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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 내 안의 타자와의 조우

이선영

내 안의 타자와의 조우

 

이선영(미술평론가)

  


국내외의 여러 레지던시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작업해 왔던 이경희의 최근 몇 년의 작업은 회화에 집중돼 있다. 물론 퍼포먼스 중심의 활동에도 회화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이번 전시 [삼킨 다리]는 100호 크기의 작품들이 다수 포함된 회화 전시다. 전시부제에 암시되어 있듯, 신상의 변화가 있었다. 몇 년 전 중국의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고, 이후 일본의 레지던시에서 또 다쳐서 ‘돌아다니며’ 해왔던 작업 스타일이 대폭 수정되고,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된 것이다. 2020년 3월에 한국에 돌아와 계속 회화 중심의 작업을 했다. 그동안 회화는 잠재적 차원에 있었지만, 이제 현실화 됐다. 물론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회화에도 작가의 활동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경희의 최근 작품은 작가의 우울과 분노 등이 스민 내면 풍경이면서도, 한국어에서 ‘푸르다’로 같이 표현되는 바깥의 공기 또한 가득하다. 



강남콤뮨갤러리 전시전경



누군가는 거기에서 숲이나 바다의 풍경을 볼 수도 있다. 선긋기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유화로 색을 쌓으면서 형태를 만들어 나갔다. 구상도 추상도 아닌, 경계 위에 존재하는 애매한 형상들은 여전히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이전에 주로 했던 퍼포먼스와 그것을 담은 영상작업은 작가의 개념을 전달하는데 방점이 찍히지만, 회화 특히 반(半) 추상적인 작품에서 내용은 언뜻언뜻 비춰지며 은유적이다. 작가가 수립한 개념이 여러 단계의 공동작업을 통해 진행되는 영상과 달리, 회화에서는 화면과 화자 사이에 좀 더 긴밀한 상호 관계가 깔린다. 타자와의 대화가 자기 안의 타자와의 대화로 이동한다. 그것이 독백일 수 없는 이유는 작품에 작가의 이질적인 부분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나로부터 출발했지만, 나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편재한다. 회화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우연성에 더 열려있다. 우연은 계획에서 어긋나는 재앙이 아니라, 작가라면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의외의 요소로, 고전주의 및 사실주의와 갈라지는 낭만적 요소다. 


회화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분출하며 대화하는 장이다. 몸의 불편함, 작업하는 삶의 불확실성 등은 다소간 우울하고 가라앉은 색조에 반영된다. 하지만 삶의 중력은 작업에 몰입감을 준다. 자신의 전 존재를 투여해야 가능한 작업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일상과의 간극이 있다. 일상의 삶과 화해하거나 그에 녹아나는 삶에서 작업의 입지를 줄어든다. 많은 근현대의 작가들이 말하듯 작업은 바깥에 존재한다. 작품은 (물리적 부상의 결과인)다리 뿐 아니라, 작가의 많은 것을 삼킨 후 내뱉어지는 무엇이다. 그래서 작업은 고대 이후 사라진 희생의식의 잔재라고도 말해진다. 성스러움이든 잔혹함이든 일상의 삶에서는 견디기 힘든 무엇이 희생의식에는 존재한다. 이경희의 작품에는 치유를 향한 봉합보다는, 더 강하게 상처를 후벼파는 듯한 가혹함이 있다. 예술가는 이러한 한술 더 뜨기 전략을 통해 진짜 잔인할 수도 있는 삶과 거리를 둔다. 







