 이 두 감성은 그 성분이나 결이 서로 부합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현란한 원색대비가 그렇고, 각종 문자와 기호가 그렇고, 추상적인 패턴이 그렇다. 어쩜 도시를 부유하는 메시지와 현란한 불빛들, 그리고 유혹하는 광고들 사이로 공허한 사람들을 그린 것일 터이다. 소위 도시회화로 범주화할 만한, 도시의 전형적인 국면에 해당하는 성질이며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요소들 중 상당부분이, 특히 현란한 원색대비와 추상적인 패턴이 이후 그림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 근작의 형식적 특징을 이루는데, 전작에 비해 상당할 정도로 양식화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도시적 감수성이 지배적인 정조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양식화된 도시, 추상도시, 퍼즐조각에서처럼 자잘한 조각들로 파편화된 도시로 도시가, 도시의 정조가, 도시의 이미지가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외적으로 볼 때 사뭇 혹은 많이 다르지만, 크게는 근작을 예비하고 있는 배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Interaction. 상호작용.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붙인 주제다. 상호작용은 관계개념이며, 관계가 성립하려면 이것과 저것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주체와 타자,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인식, 감각적 실재와 회화적 사실 등등. 작가의 그림에선 이런 관계개념의 형식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다. 관계개념의 두 축 아님 다중적인 축이 날실과 씨실이 돼 직조되는 중첩구조 혹은 다중복합적인 구조를 하고 있어서 외관상 그 의미론적 실체가 잘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결국 작가의 그림을 해석하는 일은 이처럼 직조된 날실과 씨실을 풀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 그림의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잠재적인 형태와 경우로서 그림의 이면에 은폐되어져 있으면서 독특한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 사람은 없다. 도시에선 주체도 타자도 익명화된다. 사물화 된 도시 속에서 길을 잃은 주체, 흔들리는 주체, 번민하는 주체, 그리고 종래에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 흩어진 주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돼 있는 것이며, 항상적으로 전제돼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화면 속에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도시를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화면 속에 숨은 눈에 비친 도시를 그린 것인데, 그렇담 작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도시를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 그의 도시감정은 어떤가. 작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치자면 이중구조를 들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을 처음 보면 다만 추상적인 패턴이 눈에 들어올 뿐, 도시는 보이지가 않는다. 추상적인 패턴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그림인가. 도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잘 보면 추상적인 패턴 사이사이로 실루엣 같은 형상이 보인다. 도시다. 추상적 패턴에 가려 파편화된 도시다. 자잘한 패턴으로 조각난 도시 이미지가 보는 이의 의식 속에서 처음 상태를 재구성하고 복원하고 추상해보도록 종용한다. 아마도 도시를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추상적인 패턴으로 덮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재구성된 도시 이미지를 사진을 참조해 그렸다. 대개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지만, 더러 차용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앨범에서 찾아낸 개인사적인 사진과 같은.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화면 속엔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일상적인 거리 풍경이며 정경과 함께, 개인사적인 여정에 해당하는 자료들, 과거와 현재를 증언해주는 이미지가 마치 존재의 아카이브, 도시의 아카이브처럼 그려져 있다. 비록 사사로운 삶의 주변머리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개인사에 한정된다기보다는 보편적 공감을 얻는 소재들이고 정경들이다.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모두 도시인이다. 그 삶의 정경이며 생활감정에 전형적인 국면이 없지 않다. 그런 만큼 작가는 어쩜 개인사를 그리면서 동시에 현대인(사실은 현대도시)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도시 이미지는 비록 실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실사 이미지를 간략하게 양식화한, 사물대상 혹은 피사체를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 축약 표현한, 그리고 여기에 대개는 모노톤의 단색조 화면으로 처리된 그림이다. 그런 탓에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이고, 때론 판화에 의한 프린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무미건조한 그리고 중성적인(아님 차라리 비정한?) 