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아트센터 작가 탐방기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원기

근대에 정립된 순수미술보다 더 오래된 전통을 가지는 것이 장식이다. 장식은 인간 문화의 모든 것처럼 자연으로부터 오지만, 노동에 필요한 계산적 사고와 육체적 리듬에서 기원한 패턴들로 추상화되기도 한다. 자연은 물론 신화, 종교, 역사, 인물 등을 충만하게 채우는 장식은 상징적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상징으로부터 분리된 형태는 기계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었고, 이후에 공예로 특화되면서 순수미술과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공예에도 예술에도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대중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거나 시장의 판단이 유일한 잣대가 되는 어려움이 빠졌다. 더구나 ‘기계복제 시대’(발터 벤야민)가 열리면서 기능은 상징으로부터 분리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고, 기계 발전의 속도를 다 따라잡기 위해서는 물적 심적으로 적지 않은 투자가 필요해졌다. 김원기의 작품은 순수미술, 공예,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이라는 몇 가지 주요 길목에 자리한다. 

갈라진 길에서의 선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김원기의 경우 어느 정도 강압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는 원래 풍경화를 주로 그려왔지만, (재)개발 공화국인 한국에서 순수한 자연 풍경이 남아있는 곳이 별로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나무나 세라믹 등을 이용한 융복합 작업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동안 손에 닿는 대로 여러 재료를 실험해왔고, 기회가 되면 테라코타도 도전해 보겠다는 계획도 있다. 특히 버려진 나무를 자르고 태우거나 잉크로 색을 내서 만든 작품들이 특이하다. 김원기는 ‘에코 아트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을 만큼 자연 친화적인 소재와 주제를 표현해왔다. 풍경화를 그려왔던 감수성 때문인지 장식적 패턴과 결합된 자연은 장식과 예술의 장점을 결합시킨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순수예술은 기법의 문제를 장식은 내용의 문제를 간과한다. 하지만 김원기의 상징적 우주에서 자연은 그 자체에 내재한 매력이 더 돋보인다.       

김채웅

김채웅은 어릴 적 서울 달동네의 추억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공동체가 있었던 정겨운 모습이다. 한국의 70-80년대는 독재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불행했지만, 누가 권력을 잡은 것과 무관하게 ‘3저 호황’에 따른 고도성장의 시대로 평가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던 역동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기억은 어느 장면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50대 중반 작가의 작품에는 그 또래의 한국인이라면 알아볼만한 친근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아이의 시점에서 회고한 그 시대는 대개 놀이와 연관되는데. 그가 기억하는 놀이로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땅따먹기, 자치기, 사방치기, 숨바꼭질, 다방구, 말타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있다. 컴퓨터나 비싼 장난감 없이, 여러 학원 순회하는 일 없이, 하교 후 골목길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놀이였다. 지금은 아파트 놀이터에도 노는 아이들이 별로 없고, 다른 동네 애들이 거기에서 놀기라도 하면 ‘도둑놈’ 취급을 받는 살벌한 시대다. 

그렇다고 그 시절을 미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나간 몇십 년의 세월은 춥고 배고팠던 기억도 다소간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린다. 김채웅의 작품이 담고 있는 진귀한 추억들은 형식적 장치로 인해 돋보인다. 그의 화면은 상/하로 나뉘며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푸른 하늘 부분에 동네 아이들이 쫒아다니곤 하던 소독차 등이 떠 있고, 액자 안에 또 하나 있는 그려진 액자 위로 소독약이 내뿜어진다. 숨바꼭질하는 아이들도 그려진 액자에 자리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저 밖으로 뚫린 창이나 주체 앞의 거울이 아니라, 주변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다. 작가의 기억에 바탕한 사실적 풍경이지만, 그림이라는 허구적 조건을 의식한다. 기억은 지금은 없거나 드문 풍속도라는 점에도 있지만, 기억 자체가 주체에 의해 재편집되는 불확실한 것이다. 화면 아래에 자리한 빽빽한 집들은 마치 연극 세트처럼 거주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그것이 기억, 즉 허구임을 암시한다. 

