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어누리 / 재료가 매체가 될 때, 또는 그 역방향에서

이선영

재료가 매체가 될 때, 또는 그 역방향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는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는 난해한 제목의 작품은 ‘고장 난 기계를 갈아버리고는 원래 형태로 돌려놓으려 했다’는 의도의 결과물이다. 가루로 만들어진 기계를 작가 혼자 원래 형태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 기계가 예술을 통해서 환생하면 또 다른 방식의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다. 예술은 이러한 부조리한 방식을 통해서도 의미를 일궈낸다. 영상과 설치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고장 난 스마트 기기를 가장자리부터 정성스럽게 갈아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각형을 동그랗게 만드는 것인가? 한참을 가는 것으로 봐서 기계는 꽤 질기다. 작가는 그라인더를 이용하여 기계를 전부 분쇄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 가루로 만들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다시 스마트 한 기능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스마트 기기를 만들거나 작동하는데 필요한 광물은 대지의 심층이나 표층에 분명히 실재한다. 원료가 된 물질이 작동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구성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는가. 창조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휴를 나는 알고 있다.   혼합매체(갤럭시탭, 폴리), 176.4 × 243.4 × 7.95 mm  2019년도.



그는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휴를 나는 알고 있다. 혼합매체(갤럭시탭, 폴리), 176.4 × 243.4 × 7.95 mm  2019년도



기계는 생명처럼 물질이 고도화된 단계를 말하며, 곧 생명을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디스토피아적 전망에 만연해 있다. 기계의 발전 속도 및 업그레이드 주기가 점점 가속도가 붙는 만큼 쓸모없는 기계도 쌓여갈 것이다. 그라인더로 사정없이 갈아낸 갤러시탭은 기계 문명에 대한 작가의 입장 선언일까. 어누리는 최근 작품을 잡초들이 베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부터 시작한 터라, 자연과 점점 상극에 놓이는 기계문명에 대한 입장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근대를 개시한 산업혁명 이후 기계파괴운동(Luddite Movement)의 역사는 길다. 등장한지 얼마 안돼서 금새 역사의 뒤안길로 가버리는 스마트 기기는 박물관의 수집품처럼 전시되거나 작가의 행위를 통해서 폐기에 가속도를 붙인다. 모든 실재의 기원인 우주 먼지로 만들어버린다. 어누리는 최근 작업에서 재개발을 위해 공사판으로 방치되어 뒤집어진 대지 위에 잠시 자리를 잡은 풀들을 베어서 종이 형태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시간 차를 두고 소재로 사용한 스마트 기기와 종이는 미디어의 역사에서 가깝고도 먼 사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양피지나 점토, 돌 등에 한정되어 있던 육중한 서판이 파피루스나 종이같이 가벼운 물질로의 진화를 기록한다. 어누리의 작품에서 보여지듯 벽에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원초적인 종이는 곧 인쇄문화를 준비했다. 맥루한에 의하면 종이는 딱딱하고 부서지기 쉬운 파피루스를 대체했다. 중국으로부터 리넨지가 수입되자 중세유럽에서는 인쇄술 혁명이 일어났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구술성에서 문자성,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을 중세 후기로부터 르네상스에 걸쳐 쌓인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종이는 ‘시각적 도식과 조직화’(맥루한)라는 측면에서 월등한 정보처리 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후의 미디어 혁명은 같은 요구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은 동양이 앞섰지만, 그것을 수입하여 물질적 생산력으로 고양시킨 것은 서양이다. 맥루한은 중국의 표의문자는 인쇄기술의 발전에 방해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중세나 근대에 비한다면, 현대의 기술경쟁은 거의 동시대적이다. 




대지위 글씨 , 털도깨비풀과 잡초, 가변설치, 2021년도 (정면)



 



랜슬롯 호그벤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만화경](1949)에서 1936년 콘래드 추세가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 대신 전자식 계전기를 이용한 원시형 디지털 컴퓨터 기기 제조했다고 지적하면서, 현대는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에 의해 거리, 시간, 면대면, 정확성의 장애 극복으로 음성, 문자, 음향, 도해, 동영상의 송수신이 한 손아귀에 드는 휴대기기 속에서 실현했다고 기록한다. 몇 십 년 만에 따라잡은 한국의 기술력은 스마트기기 제조 능력이나 인터넷 인프라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작품 [대지 위 글씨]에서 털도깨비 풀과 잡초 등을 재료로 만들어진 원시적인 종이는 스마트 기기처럼 글자를 쓰고 읽고 하는 평면의 일종처럼 제시되었다. 종이의 역사는 스마트 기기 보다 훨씬 길며, SF영화에 잘 나오는 설정처럼 종말 이후의 시점에 다시 문명을 시작하는 대안의 매체가 될 수도 있다. 자연 및 자연에 바탕 한 삶의 양식은 훨씬 더 뿌리 깊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친숙한 매체인 종이나 스마트 기기를 변형하여 보다 긴 역사적 주기 속에 맥락화 한다.


