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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지젤박 /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 - 결/겹의 자연 추상

김성호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 - 결/겹의 자연 추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화가 지젤박의 근작전에는 수평으로 나누어진, 좁거나 넓은 색면의 추상으로 가득하다. 거친 표면의 질감을 가진 그것은 때로는 명도와 채도가 높거나 낮은 색면이 대비를 이루거나 때로는 중간색조의 색면이 부유한다. 색면 사이의 뚜렷하거나 흐릿한 경계선! 이 색면 추상이 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의 재현 혹은 심상의 표현? 그녀의 작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젤박_From a Distance 20-6_80x80cm_acrylic on canvas_2020



2. 유토피안 네이처 - 현실/비현실의 접점 
각박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에게 자연은 ‘인간이 떠나온 시원(始原)의 고향’으로 간주되면서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는 거시계로 회자되곤 한다. 자연은 종종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근원적 모태로 간주되거나 태초의 신화 세계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생로병사의 ‘인간 육체’를 성찰하면서 자연을 현실로 간주하면서도, ‘인간 정신’이 영원히 거주할 극락정토, 무릉도원과 같은 낙원(Paradise), 즉 비현실의 유토피아(Utopia)로 빗대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유토피아는 “현실적으로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라톤(Platon)의 이데아를 향한 염원, 루소(J. J. Rousseau)의 근원적 자연 상태에 대한 갈망 등은 ‘현실계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위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유토피아는 확증할 수 없는 ‘공상의 공간’이면서도 언제나 현실의 대척점에 자리하기보다는 ‘현실의 시공간적 연속선상’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송(宋)나라 시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면서 물아의 구별 없음과 현실과 비현실의 탈경계를 경험하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속 호접지몽(蝴蝶之夢)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1989년 인간이 무수한 사물과 동물로 변모를 거듭하는 제론 레니어(J. Lanier)의 가상현실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두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혹은 가상)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를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현실의 시공간적 연속선상’에서 성찰하듯이, 자연 또한 이러한 ‘현실의 연속선상’에서 그려진다. ‘인공으로 오염된 지구 내 자연’과 ‘신화의 세계를 품은 태초의 자연’ 사이에서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젤박의 회화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여기, 지금'이라는 ‘현실’의 지평에서 사각의 프레임이라는 ‘가상’의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자연이라는 ‘현실/비현실’ 또는 ‘현실/가상’의 세계라고 평할 수 있겠다. 즉 그녀의 작품에서 자연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안 네이처(Utopian nature)로 호명되는 존재이다. 지젤박의 작품에서 유토피안 네이처는 캔버스 위에 얹은 넓은 색면과 더불어 캔버스 표면 위에 요철의 거친 질료를 함께 선보이거나 색면과 색면 사이의 경계층을 공유하면서 가시화된다. 
지젤박의 유토피안 네이처는 현실/비현실의 연속선을 강화한다. 생각해 보자. 지젤박의 작품에서, 색면이 ‘비현실/비물질/가상’의 세계를 비유한다면, 색면 위에 드러누운 요철은 ‘현실, 물질, 실재’의 세계를 은유한다. 색면과 그 사이의 좁은 간격의 층이 ‘공간 혹은 수평적 세계’의 분할과 이어짐을 의미한다면, 외피의 색면과 밑층의 색면이 상호 침투하는 층은 ‘시간 혹은 수직적 세계’의 분절과 뒤섞임을 의미한다. 언어 사용에 빗대어 말해 횡적인 전자를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실천’이라고 한다면, 종적인 후자를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실천’이라고 해설할 수 있겠다. 이처럼 ‘공간/시간, 수평/수직, 공시/통시’를 한데 아우르는 지젤박의 회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속에서 드넓게 펼쳐진다. 
한편, 지젤박이 구사하는 현실/비현실의 접점은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장편 소설 제목으로부터 기인하는 낙원의 이편(the side)과 ‘낙원의 저편(the other side)’ 사이에 자리한 접점의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낙원의 저편’은 낙원이 실현된(되는) 공간이다. 천국, 극락정토, 무릉도원, 유토피아의 공간이다. 반면 ‘낙원의 이편’은 비현실의 낙원을 꿈꾸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좌초(坐礁)하는 중도(中途)의 세계이다. 이곳은 불교에서 생사의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지칭되는 이 땅의 현실계, 즉 차안(此岸)이자, 사바세계(娑婆世界)이다. 그런 면에서 지젤발의 작업은 현실계라는 ‘낙원의 이편’에서 이상계인 ‘낙원의 저편’을 바라보면서 작동시키는 ‘답 없는 질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현실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無用)한 유토피안 세계’를 아름답다는 이유로 부여잡고 있는 ‘무모한 예술 행위’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지를 날마다 고민하는 ‘가슴 아련한 무엇’이다. 