함선주

함선주의 [잉태하다] 시리즈는 잉태에 대한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작가는 잉태 시리즈에 대해, ‘생명과 가족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가족을 희망과 연결시키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이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출산 기피로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며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한국의 암울한 상황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사회가 재생산되지 않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예술작품으로나마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희망은 어둠 속의 빛으로 나타난다. 함선주의 작품에서 어른과 아이를 단순화한 형태는 어두운 바탕 위에서 황금색으로 빛이 난다. 춤추는 듯이 활발할 형태들이 반 부조처럼 바탕으로부터 도드라지게 표현된 것은 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강조를 알려준다. 작품 속에서 생명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찬미는 관념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다. 함선주에게 잉태는 온몸으로 경험한 사건이다.

2000년대 초에 결혼한 작가는 남녀 쌍둥이를 낳았고, 이후에 그 아이들은 부모의 인생을 따라 예고에 다닐 정도로 집안 분위기는 좋다. 부부가 작가라면 그 어려운 길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법도 한데, 식구들이 하나의 길을 가고 있는 드문 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생명이든 예술이든 위기에 처해있다. 함선주의 작품에서 이 둘은 동시에 돌파구를 찾는다. 인간이 속하는 최초의 사회에서 지지되는 가치는 소중하게 자라나기 마련이다.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한 쌍은 마치 무용수처럼 서로의 우호적 관계를 몸짓 언어로 표현한다. 생명의 씨앗 안에는 이미 인간의 형태가 담겨 있다. 여성 작가 스스로가 표현한 잉태와 출산의 체험은 그자체로 소중하다. 여성은 오랫동안 ‘자연적인’ 운명에 묶여 공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에 참여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주제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조진식

작년까지 유화 작업을 주로 하던 조진식은 환영(illusion)에 갇혀 있는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혼합재료를 활용한 부조 작업으로 전환했다. 완전한 부조는 아니고 그림이 함께 한다. 그림을 이루는 한 요소가 현실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소재 중에서 조진식이 요즘 몰두하고 있는 달항아리만큼 적당한 소재도 없을 것이다. 달항아리의 입체적 형태는 화면 속에서 자라나듯 돌출되어 있어 바탕에서 형태를 꺼내는 것 같은 양상이다. 빚어 구운 그릇을 가마에서 꺼내는 도공의 심정이 연상된다. 그의 그림 속 달항아리는 그 텅 빈 형태와 백색을 통해 관객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달은 향수에 젖은 사람들의 상상이 투사되는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비움으로서 채워지는 달항아리의 매력을 활용했다. 배경은 산이나 대나무 그림자가 비치는 한옥의 문 등, 달항아리와 어울리는 동양적 풍경이다. 

혼합재료로 캔버스에 고정시킨 항아리와 배경이 따로 놀 수도 있기에, 입체 형태와 배경에 연속적인 표면처리를 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장치는 아예 달항아리를 완상의 대상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좌대 위에 놓인 완상의 대상인 달항아리는 배경과 분리되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도자기 표면의 질감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조진식의 작품은 도자기로 만들어 화면에 꼴라주 한 것 같다. 사실은 천, 젯소, 핸디코트, 압축 스티로폼 등 여러 재료로 연출된 가짜 도자기다. 실제 도자기라면 평면에 붙이기에 너무 무겁고 파손의 위험도 있다. 그림이라는 환영에 만족할 수 없었던 작가는 현실로 밀고 나갔지만, 그 또한 3차원 현실을 2차원에 담기 위해 다양한 형식을 개발했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치밀한 장치를 필요로 한다. 작품은 현실만큼이나 구성된 것이고 그로 인한 해체를 포함한 변형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예술의 이러한 속성을 속임수나 허무라고도 말하고, 실험이나 자유라고도 말한다.  