세상의 많은 것들, 특히 그 중에서 빠르게 진보하는 것들은 문자로 씌여진 덕분이다. 종이든 스마트 기기든 문자는 쓰여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하며 변화를 겪는다. 문자는 말에 비해 무엇인가를 정확히 고정, 즉 재현하지만, 재현 또한 보다 근본적인 차원인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놓여있다. 자연과 기계가 작업을 거쳐 부서지고 다시 무엇인가(여기서는 예술작품) 되는 과정이다. 작가는 원래 자연적으로 인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형과정을 보다 극적으로 행하면서, 이러한 변화 자체에 작품의 메시지를 담는다. 작품 [대지 위 글씨]는 일련의 단위구조를 배치하여 전시장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는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은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중인 과도기의 공간에서 잠시 자리를 잡은 잡초들을 ‘종이’로 환생시켜서 자신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기록한다. 아직도 원재료의 냄새가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이 수제 종이는 날 것의 느낌을 살린다. 날 것은 보다 원초적인 지각에 호소한다. 필자는 전시장에서 어릴 적 여름방학 때 놀러 간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맡은 소죽 쑤는 냄새를 불현듯 기억했다. 










작가가 닥종이 장인의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자습한 제작 방식은 수집한 식물을 끓이고 빻고 물로 헹궈 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풀냄새는 많이 날아가지만 전시장에서는 시각보다는 먼저 후각에 호소한다. 기계 갈기와 비슷한 과정으로 종이를 제작했는데, 기계 때 보다는 덜 부조리하다. 그것은 원재료와 완성품 간의 거리가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에서도 종이를 재료로 종종 사용한다. 시각중심주의의 끝에는 추상이 있는데, 추상은 자신의 내용을 비워내면서 물자체를 중시하게 되었고, 종이가 되기 직전, 또는 종이를 재료로 한 이후의 과정은 그러한 물자체(정확히는 물자체에 대한 관념)를 재현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누리의 재료는 훨씬 거칠다.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도 마치 종이 입자를 확대해서 본 듯한 느낌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확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원초적 형태의 종이는 쓰기와 읽기의 역사를 증언한다. 


작품으로 제시된 풀은 집터의 풀로 살았을 때와는 다른 역사를 시작한다. 종이는 사라져가는 매체인 듯 했지만, 오히려 디지털 문명으로 또 다른 소비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읽기 위해서는 종이에 따로 출력하지 않는가. 종이 만드는 과정을 참조하여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잠재적인 것에서 명시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에 내재된 텍스트를 훨씬 잘 읽었다. 현대인은 그에 비하면 문맹에 가깝다. 물론 입자가 굵은 우툴두툴한 평면 위에 무엇인가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규격 종이처럼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져 벽에 부착된 평면들은 그 정면성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읽게 만든다. 관객은 여러 겹의 섬유질이 얽힌 파피루스 같은 평면에서 어떤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잡초들은 자연의 순환을 멈춘 채 예술이라는 시공간대로 이동함으로서 쓰레기가 되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운명을 벗어났다. 자연은 보다 긴 진화의 시간대를 통해 말하지만, 인간의 개입을 통해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는다. 




파피루스+파피루스+파피루스,  삼베천 위 종이(잡초), A3, 2021년도



20211021_134520



자연이 사연을 담게 되자마자 개발이나 소멸 등에 대해 의미나 감정이 실리게 된다. 장기 지속하는 자연적 변화는 차이와 반복 속에 행해지는 영겁회귀의 과정에 지나지 않지만, 예술은 그것은 인간적 시간, 즉 이야기에 담는다. 자연은 의미화되는 것이다. 어누리의 수제 ‘종이’가 상징하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으로의 이야기 축의 변화이다. 평소에 작가가 보살피고 있는 길고양이들처럼 이제 자연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연을 가지게 된다. 작품 [파피루스+파피루스+파피루스]에서 삼베 천 위에 놓인 것은 부스러지기 쉬운 ‘종이’의 우연적 형태에서 상상력을 펼친다. 고대의 종이를 여러 번 겹쳐 호명한 작품 제목은 그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얼룩들을 발신한다. 심리 테스트 얼룩처럼 관객은 자기만의 투사를 한다. 보다 많은 관객(독자)와 만날수록 투사되어 써지는 사연도 많을 것이다. 오래된 천에 말라붙은 것은 쇠퇴나 죽음을 떠올리지만, 마치 씨앗이나 건 미역처럼 어떤 조건의 변화가 있을 때 접혀지고 겹쳐지고 오그라들었던 것은 다시금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출전; 레트로봉황 레지던시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