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나 사회를 막론하고 그 구성원이 믿고 따라야 할 관념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상식이나 예절 혹은 윤리나 관습 등의 규약을 통해 일상을 이끌거나, 법전으로 강제함으로써 구성원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러한 관념은 우리가 어떤 인물을 존경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인생 노정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노예제도나 여권운동은 물론이고 전쟁이나 정치의 역사를 돌아보면 특정 지역의 구성원은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관념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추종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위대한 혁명가에 의해 견인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BCE 470-399)가 남긴 말과 행동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인문학의 주요 관념이 되었고 2,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다. ‘너 자신을 알라’며 아테네 청년에게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유 의식을 심어주었던 그는 70의 나이로 당대 권력이 세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아테네의 신을 숭배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이단적인 것을 소개하여 청년을 타락시킨 죄가 소송의 이유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철학을 부인하여 반역죄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유죄를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독배를 들고 최후를 맞이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Oil on canvas, 130×196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세월이 흐른 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통해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재현해 내었다. 다비드가 내세웠던 그림의 주제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철학자의 굳은 결기였다. 그림 속에는 소크라테스에게 망명을 권유했던 친구 크리톤과 그의 수제자 플라톤을 함께 등장시켜 역사적 네러티브를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은 ‘악법도 법이다’로 전해진다. 자신의 철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예수처럼 비극적이고 경건하며 장엄하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꾼 원칙이란 다름 아닌 아테네 법이었다. 법이란 시민 상호간의 합의된 약속으로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할 규범이었고, 그것을 따르는 일은 당시의 시대와 사회적 관념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수용했던 원칙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철학자로서 그가 비판했던 것은 아테네의 신과 종교에서 파생된 윤리적 관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일백 번을 고쳐 죽는다고 해도 바꾸지 않겠다던 철학적 신념과, 악법도 법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윤리적 관념 사이에는 갈등의 구조가 존재한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가 보여준 선택이 체제의 전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바로 그의 제자 플라톤이었다. 이성적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소크라테스는 동시대의 소피스트와는 달리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낮추었고 대화하며 진리를 모색할 것을 요청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아테네의 윤리와 규범을 부정하면서도 그가 비판했던 아테네의 윤리와 규범을 수용해 죽음을 선택했다. 자기취향에 맞는 윤리와 규범을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아테네 대중을 위해 독배를 마심으로서 자신의 철학적 소명을 완성시켰다.
‘너 자신을 알라’고 청년들을 가르쳤으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스스로 고백한 소크라테스의 역설은 상실의 계절을 사는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기원전을 살았던 서양의 소크라테스에서 동양의 공자에 이르는 성인들은 모른다는 것을 고백했던 위인들이었다.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역설적 사유의 방식은 오늘날 학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노정에서도 유익한 태도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