이창환

서울 근교에 있는데도 좀처럼 가보지 못했던 낯선 도시 화성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은 80년대 독재정권이 시국 공안 사범에만 신경 쓰느라 무시무시한 살인이 계속 일어났는데도 진범을 못 잡은 범죄 도시, 또 하나는 미군 사격장에 얽힌 주민 갈등이 반제국주의 운동으로까지 변했던 가슴 뭉클한 도시라는 기억이 있다. 매향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배반하는 식민지의 흔적은 관련 자료 사진만 봐도 울컥하게 된다. 작가에 의하면 50여 년간의 미군 사격장으로 이용된 농섬에 가면 아직도 포탄이 지천으로 널려있다고 한다. 파도에 드러나는 무기들은 결코 상처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얼마 전에 작가가 입주해 있는 창문아트센터에 가다가 들른 화성의 중심부는 젊은 세대들이 많이 사는 신도시의 활력도 느껴졌다. 화성에는 실로 많은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화성의 저수지와 호수, 항구, 방조제, 갯벌 등을 멀찍이서 포착한 이창환의 사진들을 누군가 본다면 여행 갔으면 하는 멋진 풍경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사진은 어떤 대상을 한눈에 반해 한번에 찍은 것들이 아니다. 근처에 살면서 반복적으로 보면서 길어 올린 오랜 투자의 산물이다. 풍경은 쉽사리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농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처럼 오랜 기다림의 산물이다. 매향리의 갯벌에서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채취한 바지락, 낙지, 굴 등은 그들의 빈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필요보다 모자란 자연의 법칙의 지배 아래 있다. 떼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주어진 자연에서 최소한의 것들만 취하고 사는 사람들을 작가는 가까이 가서 찍지는 못한다. 사진이 대상을 객체화하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멀리서, 뒷모습으로 찍지만 그들의 애환과 아름다움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회와 역사는 보다 큰 자연의 주기 속에 포함된다. 대상과의 거리두기는 대상을 피상적으로 소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근접하는 삶의 성스러움을 암시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성스러움은 위기에 처해있다.

박석윤

박석윤은 금속에 자신을 새기는 거친 작업을 한다. 그리는 붓을 대신하는 것은 용접봉이다. 강한 질료인 금속판에 새겨진 자화상은 굳건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그는 강함보다는 상처처럼 다가오는 변형과 그 흔적을 더 중시한다. 그러한 흔적들의 결과가 쌓여 자신을 이룬다고 본다. 삶의 상처는 탄생 직후부터라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이 있다. 모태라는 완전한 보호의 환경에서 벗어난 태아는 탄생의 순간부터 외부의 자극에 의한 스트레스의 연속이며, 이러한 원초적 상처, 즉 트라우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의 원인과 반응을 야기한다. 물론 수십 년간 작업해왔던 작가는 삶의 상처로부터 도피하는 영역, 즉 예술이 있었지만, 예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예술하는 삶은 그자체로 불안정함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작가는 이 운명을 피하거나 덮기보다는 아예 주제로 삼았다. 용접할 때 금속 표면을 살짝 지나치기만 해도 생기는 흔적을 상처로 보고 그 상처와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이는 주체를 표현한다. 

실크 스크린으로 옮긴 작가의 사진 아래나 머리 위에 자리한 얼룩진 표면들은 같은 평면은 아니지만 공존하며 주체를 구성한다. 금속이 태워짐으로서 생겨난 무채색이 실제의 고유색을 대신한다. 모노톤의 작품은 금속의 빛나는 화려함 대신에 금욕적인 면을 강조한다. 타고 남은 것들은 그자체로 소중한 주체의 구성요소가 된다. 컴플렉스는 작업을 이끄는 동력이 되며 개성적 결과물을 낳곤 한다. 어떤 면이 부족하면 그것을 만회하려는 더 큰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자화상 이외에 또 다른 작품군은 [여로], [열간 균열] 시리즈다. 작가가 살고 작업하는 장소에 흔히 있는 골함석이나 평함석 등을 활용한 것으로, 용접봉으로 쇠를 녹인 결과로 생긴 우글우글한 표면이 항공사진이나 지도와 같다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글우글한 표면을 잡아주는 둥근 형태는 구글 지도의 위치 표시 같은 기호로 다가오기도 한다. 박석윤의 작품은 주체가 상처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가 걸어온 길, 즉 여로라는 것을 말한다. 

출전; 화성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