전시전경



하지만 이경희의 작품은 객관적 거리감은 아니다. 거기에는 변신을 위한 운동성이 내재한다.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삼킨 다리]는 몸의 실루엣들이 등장하지만, 유기체로서의 완전성 잃어버린다. 무엇인가 삼켜진 것이다. 식물과 다른 동물의 특징은 자유로운 이동이다. 푸른 색감은 이동이 제한된 우울한 상황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림은 몸과 마음의 직접적인 연결 통로가 되어준다. 작가는 ‘식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일종의 가지치기를 하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가지치기를 통해 증식하는 방식은 깊은 뿌리와 관련된 유기적 총체성과는 다른 세계관이다. 무엇이든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시대, 뿌리줄기처럼 횡단하는 경험은 결핍을 충만으로 변화시키는 한 방식이다. 다친 다리는 횡단을 물리적 차원이 아닌 상상의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가지치기에 대한 생각은 다친 다리 때문이기도 했는데, 작가는 ‘무거운 다리를 잘라내고, 때로는 버리고 싶은 생각(머리)를 덜어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신체적 고통은 절단의 상상을 파생시킨다. 몸과 상상은 연결되어 있다. 의학적 용어에서 ‘환상통(幻想痛, phantom pain)’도 있지 않나. 이 작품과 관련되어서는 ‘환지통(幻肢痛, phantom limb pain)’을 참고할 수 있다. 신체 일부가 절단되었어도 고통이 남아있다는 이상 감각처럼 몸의 고통은 상상과 연동된다. ‘삼킨 다리’의 상상력은 온전한 개체의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이 그리기로 나타난 것으로, 몸과 관련된 문화적 상상력으로 뻗어나간다. 문화평론가 캐밀 파야(Camille Paglia)는 [성의 페르소나sexual personae]에서 문화를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유형으로 나누는 유명한 관례를 소개한다. 저자는 아폴론적 스타일을 ‘선(線)을 강조하고 사물과 사물을 서로 구분하며 또 사물을 자연으로부터 떼어놓는다’고 말하면서, ‘혐오는 그런 경계선이 흐릿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폴론적 반응’이라고 말한다. 윤곽선을 확고히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늘 바뀌는 다(多)’이다. 이경희의 회화작품에서 무너져 내리는 경계선은 정체성의 해체이자 재구축이다. 캐밀 파야에 의하면 디오니소스는 ‘우리를 다른 사람, 다른 땅, 다른 시대로 데려간다.’ 디오니소스는 사물에 운동과 에너지를 부여한다. 그것은 정지나 객관화가 아닌 이동과 용해인 것이다. 조형언어 또한 경계를 넘어선다. 그럼으로서 꿈과 무의식에 더 가까워진다. 문법과 시제가 불확실한 언어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장소를 가리킬 뿐이다. 낭만주의나 초현실주의처럼 작가는 수동적 입장을 취한다. 이전의 프로젝트들이 행동과 성취를 강조한다면, 회화는 보다 유동적 과정이다. 실제로는 많은 곳을 다니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작가의 체험과 인상이 모두 작품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작품의 무대를 ‘지구’로 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작품 [지구 반대편의 무지개]는 지구의 다른 쪽이나 그 너머까지도 가려 한다. 


저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희망에 찬 실루엣이 폐허같은 장면을 무색하게 분홍색으로 강조된다. 이 작품에는 불편한 도보를 대신하는 오토바이 여행의 인상이 담겨있다. [cut! action!]은 다른 작품에 비해 다채로운 색감이 특징이다. 따스한 색도 많이 섞여 있어 화려하다. 하지만 신체를 비롯해서 뭔가 잘려있는 상황은 연속적이다. 이전에 작가는 국내외의 다양한 장에서 퍼포먼스 작업을 해왔다. 그때 행위를 담아냈던 것은 주로 영상이다. 기획된 것을 관객이 이해하기 위해서 영상은 편집되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은 특정 서사를 향해 편집, 즉 잘리고 붙이는 과정을 거친다. 한편 인간의 행위는 명상이나 상상과도 달리 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목적을 이루는 구체적 행위인 생산은 자르고 움직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다채로운 색-형태는 서로의 경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생산을 향해 조합되는 과정을 활기차게 표현한다. 특히 화면에서 쑥 나오는 듯한 손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다. 