지젤박_From a Distance 20-13_50x50cm_acrylic on canvas_2020



3.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 - 마음을 담은 추상 자연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 제명은 ‘멀리서’라는 뜻의 〈From a Distance〉이다. 이 말은 종종 ‘거리를 두고 보면, 마음으로’와 같은 말들로 의역되곤 한다. 이렇듯 지젤박의 ‘유토피안 랜드스케이프’는 유토피아로 대별되는 자연을 멀리서 살펴보고 마음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작품은 가히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Utopian Mindscape)’라 할 만하다. 
비현실의 유토피아를 멀리서 바라보지만, 그것이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현실 속 작가 지젤박의 내면에서 생성되는 마음의 작동은 주요하다. 작가의 발언을 보자: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은 근본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공기의 흐름, 햇빛의 톤, 변화하는 하늘과 자연의 색은 자연과 교감하며 살고 싶은 본인에게 설렘과 환희, 고독과 슬픔, 애틋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사색과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그런데 유토피아를 대면하는 설렘과 환희와 같은 포지티브 감정 외에 고독과 슬픔, 애틋함과 같은 네거티브 감정은 무엇인가? 또 다른 작가 노트에서 지젤박은 자신의 작업이 “설렘이나 환희, 슬픔이나 그리움, 고독과 소외 같은 내적 세계의 표현”임을 명확히 한다. 유토피아를 그리는 작업 속 긍정의 감정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부정의 감정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부정의 감정은 마치 소설가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용어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를 상기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젤박이 그리는 유토피아라는 것이 디스토피아가 합체된 유스토피아(Ustopia)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유스토피아는 주지하듯이, 현실계의 모습이기보다 ‘마음 상태(a state of mind)’의 것으로 문학이나 예술의 장에서 상상으로 그려지는 세계이다. 
지극히 암울하고 비극적인 상상계는 언제나 이상계 옆에서 자란다. 아니 양자가 서로 뒤섞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판별하기도 전에 우리 앞에 드넓게 펼쳐진다. 우리는 현실에서 잡히지 않는 유토피아를 자주 극락정토와 같은 포지티브 세계와 동일시하지만, 그것은 ‘현실 속 자연’이라는 포지티브/네거티브 세계와 자주 연동한다. 기쁨 너머의 슬픔, 즐거움 너머의 괴로움과 같은 네거티브는 그렇게 이해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젤박의 전시는 ‘현실화가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예술’을 통해서 현실/비현실의 접점에서 포지티브뿐 아니라 네거티브와 같은 ‘인간의 다양한 마음’으로 읽는 세계라 하겠다. 
작품을 보자. 수평으로 나누어진 좁거나 넓은 색면 추상은 어떻게 보면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머금은 하늘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항공사진이 포착한 푸르른 농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 그것은 호수와 대지를 끼고 있는 드넓은 정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모습은 대개 드넓게 펼쳐진 자연의 본질적 형상을 유추하게 만든다. 자잘한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의 형상과 같은 미시적 자연이 커다란 자연의 풍경으로 대별되는 거시적 자연 안으로 스며든 상태의 ‘관념적 풍경’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자연의 정수를 품은 추상화’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작가는 다음처럼 말한다: “본인의 자연은 감정을 가진 교감하는 유기체이며, 감수성으로 추상화된 자연이다. 가만히 자연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 구체적인 형상은 점차 풀어지고 색과 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얼룩이 되고 정지된 화면처럼 다가온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없어지고 자연이 뿜어내는 빛, 색의 아름다운 조화만이 그려져 추상적인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지젤박이 그린 그것은 ‘감정을 가진 자연, 감수성으로 추상화된 자연’, 우리의 말대로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이다. 작가 역시 자신이 품은 자연이 유토피아를 향한 자연임을 명확히 한다: “변형되고 단순화된 형태들은 수평 공간 속에서 반복되며 이상적인 색의 조화를 통해 유토피아적인 자연 세계로 나아간다.” 그곳에는 때로는 발랄하고 유쾌하지만, 때로는 우울하며 침잠한 표정이 자리한다. 우리의 논의대로 그것은 ‘유스토피안 월드’를 담은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라 할 수 있겠다. 간단히 말해, 작가의 ‘마음을 담은 추상 자연’이라고 평하면 족할까?   


