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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아트포인트_평화/ 전쟁과 평화, 상처와 치유를 다시 생각한다

고충환



포천아트포인트_평화/ 전쟁과 평화, 상처와 치유를 다시 생각한다 


포천 관인면 냉정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를 비롯한 이북 5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해 사는 실향민 마을이 있다. 처음엔 꽤 많은 사람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만, 그동안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몇몇 사람이 남아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고향에나 한번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소망을 버팀목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인근에는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난 1세대 실향민들이 돌아올 수 없는 혼백이 돼 잠들어 있는, 매년 한 차례 망향재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달래기도 하는 망향동산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에 가면 독수리유격대 전적비가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포천지역 민간인 63명이 자발적으로 독수리유격대를 창설하고 참전한, 소위 군번 없는 의병으로 알려진 망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다. 그렇게 포천 각처에는 벙커 수기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지고 1곳만 남아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현재 등록문화재 578호로 등재된 벙커를 이용해, 향후 현장 설치작업이며 장소특정적 전시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함께 포천에는 3.8선이 지나가는데, 지금의 휴전선이 결정되기 전 그어진 선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올라갔다 밀려나기를 반복했던 치열했던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포천에는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역사적 현장이 고스란히 간직돼있는 만큼, 이번 기획 전시에서의 평화라는 주제는 시의적절하고, 또한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런 역사적 현실이 남긴 아픔과 치유를 주제화한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들을 통해 전쟁과 평화, 상처와 치유가 갖는 의미를 재고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저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병. 작가는 자신이 직접 고안해 만든 그라인드 조각칼을 도구로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 아크릴판을 조각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아크릴판의 뒷면을 조각해, 매끈한 표면에 그 이미지가 비쳐 보이게 한 것이다. 이처럼 뒷면의 이미지가 그대로 비쳐 보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크릴판의 투명한 성질과 빛을 투과하는 성질에 의한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에 부합하는 재료와 방법을 찾아내고 길들인,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다양한 질감과 표정의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그중에는 중심성이 강한 원형의 형상도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영혼의 눈이라고 부르고, 영혼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눈처럼 보인다. 여기에 빛을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영혼의 눈처럼도 보인다. 아마도 생물학적 눈으로서보다는 내면의 눈 그러므로 심안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심안을 통해서 분단 현실을 직시하는 한편으로, 눈 자체가 발하는 빛의 질감으로 평화를 기리는 마음을 담았다. 

권광칠. 드문드문 알만한 꽃들 사이로 이름 모를 풀들이 우거진 풍경이 아마도 실제를 모티브로 한 것임에도 내면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풍경은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이 주어진 그대로, 그 자체라고 한다면, 풍경은 자연에 주관이 개입되고 매개된 것이 다르다. 해석된 자연 그러므로 각색되고 연출된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는 자연에 자신의 어떤 바램을 불어 넣는가. 내면의 평화다. 자연을 빌려 내면에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실제로도 대개는 연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색조며 색채감정이 풀벌레 우는 소리라도 들릴 듯 고요한 느낌이다. 여기에 바위에 앉아있는 다람쥐 한 마리가 평화로운 느낌을 더한다. 그리고 나풀거리며 나는 나빈지, 흩날리는 꽃잎인지, 쏟아져 내리는 별빛인지, 아니면 나비와 꽃잎과 별빛이 한데 어우러져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달밤의 어스름한 정경이 평화로운 느낌을 넘어 별세계의 판타지(밤의 향연?)를 열어 놓는다. 

서시환. 강변에 한 남자가 저 홀로 앉아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도망 중이라고 했다. 어디서 어디로 왜 도망하는 것인가. 도망하는 사람은 길을 따라 도망간다. 지금은 망연한, 혹은 막다른 강변이 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길에 관심이 많다. 흔히 삶을 길에 비유한다. 아마도 작가가 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길이 함축하고 있는 삶의 유비 때문일 것이다. 그 길 위로 안개가 내리고, 안개가 있는 것도 같고 잘못 본 것도 같은 사람들을 덮어서 가리는 것이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존재론적인 깊이를 더한다. 그 길 위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농익은 홍시 하나 떨어진다. 홍시에 말라붙은 감꼭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작가는 길과 함께 길 위에 있는 것들, 길 위에 떨어진 것들, 길 위에 버려진 것들에 관심이 많다. 예사롭지 않다. 작가는 포천 영중면 작업실에 둥지를 틀었을 때 그곳이 다름 아닌 3.8선 남북경계 지역이었음을, 깃발처럼 무성한(무상한?) 청춘들이 죽음과 맞바꾼 자리였음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길이 한때 누군가가 지나간 또 다른 길이었음을 처음 알았을 것이다. 

이자희. 모자이크와도 같은, 스테인드글라스와도 같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구성된 얼굴 위로, 도시 위로, 별빛 총총한 칠흑 같은 밤 위로,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유기적인 덩어리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허공 위로 갈기갈기 찢어진 선혈처럼 붉은 새가, 때로 붉은 말이 난다. 카오스라고 했다. 원형이라고 했다.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가 유래했다. 그러므로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카오스를 모른다.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 원형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아마도 작가에게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선혈처럼 붉은 새와 붉은 말이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소환된 카오스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을 표상할 수 있겠다. 동시에 그 자체 갈기갈기 찢어진 선혈처럼 붉은, 분단 현실의 반무의식적인, 혹은 집단무의식적인 표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임승오. 한눈에도 작가의 작업은 유물을 발굴하는 터를 닮았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업에 시간의 발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곧 시간을 발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의 발굴이 작가의 작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시간의 차연을 다룬 작업이 작업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각각 발굴터(시간의 발굴)와 그 터에서 발굴된 부장품(시간의 차연)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서로 다르지만, 크게는 이 두 주제며 범주 아래 모이고, 다시 그렇게 상호 유기적이고 연속적인 관계 하에 놓인다. 그런데 정작 발굴된 오브제들을 보면 그 실체며 의미가 조금은 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작가가 거쳐왔을, 그러므로 은연중 작가의 정체성이 반영되었을 근대 생활사에 작가의 예술가적 상상력이 결부된 오브제들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주지하다시피 차연은 자크 데리다에서 온 개념이다. 미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계속 연기된다는 논리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의 실체는 좀체 손에 쥐어 지지가 않는다. 지나쳐온 시간의 의미가 그렇고, 기억의 생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문명을 증언하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증언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그리고 우리)을 증언하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정인자. 지난 10년간 인도 뉴델리 작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작가가 찾은 DMZ 펀치볼은 지금은 비록 아늑한 해안분지지만,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로서 치열하고 아픈 상처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전투 현장이기도 했다. 해안분지가 떠올려주는 바다 이미지 때문일까. 작가는 그곳에서 바다에서 들려오는 생명이 어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실제로는 군인들이 진격하는 소리를 듣고, 총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한데(작가가 실제로 그림에 그려놓고 있는 것처럼), 정작 작가는 생명이 어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역설이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를 생명이 어우러지는 소리로 덮는다. 상처를 치유로 덮는다. 전쟁을 평화로 덮는다. 바로 신화적인 힘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신화적인 이미지며 메시지가 강한 편이다. 작가의 예술혼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겠다. 그 자체 아마도 신들의 나라인 인도에서의 오랜 작가 생활을 통해 반무의식적으로 체득되고 체화된 기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평화를 위해, 치유를 위해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되고 진화할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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