영상과 달리 회화는 행위의 전후를 내포하는 순간을 담음으로서, 한 장면으로도 이야기한다. 녹색 톤의 작품 [자연사 박물관]은 박제화된 자연에 대한 패로디처럼 보인다. 죽은 것은 산 것을, 단편은 전체를 흉내내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분류하고 수집하고 배치하는 행위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있다. 대상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그 대상을 이해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 예술 또한 비슷한 운명이다. 나의 기원이며 내가 돌아갈 그 원초적인 자연 앞에서 예술가 또한 자기 나름의 질서화 방식을 통해 대상을 전유한다. 자연사 박물관의 단편화된 동물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작품 [의문의 공격]에는 목이 잘린 여자가 등장한다. [cut! action] 머리와 몸통이 잘려진다. 그림 자체가 하나의 프레임을 통해 무엇인가를 자른다. 미술의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을 의식적으로 활용한 이들은 인상주의이다. 이 유파는 당시의 사진을 참조하고 그것과 경쟁했다. 


분업화된 근대사회에서 전체적 비전은 관념주의를 통해서가 가능했다. 사진적 시각이 단편을 통해 물신주의를 부추키는 것은 대량생산/소비사회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그러한 시각이 사도마조히즘같은 하위문화로도 스며든다. 반(半) 추상을 하면서 우연적 과정에 작품을 활짝 열어놓은 작품에서 무의식은 활성화된다. 잘린 신체에는 가학 피학적 충동이 내재한다. 캐밀 파야는 역사상에서 등장했던 사도마조히즘을 일종의 형체 허물기로 이해한다. 사드의 소설에 나타나듯이, 성적 방탕자들은 신체의 윤곽을 허물어뜨리면서 찢고 찌르고 긁고 파내고 폭행하고 절개하고 조각내고 태우고 용해한다, 캐밀 파야에 의하면 사드는 인간의 신체를 디오니소스적 과정에 복종시킨다. 인간을 기본물질로 환원시켜 사나운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제상황이라기 보다는 상상(사드의 경우에는 소설이나 연극)이다. 사드의 작품 속 주인공은 ‘자유로운 상상력이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직조하고 창조한다’(쥘리에트)고 외친다. 작품 속 ‘자르는’ 상상은 고통뿐 아니라 ‘쾌락이 태어나는 유일한 요람’(쥘리에트)이다. 









신체절단의 상상은 단지 엽기적 취미가 아니라, 변신에 대한 상징이다. 대상의 동일성, 정체성을 불확실하게 하는 경계선의 와해는 공격적이다. 그것은 상처나 부상부터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의문의 공격]에서 혀가 강조된 도상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공격이 언어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그것은 에로틱한 행동일수도 있지만, 에로티시즘의 본질에는 권력이 있으며 자의반 타의반인 힘이 작동한다. 힘이 가해지는 방향에 따라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갈라지며, 양자는 유희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 매혹과 배척 그 모두는 밀고당기는 힘의 역학관계에 있다. [삼킨 다리]보다는 여러 색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울한 색감은 연속적이다. 작품 [두 사람]에서 두 사람은 한 개체처럼 상호작용한다. 가장 긴밀한 소통인 사랑은 경계를 푸는 과정이다. 물론 그 과정은 평화롭지만은 않다. 초록빛 자연이 풍요로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작품 [길 위의 분노]는 이국의 여행지에서 지인과의 다툼에 대한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다툼은 서로의 입장을 대조하면서 분명하게 한다. 어느 작품보다 인체의 외곽선이 뚜렷한 이유다. 화면 가득한 푸른색이 지시 대상과도 겹쳐지는 작품 [밀려오는 파도]에서 바다는 작가가 다녔던 수많은 대륙을 이어주는 거대한 자연이다. 이번 전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푸른 바다색은 여성을 떠올린다. 융 학파의 심리학자 에리히 노이만은 [위대한 어머니 여신]에서, 독일어 mutter(어머니)가 습지(moder), 울타리(moor), 늪(marsch), 바다(meer)에 언어적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생명의 출발이 바다이고 여성은 바다를 몸에 품어 개체발생으로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원형의 심리학에서 ‘위대한 어머니 여신’, 즉 모성은 반쪽의 성이 아니라, 양성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통합을 말한다. 예술에서 이러한 카오스로의 퇴행 또는 역행이 필요한 이유는 갱신을 위한 것이다. 이경희는 회화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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