지젤박_From a Distance 20-14_50x50cm_acrylic on canvas_2020




4. 유토피안 하모니 - 결/겹의 미학 
지젤박은 자신의 ‘마음을 담은 추상 자연의 표정’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결(grain)'과 '겹(layer)' 혹은 ‘결/겹’의 조형 언어를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빈 캔버스 위에 제소(gesso)로 균질한 바탕을 만든 후, 그 위에 모델링 페이스트(modelling paste)를 두텁게 올려 바른다. 이때 나이프나 붓 대신 작가는 플라스틱 빗자루를 사용한다. 지젤박이 이처럼 올이 굵고 거친 플라스틱 빗자루로 모델링 페이스트를 캔버스 위에 쓸 듯이 올리는 까닭에 화면 위에는 가시적인 요철(凹凸)의 공간이 뚜렷하게 만들어진다. 즉 빗자루의 올에 묻혀 화면 끝까지 끌려 나온 미디엄은 오목의 공간을 남기고, 다시 밀려 올라선 미디엄은 볼록의 공간을 남기면서 요(고랑, 골)과 철(이랑, 마루)이 연접하면서 만들어낸 ‘흔적의 물질 회화’를 창출한다. 달리 말해 지젤박은 회화의 창작 과정 초반부터 지워진 것(비움의 공간)과 그려진 것(채움의 공간)이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는 ‘물질 흔적으로서의 질료적 회화’를 만들면서 ‘결의 미학’을 창출한다. 
결의 미학이라니? 결이 무엇인가? 
결은 어떠한 ‘바탕이나 상태’를 의미하는데, 대개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상태’를 주로 지칭한다. 즉 음과 양,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를 상호 충돌시키면서 만들어 낸 어떤 평정의 상태를 지칭하는데,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그 평정의 상태는 모두 다르다.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으로 형성되는 ‘물결’이나 ‘들숨’과 ‘날숨’이 쉼 없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유지되는 ‘숨결’을 생각해 보라.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 내며 싸우는 가운데 생성되는, 곱거나 거친 ‘마음결’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겠다. 이처럼 ‘결’의 상태는 대립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그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운동성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어떠한 평정 상태를 상정한다. 
한편, 결은 다분히 ‘추상 미학’이라는 주제 의식과 만나는 용어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추상’이란 삼라만상의 사물들과 개념들 사이에서 공통적 속성을 추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각기 다른 사물들과 개념들의 경계를 해체하고 허물어뜨려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결은 형식이자 내용과 연동된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결의 형식은 이치, 도리, 원리, 섭리와 같은 리(理)의 내용과 만난다. 한자 리(理)를 해제한다면 옥(王=玉)을 단위체(里)로 쪼개어 내는 것이다. 즉 단단한 옥을 다듬고 다스려 그것으로부터 근원적 이치를 밝혀내는 것이다. 나뭇결, 물결에서의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평정의 형식을 보라. 그것은 곧 내용과 맞물린다. 일테면 마음결이란 형식의 차원이자 그것으로부터 진화한 내용의 차원이기도 하다. ‘마음결’이 곧 ‘심리(心理)’인 것과 같이, 결의 형식은 리(理)라는 내용과 언제나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지젤박의 작품에서 ‘결’은 플라스틱 빗자루가 이끄는 요/철의 공간이 충돌하고 연접하면서 만들어진 평정 상태의 추상 언어를 총괄하는 형식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흔적의 물질 회화가 품은 추상 미학’을 드러내는 내용이기도 하다. 플라스틱 빗자루가 만든 거칠거나 잔잔한 바탕의 흔적 그리고 그 위에 올라선 이미지가 만든 모호한 경계는 결의 형식과 내용을 한데 묶는다. 요/철의 이항대립이 충돌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바로 비움/채움이라는 ‘결의 추상 미학’을 생성,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겹은 무엇인가? 겹의 미학은? 
겹은 “물체의 면과 면 또는 선과 선이 포개진 상태”를 의미한다. 지젤박의 작품에서, 플라스팃 빗자루가 미디엄을 이끈 결과인 ‘결’은 바로 이러한 ‘겹’을 이루는 선행 조건이 된다. 이러한 회화의 기본 바탕(결) 위에 아크릴 물감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지우고, 닦아내고 또 물로 씻어내는 과정에서 화면 위에 집적되는 물감의 층(겹)을 주목하자. 이것은 시간이 만드는 통시적 ‘겹’이라고 한다면 회화의 표면에서 색면과 색면의 경계를 만들면서 중첩되는 이미지는 공간이 형성하는 공시적 ‘겹’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겹’의 형식은 ‘결’이 그러했듯이 비움/채움이라는 ‘겹의 추상 미학’을 생성한다. 
조형적인 대립이 낳은 추상은 늘 관객의 심리적 전이를 가능케 한다. 특히 관객의 아리고 슬펐던 과거를 ‘지금, 여기’에 소환해서 치유하고 위무한다. 보라. 지젤박의 ‘결/겹’이 만든 자연 추상은 삶의 질곡으로 비유된다. 속살이 헤집어진 상처 그리고 그것을 감싸 안은 위무의 손길이 화면 곳곳에서 감지되지 않는가? ‘조형적인 유토피안 하모니’가 만드는 ‘심적인 유토피안 하모니(Psychological utopian harmony)’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젤박의 작업을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로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를 어렵지 않게 반증한다. 
  

