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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황혼의 꿈

황주리

택시 안의 라디오에서 ‘아~ 세월은 잘 간다’ 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렇고 말고’ 하며 무릎을 치고 나니 어느새 꿈같은 2011년이다.

추운 겨울 밤 동네 어귀에서 손짓, 몸짓으로 국화빵을 파는 청각장애 아줌마를 볼 때도, 밤새 눈이 내린 날 새벽 4시에 삽으로 눈을 치우던 나이 든 수위 아저씨의 모습을 내려다볼 때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제 우리가 누구였든, 무슨 일을 했든 오늘을 살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당신이 좋다. 나이 들어 나는 새삼 겨울이 좋다.

꽃 피는 봄과 낙엽 지는 가을 풍경만 선물이 아니라 여름의 정열과 겨울의 서늘함도 귀한 삶의 선물임을 알게 해준 우리들의 나이 먹음을 사랑한다. 올해는 겨울답게 추워서 좋다.

이런 말을 하면 극빈곤층이 겪는 추운 겨울에 대해 무심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내 형제 자매 사촌들 중에는 어릴 적에 고생 하나 않고 살다가 힘든 세상살이의 폭격에 맞아 신빈곤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무릇 자식은 고생이 뭔지를 알게끔 키워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새삼 실감나는 겨울이다.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님은 내 또래인데도 불구하고 한참 어른처럼 느껴지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가난을 친구처럼 생각하며 자랐다. 걸어서 학교 가는 길에 하도 배가 고파서 매일 동네 사람들이 주는 술찌끼를 받아 먹고 만취해서 학교에 도착하곤 했다는 소년 시절의 얘기는 내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술이 세다. 웬만해서는 취하지도 않는다. 부지런히 일해 모은 돈으로 고향 철원의 비무장지대 근처에 땅을 많이 사서 별의별 농사를 다 짓는 그는 마음도 몸도 다 부자다.
가난한 어린이가 고생 끝에 부자가 된다는 자본주의의 동화를 나는 사랑한다. 아시아 인구 가운데 9억명 정도가 하루에 천원 남짓한 돈으로 연명한다고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폭죽 공장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인도 남부의 시바카시 폭죽 공장에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건강을 담보로 일을 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꽃들을 만들어내는 폭죽 공장 아이들은 심한 화상을 입기 일쑤라고 했다. 화상을 당해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버린 한 소녀가 집 안에 숨어서 살고 있었다. 그 프로를 본 뒤부터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지는 않았다. 새해 첫날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벌이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보면서, 그 이면에 가난한 어린 아이들의 슬픔이 녹아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빈곤한 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겉으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정말 잘 산다. 하지만 쪽방에서 보내는 독거 노인들에게 이 겨울은 너무 춥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영하 13도의 겨울바람 속에서 씩씩하게 한강공원을 걷는 내 귀에 꽂은 mp3에서 ‘왁스’의 ‘황혼의 문턱’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느덧 세월은 날 붙잡고 황혼의 문턱으로 데려와 옛 추억에 깊은 한숨만 쉬게 하네…’. 독거 노인들을 떠올리며 걷던 내 귀에 들려온 단어는 엉뚱하게도 ‘황혼’이라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황혼의 문턱은 언제일까. 황혼의 문턱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찾아올 것이다.

어느 할머니가 평생 떡볶이 장사를 해서 모은 돈을, 평생 담배를 팔아서 모은 돈을, 일제 강점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와 외롭게 혼자 살면서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증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우리는 황혼의 아름다운 꿈을 본다. 훌륭하지 않은가?

내 경우 황혼이라는 느낌이 처음 찾아온 것은 마흔 살 때였다. 지금 생각하니 마흔 살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이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나이는 젊음 쪽일까, 황혼 쪽일까. 육이오 전쟁이 끝난 지 육십여년이 흐른 남과 북은 평생 사니마니 다투다가 결국 아주 남남이 돼 버리는 황혼의 노부부처럼 되는 건 아닐지 노파심이 드는, 추운 겨울이다.

-문화일보 2011.1.13
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11301033037191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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