도시감정을 그린 것일 터이다. 이런 도시의 정경이며 감정은 그러나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데,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추상적인 패턴 때문이다. 그렇게 추상적 패턴 사이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도시는 그 실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오리무중의 경우로 보이고, 추상적인 기호처럼 읽히고, 추상적인 패턴의 또 다른 일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애써 그린 도시 이미지를 추상적인 패턴으로 덮어서 가리는가. 이런 이중구조(아님 차라리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이데거는 예술의 작동방식을 은폐와 비은폐의 투쟁으로 설명한다. 예술은 드러내기와 숨기기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뭘 드러내고 숨기는가. 왜 드러내고 숨기는가. 아마도 무미건조한, 중성적인, 비루한, 비정한, 불안정한, 불안한 도시감정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숨기면서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바로 암시다. 암시를 통해서 말하는 화술이고 화법이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도시, 무슨 퍼즐게임에서처럼 파편화되고 조각난 도시 이미지는 바로 이런 도시인의 징후를 반영하고 현대인의 증상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억이 매개된다. 흐릿한 도시, 애매한 도시,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 도시,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가 않는 도시, 차라리 추상도시의 이면에는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도시 이미지(그리고 도시감정)는 불완전한 기억, 실재를 각색하는 기억, 현재에 재구성되는 기억, 때에 따라선 잊고 싶은 기억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정서 혹은 성질이기도 하다.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이며, 때론 욕망으로 왜곡된 기억의 생리(기억은 욕망이다)를 도시감정에 투사해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표면과 이면, 추상과 형상, 추상적인 패턴과 도시 이미지가 다른 이중구조를 하고 있지만, 때로 도시 이미지가 추상적인 패턴 위로 불려나오기도 한다. 다리를 아래서 올려다 본 철골구조의 트러스트, 다리 혹은 기중기, 타워크레인과 같은, 그 자체 기하학적인 구조를 하고 있어서 또 다른 기하구조인 추상적인 패턴의 일부처럼 보이는 소재들이다. 아마도 작가가 발견한 또 다른 도시의 전형으로, 도시감정을 형성시켜주는 또 다른 도시의 표상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도시감정에는 기하학적 구조며 형태 역시 유의미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을 뒤덮고 있는 추상적인 패턴은 다만 그 자체 형식논리로만 보기보다는 그림의 이면에서 발원한 도시감정이 반영되고 투사된 경우, 도시감정이 표면으로까지 확장된 경우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추상적인 패턴을 위해 시트지(접착테이프)가 동원되고 있는 점이다. 그 대략을 보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각형의 격자구조며 삼각형의 추상 패턴을 만들고, 패턴 그대로 커팅기를 이용해 커팅을 한다. 그리고 커팅 된 패턴을 화면에 붙인 다음 떼어내고, 그렇게 떼어낸 면을 나이프를 이용해 물감으로 메운다. 그리고 물감이 일정정도 굳으면 재차 물감을 올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패턴을 붙였다 도로 떼어낸 자국이 흔적으로 남겨지고, 물감을 발라올린 면은 면대로 미세하지만 저부조 형식으로 화면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그렇게 이면에 얇게 그려진 도시 이미지와 추상패턴으로 나타난 평면적인 화면을 회화적인 물성으로 강조하거나 상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작업과정을 기록한 영상물이며, 과정에서 생산된 오브제들, 이를테면 화면에 붙였다 도로 떼어낸 시트지 조각 같은 부유물을 이용한 설치작업으로 작업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다. 도시감정, 그러므로 어쩜 양가감정을 형식실험하고 있는 경우로 보이고, 회화를 넘어 영상과 설치를 매개로 한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형식실험을 확대하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여기서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과 관련해 볼 때 도시감정을 양가감정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고 또한 의미가 있다. 도시는 정체성을 형성시키면서, 동시에 정체성 형성 혹은 정립을 방해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추상적인 패턴과 파편화된 도시 이미지가 중첩된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패턴은 어쩜 파편화된 도시 이미지 속에 숨은 주체, 흔들리는 주체, 부유하는 주체, 희미한 주체, 그 실체감이 희박한 주체를 정립하기 위해 도입된 자의식의 표상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기하학은 수학을 상징하고 이성을 상징하고 질서를 상징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이로써 자기 내면에 일종의 유사질서의 성채를 축조하기 위해 도입된 작가의식의 표상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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