지젤박_From a Distance 20-17_80x160cm_acrylic on canvas_2020


6. 에필로그 
글을 정리하자. 화가 지젤박의 이번 개인전 색면 추상화들은 모두 신작이지만, 이전의 작품명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From a Distance〉라는 작품명이 그것이다. 우리는 앞서 이 말이 흔히 ‘멀리서, 멀리 떨어져’ 등으로 번역되고, 종종 상황에 따라 ‘거리를 두고 보면, 마음으로’와 같은 말들로 의역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지젤박의 이러한 작품명은, 회화 속 이미지가 ‘자연이라는 관조의 대상과 이격된 현실의 지평에서 잉태한 것’임을 뚜렷이 드러낸다. 
유념할 것은 지젤박의 유토피아는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그려지는 지금, 여기의 염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현실의 지평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은 작가에게 손짓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세계’이자, 그녀가 미혹(迷惑)하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젤박이 현실계에서 그리는 ‘유토피안 랜드스케이프’는 곧 작가의 마음을 투영한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인 것이다.   
지젤박은 오늘도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를 담기 위해 작업실에 간다. 현실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한 세계’이지만,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위해서 말이다. ●


출전/
김성호, 「유토피안 마인드스케이프 - 결/겹의 자연 추상」, 『지젤박』, 전시 카탈로그,
(지젤박展- 有, 토피아, 2020.06.10.-06.23, H컨펌포러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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