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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코라, 존재가 유래하고 돌아갈 집

고충환



이소영/ 코라, 존재가 유래하고 돌아갈 집 


이소영의 작업은 한눈에도 몸을 표현의 최전선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몸 담론 특히 정신분석학적 담론과 관련되고,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담론과 관련되고, 타자로서의 몸을 주제화한 것이란 점에서 타자론과 연관된다. 한마디로 몸 담론, 정신분석학적 담론, 여성주의 담론, 그리고 여기에 타자론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동된 담론의 형식실험장을 방불케 한다. 여기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와 애브젝트, 루이스 이리가레이의 여성적 글쓰기 개념이 이 담론을 지지하고 실행하는 실천 논리를 위해 동원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코라는 존재가 유래한 우주적 자궁 그러므로 원초적 자궁을 의미하고, 기호 그러므로 언어 이전의 무정형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원초적인 무정형 상태를 자족적인 욕동(원초적인 욕망)의 상태로 이해한다면 프로이트의 원초적 자아와 통하고,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신들의 향연)와 통한다. 기호 그러므로 언어 이전의 무정형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조르주 바타이유의 무정형 개념(삶과 죽음이 처음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합일된 상태)과 통하고, 자크 라캉의 상상계 개념과도 통한다.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계를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로 나눈다. 기호 그러므로 언어 이전의 무정형 상태가 상상계고, 기호와 언어로 재단된 세계가 상징계다. 그리고 상상계의 단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지 못하고 실패한 상상계, 좌절된 상상계 그러므로 억압된 상상계가 실재계를 이루면서 잠복 된다. 이처럼 실재계는 상상계가 억압된 것이므로 호시탐탐 상징계의 파국과 전복을 노린다. 그리고 슬라보이예 지첵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다 실재계를 비유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코라는 존재가 유래한 근원(삶)이고, 나중에 존재가 되돌아갈 집(죽음)이다. 그래서 존재는 코라를, 그러므로 집을 그리워한다. 

이소영의 작업에는 각종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자궁이 있고, 젖무덤이 있고, 탯줄이 있고, 혓바닥이 있고, 축 늘어진 젖가슴(작가가 쭉정이라고 이름을 붙인)이 있고, 배꼽을 강조한 몸통이 있고, 장기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있다. 이 신체 이미지들은 다 뭔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애브젝트는 침, 피, 땀, 똥, 오줌과 같은 신체 분비물을 의미하며, 이성이 지배하는 정신의 왕국을 전복하기 위해 소환된 이질적인 것들, 낯선 것들, 생경한 것들, 그로테스크한 것들, 혐오스러운 것들, 비 혹은 반 제도적인 것들, 규정할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이성이 추방한 것들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로 치자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이소영의 작업에 등장하는 신체 이미지들은 이런 애브젝트들이라고 해도 좋고, 코라가 분기되는 지점들, 그러므로 코라의 분신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코라가 분기되는 장, 코라가 자기를 실현하는 장 앞쪽에 삶(자궁과 젖가슴과 탯줄)이 있고, 그 끝에 죽음(젖무덤과 축 늘어진 가슴)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배꼽을 강조한 몸통이 있다. 여기서 배꼽은 세계가 유래한 중심 그러므로 세계의, 우주의 배꼽(옴파로스)을 상징한다. 남근에 대비되는 또 다른 세계의 중심상징이고 근원 상징이라고 해도 좋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젖가슴을 젖무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실제로도 사전에 그렇게 표기돼 있지만). 이처럼 작가에게 가슴은 삶을 상징하고 죽음(무덤)을 상징한다. 다시, 조르주 바타이유에서처럼 삶과 죽음이 처음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합일된 상태, 그러므로 전인적인 존재의 상태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코라가 분기되는 지점들, 그러므로 코라의 분신들을 매개로 자신의 성적이고 존재론적인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예시해 보인다. 

근작에서 성찰은 작은 서사 그러므로 미시 서사를 향하는데, 화분을 소재로 한 작업이 그렇다. 엄마는 화분을 애지중지하고, 작가는 그런 엄마가 싫었다. 그리고 이후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 때 엄마는 화초 하나하나를 화분에서 꺼내 열린 흙에 이식하면서 작은 꽃밭을 일구는 것을 보고, 비로소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엄마가 꽃을 케어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엄마를 케어한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화분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내릴 뿌리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외관상 붙박이로 보이는 화분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역설적인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화분은 이식을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로 치자면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이동하는(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유목적인, 유목주의적인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몸을 소재로 한 작가의 전작과도 통한다. 아마도 치열한 담론의 장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작업에 생태 담론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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